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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해 불능의 망망대해에서
1부. 오해받는 인간 1. 〈무한도전〉 유니버스의 뒤틀린 민족주의_신채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2. 그래도 지구가 돌지 않았던 이유_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 3. 신화가 된 프로파간다의 악마_요제프 괴벨스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4. 사과나무를 심든 말든_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 5. 파시스트 도당과 소비에트 인민에게 죽음을_이오시프 스탈린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의 죽음은 숫자다” 2부. 오독되는 고전 6. 회색분자를 위한 지옥은 없다_단테 알리기에리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장소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7. 어느 반민주주의자의 이상향_플라톤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자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8. 바다는 비에 젖고 인간은 파멸한다, 그러나_어니스트 헤밍웨이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9. ‘악법도 법’이라는 집단적 오독에 관하여_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이다” 10. 악의 복합성에 대한 소고_한나 아렌트 “악은 평범하다” 3부. 와전되는 서사 11. 적폐청산의 윤리학_알베르 카뮈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 12. ‘시네필 3법칙’에 대한 소소한 반론_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세 단계가 있다” 13. ‘이것도 예술인가’라는 오래된 질문_앤디 워홀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받는다” 14. ‘런승만’으로부터의 탈주_이승만 “여러분, 서울은 안전합니다” 15. 정언명령과 클리셰_스탠 리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4부. 왜곡되는 세계 16. 노화, 보수화, 그리고 전향_윈스턴 처칠 “젊어서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늙어서도 사회주의자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 17. 인생을 낭비하고 세상을 망치는_알렉스 퍼거슨 “SNS는 인생의 낭비다” 18. 내 통계가 이렇게 엉망일 리 없어_마크 트웨인 “거짓말에는 세 종류가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19. 권력을 견디는 정치, 정치를 견디는 권력_에이브러햄 링컨 “권력을 쥐여 보면 인격을 알 수 있다” 20. ‘당신의 말할 권리’와 싸우는 사람들_볼테르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권리를 위해서라면 목숨 걸고 싸우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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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무분별하게 전파되어 상식인 양 행세해 온 허위 명언들의 왜곡된 사실관계를 바로잡는다는 것이 당시 기획의 취지였으나, 5년여 만에 글을 들여다보면서 배운 것은 역시 오해를 일소하는 일보다-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오해를 이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또한 재밌다는 점이었다. 이 책에서 검토한 여러 경구, 명구, 격언, 아포리즘의 실태를 그저 효율적으로 규명하는 데 방점을 두었다면 글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가능한 한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말의 면모를 다방면에서 조명하고자 했으니, 그편이 더 흥미롭고, 성의 있는 이야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실은 이 책의 많은 챕터에서 명언의 진가(眞假)를 가리는 작업은 일종의 맥거핀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를 홀리고 낚아 올린 문장들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고, 단지 우리 자신의 세계를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러고 싶은 대로 듣고, 말하고, 믿는다.
