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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_ 러브레터를 쓰는 시간
이태희 잘못 재생된 음악 빛의 커튼 때 이른 에필로그 침묵의 보호 843번에 있어야 할 것 『걷거나 가라앉기』 가라앉기 빗방울 속의 세계 돼지 분류학자 혹은 예언자 빈 초소 제대로 재생된 음악 『걷거나 가라앉기』 우연과 호의 뒤늦은 프롤로그 마음 세 번째 헤어드라이어 심사평_ 여전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문학을 증명하다 정지아(소설가), 조경란(소설가), 이기호(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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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아침에 가족이, 연인이, 친구가 누군가의 일상에서 사라졌다. 그런 식으로 연관된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일을 화제에 올리기는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p.18 - “LP 사업이 망할 거라는 얘기는 60년 전에도 있었대요. 하지만 카세트테이프가 CD로 대체되고, mp3를 지나서 스트리밍의 시대가 되기까지 정작 LP의 명맥은 끊인 적이 없다더군요.” ---p.21 - 누군가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아냈거나, 집배원이나 배달부로 위장해 초인종을 눌렀거나, 연애 끝에 으레 찾아오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은서 언니가 집에 들어오는 순간을 노려 현관문이 닫히기 전에 달려들었거나, 외벽을 타고 기어올라 창문을 통해 들어온 누군가가 집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가능성들. ---p.32 -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다. 나는 자명하게 예견된 미래라도, 내게 닥치기 전까지는 실제로 벌어지리라고 실감하지 못했다. 예정된 수순이 아니라 막연한 허구처럼 느껴졌다. ---p.55 - 흔적은 흐르듯 이동해 한곳에 고인다. 이 구역을 저수지라고 불렀다. 저수지는 개별적인 흔적보다는 상대적으로 발견이 쉬웠으나, 흔적이 물처럼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만은 아니어서 탐지하고 위치를 예측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번 저수지가 형성되면 그 위치가 변하는 일은 드물었다. ---p.65 - 며칠이고 필사를 계속하던 문성훈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자신이 공책에 쓴 문장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p.69 -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에서는 대부분 과거로 돌아가 어떤 선택을 달리한다 해도 결과는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잖아…… ---p.94 - 그녀는 비로소 멈추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닫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 그래, 이제는 다시 시간이 존재했다. ---p.108 - “아마 각각의 빗방울마다 그 너머의 풍경이 비쳐 있을 거야. 도시든 산이든 뭐든 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저마다의 세계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p.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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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없는 실종이 일상이 된 세계,
상실의 시대를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공감의 메시지 제6회 넥서스작가상 대상 수상작인 이태희 작가의 『내가 없는 세계』는 타인의 부재가 남긴 상흔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어루만지는 웰메이드 소설이다. 또한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지능적으로 무너뜨리는 독창적인 메타픽션이다. 주인공 민정은 사라진 룸메이트 은서의 방에서 영수증 하나를 발견하는데, 그 영수증에 적힌 소설책 『걷거나 가라앉기』가 돌연 자취를 감춘 옛 연인 경현의 원룸 책상 위에서 발견된다. 이 책을 매개로 인물들의 운명이 거미줄처럼 얽히기 시작한다. 이 가상의 소설 내용이 본문 중간중간 교차 삽입되며, 독자는 민정과 함께 환상과 현실이 혼재된 미로 속을 헤매게 된다. 특히 인물들이 나누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나 테베의 예언자 오이디푸스에 대한 철학적인 논쟁은 단순한 미스터리를 넘어선 깊은 지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모든 것이 이미 쓰인 책처럼 정해진 운명이라 할지라도, 그 결말을 결정짓는 것은 무효가 되지 않으며 결국 묵묵히 걷기를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라는 작가의 통찰이 빛난다. 또한 경현의 군대 후임 문성훈은 “이야기가 있어야만 비로소 실제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는 파격적인 가설을 제기하며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군부대의 비밀스러운 공간인 ‘저수지’의 진실을 찾는 성훈, 적막한 스피크이지 바에서 음악으로 도피한 규진 등 인물들이 나누는 담담한 대화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설 속 인물이 또 다른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의 내용이 다시 현실의 실종 사건인 ‘걸어나가는’ 현상과 정교하게 맞물리는 구조는 독자들에게 한 편의 지적인 퍼즐을 맞추는 듯한 쾌감을 선사할 것이다. 