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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_ 비상시의 이력서
서시(序詩) _ 1945년 8월 Ⅰ. 기차 지붕에 타다 포도 무늬 누비이불/한탄강 철교를 기어서 넘는다/미군과 DDT/다시 본 한탄강 철교/기록 말살형/비상시의 풍속도 Ⅱ. 서울과의 만남 청엽정3가 48번지/무덤에 깔아 준 방석/강 내과와 가족 복지/부숙이네 가게와 천 서방네 가게/진이 엄마/헤픈 우정의 속내/재봉틀과 멸치/효창초등학교 Ⅲ. 멀고 먼 학교 정동 1번지/전차 problem/교훈과 교가의 수사학/교과서에서 배운 우리 문학/서점 없는 시대의 책 읽기/뿌리 다시 내리기 Ⅳ. 먼저 떠난 친구들 강형순/이범준/양찬집/김주상/박경희 Ⅴ. 선생님, 우리 선생님 우리 역사 선생님은 곰돌이/조흔파 선생과 「사미인곡」/‘유랑의 무리’ 합창과 김순애 선생/‘6시 5분 전’ 채인기 선생/새내기 물리 선생 유한흥 Ⅵ. 내가 만난 서울 내 짝꿍의 신부 놀이/서울스럽게 늙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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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라는 게 있으면 별것이 아닌 것 같은데, 없으면 참 많은 수난이 따른다. 그걸 아니까 한 번도 평탄해 본 일이 없는 혼란스러운 이 나라에, 흙 한 줌이라도 보태어 주고 싶은, 조건 없는 애국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세대인 것이다.
---p.12 달리는 기차 지붕 위는 밤에는 추웠지만, 낮에는 전망이 좋아서 견딜 만했다. 처음 하루는 그 높은 곳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높아서 먼 곳까지 잘 보였다. 그건 내가 본 일이 없는, 넓고 새로운 세계였다. ---p.26 중학교에 가자 내게는 평생 같이 걸어갈 진짜 친구들이 많이 생겨났다. 양식이 있고, 규범적이면서 생각이 깊은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과 70년을 즐겁게 동행했다. 든든한 기둥처럼 흔들림이 없는 친구들이어서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p.160 정동 네거리에서 미국 대사관 앞을 지나가는 길은 그때도 지금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각생에게는 지옥의 고개였다. 남대문에서 학교까지 두 정거장을 걸어가는 학생들은 그 고개에 이르면 지쳐서 곤죽이 된다. ---p.191 세월이 우리의 기억들을 자꾸 지워 가고 있지만, 그런 특별한 기억은 세월의 파도에 밀려도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숨이 넘어갈 그날까지 그 사랑의 선물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p.305 남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으며 사는 자신감,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깔끔함, 중용에서 벗어나지 않는 균형 감각, 똑 부러지게 하는 의사 표시,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 스스로를 아끼는 자존심, 위기에 대비하는 슬기, 생활을 아름답게 가꾸는 심미감…. 이런 것들을 다 모아 놓으면 서울스러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p.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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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강인숙이 복원해 낸 80년 전 서울의 기억과 전통문화의 미학
1945년 11월, 열두 살 소녀 강인숙은 밤중에 38선 한탄강 철교를 기어서 건넌다. 침목 사이가 너무 넓어 뱀처럼 납작 엎드려 건너야 했던 그 철교를. 이 장면에서 시작되는 『서울과의 만남』은 피란민 가족이 서울에 뿌리내리기까지의 혹독하고도 생생한 기록이다. 이 책은 두 층위로 읽힌다. 하나는 역사적 기록이다. 38선을 넘는 방법이 2년 사이에 네 번이나 바뀌던 혼란기, 1·4 후퇴 당시 한강이 얼어 달구지를 밀며 강을 건넌 피란민들의 풍경, 소한·대한 사이의 혹한 속 기차 지붕 위의 삶이 열두 살 아이의 눈높이로 세밀하게 포착된다. 또 하나는 문화적 발견의 서사다. 함경도 북방 문화 속에서 자란 저자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조우한다. 저자는 이 낯섦과 아름다움에 이끌리면서도 '너무 반듯한' 서울 문화에 저항하던 시절을 솔직하게 그린다. 서울의 문화는 충격이기도 했다. 서울 토박이 아이들의 단단하고 반듯한 현실 감각은 열두 살 니힐리스트에게는 낯설고 빡빡해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90대가 된 경기여고 동창들이 "아프다, 외롭다"는 말 없이 품위 있게 모이는 것을 보며, 저자는 비로소 이 이질적인 문화와 화해한다. "다른 것은 탐나지 않는데 늙는 것만은 '서울스럽게' 늙고 싶어진 것이다." 93세의 현재에서 열두 살에게 건네는 말 책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글을 쓰다가 문득 경원선을 타야겠다고 생각한 83세의 저자가 한탄강역에 내려 철교 앞에 서는 장면, 70년 전 기어서 건넌 다리를 바라보며 그 시절 가족들을 불러 세우는 장면은 회고록이 아니라 한 편의 시처럼 읽힌다. 저자 스스로 밝히듯 "상상력이 부족하고 고지식해서 직접 겪은 것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이 쓴 책이기에, 이 책에 담긴 모든 장면은 더욱 묵직하다. 역사가 개인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그리고 그 통과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향한 감각이 어떻게 살아남는지-이 질문에 답하는 책이 『서울과의 만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