--- p.9 갈릴레이는 천재적 직관으로 우주의 실재적 진실을 꿰뚫어 본 과학자였으나 경쟁 이론들보다 신뢰할 만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고, 이런 악조건 속에 성경 해석론까지 전용하며 사상을 밀어붙였다. 반면 교회로서는 급진적이고 불완전한 가설을 무턱대고 수용하여 안정적이고 점진적으로 유지·보수되어 온 지식 체계를 뒤흔드는 혼란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저간의 자초지종을 종합하여 20세기의 과학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갈릴레이의 작업이 차라리 ‘선전’에 가까웠으며, 적어도 그때까지의 축적된 이론과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를 견지한 쪽은 교회였고, 로마가톨릭이 갈릴레이를 기소한 것은 합당하고 책임감 있는 조치였다고 평했다. --- p.45 결과적으로 괴벨스의 선전에 가장 깊이 속아 넘어간 이는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이 거짓과 기만의 대명사처럼 소환되곤 하는 오늘날의 광경은 그러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무엇보다 우리가 취해 봄 직한 교훈은 프랑스의 신학자 자크 엘륄의 글에 있다. 그는 악의를 가지고 거짓을 꾸며 내는 선전자와 그에 속아 넘어간 순진무구하고 무기력한 대중이라는 상투적인 도식을 반박하며, 나치 수뇌부와 괴벨스가 일방적으로 대중의 눈을 가린 것이 아님을 일러 주었다. 괴벨스에게 환호하고 그를 통해 희망을 꿈꾸었던 보통 사람들이야말로, ‘프로파간다의 악마 괴벨스’라는 신화의 공저자라는 것이다. --- pp.63-65 불개입 원칙을 슬로건으로 앞세워 1916년 재선에 성공했던 당시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몇 달 뒤 독일의 잠수함 공격을 계기 삼아 참전파로 돌아서게 되는데, 여기에는 친유럽 엘리트를 위시한 개입주의자들의 압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국정 운영의 대선배인 루스벨트가 있었으니, 윌슨의 도덕주의를 비겁한 것으로 여겼던 그는 평화란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의가 관철되었을 때라야 평화도 의미 있는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신곡』을 곁들였다. 『미국과 세계대전』에서 그는 “선과 악 양쪽을 모두 거부한 천사들을 위하여 지옥에서도 특별히 악명 높은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라고 적었다. --- p.112 어느 쪽이든, 통치자의 권위를 신성시하는 한편 그에 조응하는 빡빡한 도덕률로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억압하고 규율하는 플라톤식 유토피아는 다분히 문제적이다. 이로부터 공산주의의 편린을 감지하여 철인왕을 주체사상에 빗대는 시선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서는 ‘철인이여, 일어나라’를 외쳤던 『국가』 속 문장이 민주 시민의 권력 의지를 깨우는 주문으로 쓰이는 형편이다. 플라톤이 돌아온다면 어느 쪽을 더 못마땅해할지 자못 궁금한 일이다. --- p.133 관객 한민수와 평론가 파버, 감독 트뤼포, 그리고 정성일의 시네필리아에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부질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니 어찌 ‘시네필 3법칙’이 통용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을 실천하는 각자의 행로가 있을 뿐이다. 그들의 재능과 열정에 탄복하며, 만국의 덕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p.211 여기서 ‘스파이더맨’이라는 상징자본의 작동 원리, ‘큰 힘-큰 책임-희생’의 메커니즘은 억압으로 기능하기에 이른다. 이에 피터 파커가 아닌 흑인 마일스와 여성 그웬을 앞세워 고여 버린 서사 시스템 자체와 맞서도록 한 것이 이 작품의 아이디어다. 스파이더맨 유니버스가 반세기 넘는 기간 구축해 온 오랜 전통과 전면전을 벌이도록 한, 일종의 ‘안티 스파이더맨’ 서사다. 이 역동적인 구조 속에서 시효가 다한 것처럼 보였던 스파이더맨의 도덕률은 오히려 생기를 되찾는 듯하다. 절대 다수의 스파이더맨이 프랜차이즈의 전통과 질서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순응하라며 겁박하는데, 마일스와 그웬이 보기에 정의를 고정된 자리에 가둬 두고 희생을 강요하는 행태는 어느 모로 보나 결단코 히어로가 할 짓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늘 옳은 편에 서야 한다’는 결심을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곧 옳은 편’이라는 맹신으로 바꿔치기하는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 p.254 마지막 4부는 이처럼 자신이 처한 현실의 형편을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자화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찾는 탐구는 못 되어도 덜 불행해지기 위한 공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 p.261 새로운 것을 어리고 어리숙한 것에 유비하여 단절과 편향의 틀 안에 가두는 수사학은, 우리 시대 온라인 커뮤니티의 ‘밈적 사고’와도 통한다. 맥락을 지우고 편집하여 단편적인 프레임만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하는, 사고의 구조조정 말이다. ‘좌파 탈출은 지능순’이라거나 ‘페미니즘은 정신병’ 같은 표현을 떠올려 보라. ‘40대 사회주의자는 뇌가 없는 것’이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논박을 도발로 대체하여 사람을 질리게 하는 어떤 선정성이 배어 있다. 