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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_ 박덕은 / 7
제1부 김현승 작가론 김현승의 문학적 연대기와 작품세계 / 12 제2부 통찰과 윤리의 메타포 1. 눈물과 기도와 바람의 변주 / 20 2. 인식의 새로움과 이미지의 형상화 / 33 3. 감각과 윤리의 메타포 / 44 4. 신과 대지의 노래 / 57 5. 영혼과 심령의 말씀 / 69 6. 생명성과 고독의 탐구 / 82 제3부 견고한 고독과 절대고독 탐구 1. 사랑과 견고한 고독 / 98 2. 시와 계절의 변주 / 110 3. 삶과 메타포 / 125 4. 고독 이후 / 138 5. 차 마시는 날의 사색 / 150 6. 눌변의 시, 진리의 시 / 163 7. 내면의 풍경과 기도 / 177 제4부 영혼과 존재 1. 어둠과 무기, 그리고 낚시터의 서정 / 192 2. 영혼과 존재 / 205 3. 칼과 가을의 노래 / 219 4. 존재와 내면의 풍경 / 233 5. 지상에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 / 246 6.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간극에서 / 259 제5부 맺음말 축하마당 / 277 박덕은 프로필 / 289 박덕은 저서 발간 현황 / 299 박덕은 연보 / 302 |
Deok-eu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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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김현승 작가론 김현승의 문학적 연대기와 작품세계 김현승(金顯承) 시인은 1913년 4월 4일(음력 2월 28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기독교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 김창국(金昶國)과 어머니 양응도(梁應道)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다형(茶兄)·남풍(南風),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아버지가 기독교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익산을 거쳐 제주도로 파송되자, 제주읍에서 6세까지 유년 시절을 보냈다. 7세 때인 1920년에 아버지가 광주광역시 양림동 78번지로 이사하자, 기독교 계통인 숭일소학교(崇一小學校)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어 형이 있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다녔다. 학교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학교와 교회를 다니며 문학에 심취했다. 하루는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피파의 노래』를 읽고 감명 받아 시 습작을 시작했다. 이 시절 자작시 「화산(火山)」을 교지 『숭실』에 투고하여 게재하였다. 19세 때인 1932년 숭실중학교 문과에 입학해 다녔으나, 졸업 1년을 남겨두고 병환으로 중퇴했다. 1932년 숭실전문학교 교사로 있던 양주동, 이효석 등의 강의를 들으며 시를 습작하였다. 그러던 중 20세 때인 1933년 위장병으로 부득이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모가 거주하는 광주로 내려가 한동안 요양했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린 후 숭실전문학교에 복학하여 시 창작에 몰두했다. 겨울 방학 중에도 기숙사에 혼자 남아 밤이 늦도록 시를 썼다. 그즈음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등의 시들을 학보인 『숭실』에 발표하였는데, 이 시들이 양주동의 눈길을 끌어, 21세 때인 1934년 5월 25일 〈동아일보〉의 문예란에 이 시들이 발표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그 당시 관례이자 관행이었던 신춘문예나 잡지 추천 제도에 상관없이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등단 이후 그는 〈동아일보〉에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조선중앙일보〉에 「아침」, 『조선시단에서 「묵상주제」, 〈동아일보〉에 「새벽교실」, 교지 「숭전」에 「유리창」, 「철교」 등 18편을 연거푸 발표했다. 이 무렵 그의 시들은 식민지 시대의 고통받는 민족의 비애를 다루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자연을 예찬하고, 인간의 탐구 정신을 담아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즉, 식민지 현실을 강인한 의지로 대응하는 시 세계와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시들을 발표했다. 그의 시어들은 세련되고 지적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즘 성향을 보였다. 1935년 문학비평가 홍효민은 김현승을 가리켜 ‘혜성처럼 나타난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도 김현승 시 세계에 격려와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 주었다. 신사참배 거부로 평양 숭실전문학교가 폐교 당하자, 김현승은 광주로 돌아와, 23세 때인 1936년 숭실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24세 때인 1937년 3월 숭실학교 출석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는데, 이때 김현승은 주모자이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때 그는 모진 고문과 학대를 받았으며, 대구 본심법원까지 끌려가 벌금형을 받았다. 얼마 뒤 그는 학교에서 파면당했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와 여동생도 투옥돼 고문을 당했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여동생은 사망하고 말았다. 여동생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 그 또한 고문 후유증으로 오래도록 시달렸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는 등단한 지 3년도 채 안 되어 절필하고야 말았다. 절필 중이던 25세 때인 1938년 2월 김현승은 기독교 장로의 딸 장은순과 결혼했다. 신혼 때, 어머니 양응도는 여동생 죽은 이듬해에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32세 때인 1945년 8월 조국이 독립되자, 그는 다시 시 창작을 재개했다. 35세 때인 1948년 광주의 호남신문에 잠시 취직해 있다가, 숭일학교 교감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 무렵 경향신문을 비롯하여 여러 신문과 잡지에 「내일」(민성, 1949. 6), 「창」(경향신문, 1946. 5), 「조국」, 「자화상」 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 등과 교류하며 문단활동과 교유의 폭을 넓혀 나갔다. 37세 때인 1950년에는 시 「생명의 날」, 「가을 시첩」 등을 발표하였다. 이때부터는 작품의 성향이 다소 바뀌어, 인간의 고독이나 허무와 같은 근원적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향은 기독교의 영향이었다. 