주인공 민정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각자의 상처와 고립 속에서도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비로소 삶의 다음 페이지로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 불가항력적인 운명 앞에서도 완전히 가라앉기를 거부하고 뚜벅뚜벅 자신의 일상을 회복해 나가는 민정의 여정은, 지금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지만 단단한 구원의 메시지가 되어줄 것이다. 독창적인 세계관과 빈틈없는 서사로 무장한 이 책은 미스터리, 철학, 감성 서사를 모두 만족시키는 잊지 못할 독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심사평’ 중에서〉 여전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문학을 증명하다 사라진 사람들 앞에서 자주 멈추고 주저하고 길을 잃는 인물들은, 묘하게도 어떤 두려움과 그리움과 연민의 정서를 낳았다(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가진, AI가 따라오지 못하는 문장의 힘이었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이 매혹적인 설정(실종과 예언)을 허둥대거나 엄살 피우지 않은 채 조용히 강약을 조절해나가는 작가의 시선이다. 이 시선으로 인해(소설 속 소설인 『걷거나 가라앉기』가 그 시선의 핵심이다) 이 이야기는 세계의 틈과 장막 너머에 사는 존재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현실과 허상의 이분법에 대한 질문을 끝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작가는 재현할 수 없는 세계를 끝끝내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들이다. 그 노력의 흔적이 각기 다른 정동(情動)을 만들어낸다. 『내가 없는 세계』는 계속 길을 잃으면서도, 그럼에도 계속 걸어 나가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의 또 다른 감각을 일깨웠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이루어낸 성취가 작지 않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내가 없는 세계』는 문학이 여전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그 일을 수행하고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다. 넥서스작가상이 이 작가를 발견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작가가 우리 앞까지 스스로 걸어들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 걸음의 방향과 속도를 앞으로도 오래 지켜보고 싶다. 그 운명이 놀랍고, 또한 경이롭다. 제6회 넥서스 작가상 본심 심사위원단 _ 정지아(소설가), 조경란(소설가), 이기호(소설가)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소설은 러브레터다. 소설을 다 쓴 뒤에야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러브레터는 필연적으로 답장이다. 러브레터라는 건 상대에게 응답하는 방식으로만 쓰이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문학에 대한 오랜 짝사랑이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이 소설을 쓸 무렵은 작별하는 시기였다. 1년 사이에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인연이 마무리되고, 이제 소설은 그만 쓰겠다고 생각했다. 식당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창으로 햇빛이 환하게 비쳐드는 식당이었다. 아무것도 읽지도, 쓰지도 않았다. 더는 쓸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반년쯤 지났을 때, 전역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산 아이패드 생각이 났다. 아이패드를 사놓았는데, 영화 보는 데에만 쓰자니 좀 아까워진 것이다. 고작 그런 핑계로 다시 글을 써보기로 했다. 더는 쓸 말이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이젠 쓸 말이 남아 있지 않다’라고 첫 문장을 썼다. 그러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쓸 말이 생겼다. 아니, 이상한 일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아이패드에 초고를 쓰고, 쉬는 날 타이핑해 데스크톱에 저장한다. 매주 그렇게 썼다. 그러니까, 지금은 없어진 ‘냉삼식당’에서 이 소설의 초고를 썼다. 믿기 어렵겠지만 식당 주방은 러브레터를 쓰기에 그리 적합한 장소는 아니다. 지난 5년간 학교 급식 조리실에서 일하다 폐암에 걸린 노동자가 196명에 달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급식 조리실만의 사정은 아닐 것이다. 주방은 육체노동의 현장이고, 그러한 현장이 대개 그렇듯이 노동자에게 그리 우호적인 환경은 아니다. 주방에서는 폐가 먼저 망가지기 시작한다. 식당에서 일한 마지막 1년 동안에는 체중이 10kg 가까이 줄기도 했다. 그 경험으로 육체적인 이야기를 쓸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를 더 오래 상상했다. 그건 내가 읽은 책 속에 있는 세계였다.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책 속의 세계와 사시사철 더운 주방 사이를 부단히 오갔다. 다른 곳에서였다면 이런 식으로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몇 년 만에 책장을 정리해둔 참이었다. 정돈된 책장 앞에 앉아 나란한 책등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당선 연락을 받았다. 이상한 우연이다. 나는 그런 우연을 좋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