두 번째로 따져 볼 일은 한 사람의 사상적 전회를 그저 노화의 결과물로 환원하는 설명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특정한 개인, 혹은 일개 세력의 신념 체계가 역사의 물길에 휩쓸리며 이리저리 휘는 데에는 온갖 특수하고 복합적인 사정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 p.269-270 그저 독한 농담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 사회학자 무사 알 가비는 지난 2024년 미국 대선 데이터를 분석하며 카멀라 해리스의 낙선 원인이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결집이 아닌, 민주당의 주요 타깃이었던 유색인종과 여성 표를 대거 트럼프에게 내준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인종과 성별을 불문하고 보통의 다수 유권자가 공화당을 선택한 것은 “민주당을 (경제, 안보, 교육 등 정책보다) 논쟁적인 도덕 정치에 치중한 세력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민주당이 중요하게 여긴다고 ‘보이는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것이다.” (…) 이와 같은 부족주의의 함정으로부터 정치적 올바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니먼의 경고는 타당해 보인다. 그것은 결국 도덕을 독점하려는 독선과 토론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아집으로 점철된 또 다른 고립에 다름 아니며, 그 비탈의 끝에는 온갖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부터 멸균 처리 된 유토피아가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동의할 수 없는’ 이견들과 함께 지워지는 것은 인간성 자체일 테니, 저들의 이상향처럼 두려운 것도 달리 없다. 진리와 정의를 전용하여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이 언제나 지옥을 불러들였다는 교훈이야말로, 우리가 역사 속에서 체득한 얼마 안 되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 pp.331-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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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어떻게 명언이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거짓이 되는가 우리를 속이고 감동시켜 온, 우습고도 서늘한 인용과 왜곡의 역사 이 책에는 플로베르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플로베르에서 한번 출발해 보자. 다른 이유는 없고, 단지 나무위키의 ‘명언’ 항목이 플로베르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까닭이다. “격언: 결코 새롭진 않지만 언제나 위안을 준다.(MAXIME: Jamais neuve mais toujours consolante.)” 플로베르의 사후 발표작 『통상 관념 사전』에서. 격언에 관한 정의로서는 이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나도 마침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는 말, 느낌표를 띄우는 말이 격언이 된다. 누군가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퍽 위로가 되는데, 어록까지 기억될 만큼 유명한 양반이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준다면 더더욱. 거기다 약간의 운율과 유머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문제는 플로베르가 썼다는 이 ‘사전’의 진짜 성격이다. 이번에는 국내에 이 책을 번역한 책세상 출판사의 도서 소개를 인용해 보자. “상식적으로 분명하고 명쾌하다고 생각되는 추론 방식이나 정의(正意)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지식과 사고 체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해 준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해당 항목에서는 이 책을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과 상투적인 표현(cliché)들을 모아 놓은 사전”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이름 모를 인터넷 필자의 초점은 ‘위안’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플로베르의 방점은 ‘진부함’에 찍혀 있었다. 플로베르는 격언을, 아니 격언을 되는 대로 가져다 쓰는 동시대 부르주아들의 지적 게으름을 비웃으려 했다. 사유를 생략하고 기분만 소비하는 말의 유통 방식을. 그가 오늘날 우리의 언어 생활을 본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경구, 명언, 격언, 아포리즘… 현란한 말들의 난장판 속에서 오해가 번식하는 말의 생태계를 탐구하다 잠깐의 위로로 그칠 따름이라면 달리 트집 잡을 일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명언’을 사용하는 방식이 기운을 북돋아 주는 위무에 그치지 않을 때가 잦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명언은 우리의 막연한 믿음을 확증해 준다. 단지 유명한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는 이유로, 말의 권위는 정당화되고 널리 퍼진다.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말을 바꾸고, 또 다른 이는 무심코 와전된 말을 옮긴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맥락은 어느새 지워져 버리고, 그 말을 끌어다 쓰는 현재의 형편 또한 흐려지고 만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생각보다 문장을, 문장보다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하여 오해는 상식이 되고, 날조는 교양이 된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이처럼 왜곡된 통념의 역사를 파고든다. 