절대적인 신을 확신하고 기독교적인 구원의식을 바탕으로 시 창작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 정신에서 보여지는 높은 윤리성의 실현을 과제로 삼고, 생명, 순결, 진실 등의 관념으로 수렴하려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전시에 아버지가 죽자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냈다. 이즈음에 발표한 시 「생명의 날」, 「가을 시첩」 등에서 그는 고독, 허무 등 삶의 근원 문제로 눈길을 돌렸다. 38세 때인 1951년 4월에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임명된 그는 이후 1959년까지 8년간 재직했다. 이 무렵 그는 당시 전쟁 충격으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던 서정주 시인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서정주에게 조선대학교 부교수 자리를 알선한 것도 그였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의 4살 아들이 병을 얻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물자 빈곤, 그리고 가난 때문에 약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결국 잃고 말았다. 그의 시 「눈물」에서 당시 그가 얼마나 애통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40세 때인 1953년에는 박흡, 장용건, 손철, 이동주 등과 함께 계간지 『신문학(新文學)』을 창간하여 6호까지 간행했다. 여기에 「내가 나의 모국어(母國語)로 시(詩)를 쓰면」(1952)을 발표했다. 42세 때인 1955년에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으로 피선되었고, 제1회 전라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44세 때인 1957년에는 첫 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발간했다. 기독교 정신과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시 창작을 했으며, 주로 자연에 대한 주관적 서정과 감각적 인상을 노래하다가, 점차 사회 정의에 대한 윤리적 관심과 도덕적 열정을 다루어 나갔다. 절제된 언어를 통하여 추상적 관념을 사물화하거나, 구체적 사물을 관념화하는 조소성(彫塑性)과 명징성(明澄性)을 확보해 나갔다. 한때 한국문인협회 상임위원을 맡았다. 45세 때인 1958년에 한국시인협회 제1회 신인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하였다. 1960년 교수로 몸담고 있던 조선대학교의 문리과대학장 자리 교섭을 받았으나 사절하고, 47세 때인 1960년에 모교인 숭실전문대학 부교수로 취임하여, 1975년 임종 때까지 근무했다. 1961년, 한국문인협회의 이사로 피선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962년 12월에 재선되었다. 50세 때인 1963년 김현승은 2번째 시집 『옹호자의 노래』를 발간했다. 여기서 그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종교적 사유를 노래했다. 시 「가을의 기도」 등 가을 연작시와 신적(神的) 세계 질서에 대한 열망과 자유를 노래한 「지상의 시」도 이 시집에 실려 있다. 이후 정치 현실에 대하여 차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52세 때인 1964년에는 숭실대학교 교수로 승진되었고,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을 지냈다. 55세 때인 1968년에 세 번째 시집인 『견고한 고독』을 내놓는다. 여기서 그는 신에 대한 회의와 인간의 근원적인 허무로 인한 고독을 노래했다. 그에게 있어 ‘견고한 고독’은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홀로 맞서 시대를 거부하는 내면의 의지였다. 57세 때인 1970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이 된 그는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개별화된 현대인 삶의 고독감을 노래한 네 번째 시집 『절대 고독』을 펴냈다. ‘견고한 고독’은 간결한 시 형식을 취한 데 비해, ‘절대 고독’은 비유나 상징 등 어려운 말을 자주 사용했다. 이 무렵 『현대문학』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며, 59세 때인 1972년에는 문학이론서 『한국 현대시해설』을 간행했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3선 되었고, 숭실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지냈다. 60세 때인 1973년에 ‘서울시문화상’(예술 부문)을 수상했고, 1974년에 『김현승전시집(金顯承全詩集)』을 펴냈다. 1975년 3월 하순, 차남의 결혼식을 치르고 난 뒤, 고혈압에 의한 뇌졸증으로 쓰러졌으나, 한 달 만에 회복했다. 그 뒤로 신앙에 몰두하며 병원과 교회를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숭실대학교 강의를 하러 나갔다.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에 기도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급히 서울 서대문구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1975년 4월 11일 향년 62세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산문집 『겨울 까마귀』에는 이런 글귀가 남겨져 있다. “나의 고향은 따스운 전라도의 남쪽 광주이다... 양림동의, 아니 광주의 까마귀들은 그 크고 울창한 대숲에서 저들의 아침을 맞아 출발을 서둘렀고...” 유고 시집으로는 『마지막 지상에서』(1975, 창작과 비평사), 산문집으로는 『고독과 시』(1977),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1984) 등이 있고, 문학이론서로는 『한국 현대시 해설』(1972), 『세계문예사조사』(1974) 등이 있다. 땅을 보며 걷는 버릇이 있던 김현승의 「눈물」이라는 시비는 무등산 기슭에 있는 광주 무등산도립공원에 세워져 있다. 또, 광주 호남신학대 교정 내에도 그의 「가을의 기도」라는 시비가 있다. 그리고, 광주광역시 양림동에는 다형다방이 생겨나 늘 그를 추모하고 있다. 그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는 오늘날 절대자와 고독한 인간과의 대화, 문명적인 시대상황, 사랑·신앙·고독 등을 통해 고독을 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시키고 사회비판적 시 정신을 바탕으로 삼게 한 시인이다.” “그는 깨달음의 꽃 ‘화중련’처럼 그의 삶을 혼란한 세상 속에서 순결하고 정제된 언어로 승화시켜 놓았다.” “그는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띤 시와 인간의 본질을 추구한 시를 쓴 시인이다.” “그는 대체로 깊은 묵상과 회개, 진실에의 갈구,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을 추구한 시를 썼다.” “그의 시는 무겁다. 간절하고 통렬한 자기 반성에서 결국에는 종교적 자기 완성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눈송이가 뛰어드는데 자취도 없이 품어 준다는 절대적 사랑과 포근함, 넓은 마음을 표현한 시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