저자 박강수는 6년 차 기자로, 인턴기자 시절 몸담았던 팩트체크 전문 매체 『뉴스톱』에서 ‘가짜명언 팩트체크’ 시리즈를 연재한 바 있다. 닳고 닳은 말의 소비와 유통에 관한 일련의 문제의식은 줄곧 이어져, 이후 『한겨레신문』에서 ‘박강수의 허언록’ 시리즈로 확장되었다. 그 오랜 탐색의 결과물을 깊이 있게 보강하여 묶어 낸 것이 바로 이번 책이다. 그러나 단순히 명언의 진위를 판정하고, ‘사실은 이렇습니다’ 하는 투로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재미있는 사실들을 추려 놓은 트리비아 모음집도 아니다. 이전에 연재했던 원고들을 다시 살피면서, 저자는 오해를 일소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해를 이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또한 재밌다는 점”을 배웠노라고 고백한다. “명언의 진가(眞假)를 가리는 작업은 일종의 맥거핀이나 다를 바 없다”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를 호리는 멋진 문장들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소비해 온 우리의 서투른 태도일지 모른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말들의 이상한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듣고 싶은 말을 사실로, 믿고 싶은 바를 진실로 만들어 온 인간의 오래된 습벽에 실소가 새어 나오고, 이내 멋쩍은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게 될 것이다. 그야 물론 남의 일이 아닌 까닭이니, 부디 저자의 말마따나, “여러분의 사려 깊은 독해를 당부한다.”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고 있어 보이는 말에 취하는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 그렇다면 우리가 상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유명인들의 말 뒤에는 과연 어떤 진짜 맥락이 숨어 있을까? 저자가 집요하게 추적해 낸 '오해의 연대기'는 자못 흥미진진하다. 책은 동서고금의 유명한 어록 20개를 해부대에 올린다. 어떤 말은 주인이 아예 틀렸고, 어떤 말은 원작자가 맞지만 뜻이 완전히 뒤집혔으며, 또 어떤 말은 허위인 줄 알았으나 사실로 밝혀지기도 한다. 저자는 이 집요한 탐색을 통해, 오랜 세월 상식의 탈을 쓰고 행세해 온 말들의 생애를 하나씩 복원해 간다. 예컨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장을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속삭였다는 일화를 살펴보자. 대체 누가 혼잣말을 엿들었을까? 저자는 이 의심스러운 전언(傳言)이, 종교를 비판하고 갈릴레이를 진리의 투사로 숭상하고자 했던 후대 작가의 창작임을 밝혀낸다. 그러나 파이어아벤트와 같은 일부 과학철학자들은, 갈릴레이더러 증명을 요구한 당대 교회의 처분이야말로 오히려 ‘과학적’이었다고 반박한다. 갈릴레이의 사례는 때로는 진실보다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이승만이나 카뮈, 단테의 ‘가짜 어록’처럼 역사의 해석과 정치적 행로에 끼어드는 말들부터, 정성일이 지어낸 트뤼포의 ‘시네필 3법칙’처럼 열정에서 비롯한 귀여운 실수로 읽힐 법한 말들, 앤디 워홀이나 〈스파이더맨〉의 사례처럼 오늘날 우리의 문화적 풍경을 비춰 보는 말들까지 폭넓게 다룬다. 링컨이나 볼테르의 말처럼 그 뜻은 옳으나 실상은 아전인수격으로 사용되는 말들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명언들, 우리는 왜 생각을 멈추고 남의 말에 기대어 쉬는가 이처럼 복잡한 말들의 생애를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이상야릇한 지점에 서게 된다. 진위 너머에서도 무성히 자라나는 각양각색의 서사 앞에서, 해방감과 서늘함이 묘하게 소용돌이치는 자리다. 화로의 불이 꺼진 뒤에도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제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이 연기가 진짜인가’가 아니라, 연기를 보고도 불씨를 확인하려 들지 않는 우리 자신의 게으름이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함'을 논하며 경계했던 것도 바로 그런 나태함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며 닳아 버린 말들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삼켜 버리는 사유의 정지. 명언의 수풀을 헤치고 다다른 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을 떠다니는 게으른 말들의 불씨를 보게 될 것이다. 괴벨스를 다루는 장에서 저자는 프랑스의 사상가 자크 엘륄의 다음 문장을 인용한다. 어쩌면 이 책의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압축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선전자는 선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을 사로잡을 수 없다. (…) 잠재적 피선전자가 없다면, 선전자도 없다. (…) 선전은 피선전 집단의 필요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엄격하게 사회적 현상이다.” 비효율적이고도 성의 있는 이 기나긴 탐색을 끝내고 나면, 우리는 마침내 저자의 전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찾는 탐구는 못 되어도 덜 불행해지기 위한 공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