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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건국 삼걸전
양장
신채호 역
지식의풍경 200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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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장지연의 서
2. 신채호의 서론
3. 삼걸 이전의 이태리 형세와 삼걸의 어린 시절
4. 마찌니가 청년 이태리를 창립하고 사르데냐 왕에게 글을 올리다
5. 카부르 몸소 경작하다
6. 마찌니와 가리발디의 망명
7. 남아메리카의 가리발디
8. 혁명 이전의 형세
9. 1848년의 혁명
10. 로마 공화국의 건설과 멸망
11. 혁명 후의 형세
12. 현명한 사르데냐의 새 왕과 재상이 된 카부르
13. 카부르의 내정 개혁
14. 카부르 외교 정책 제1단계(크림 전쟁)
15. 카부르 외교 정책 제2단계(파리 회의)
16. 카부르 외교 정책 제3단계(이태리 - 프랑스 밀약)
17. 이태리 - 오스트리아 전쟁 준비와 카부르 · 가리발디의 회합
18. 이태리 - 오스트리아 전쟁과 카부르의 사직
19. 가르발디의 사직
20. 카부르 다시 재상이 되고 남북 이태리 통일되다
21. 당시 남부 이태리의 형세
22. 가리발디의 남부 이태리 평정
23. 남북 이태리의 합병
24. 제1대 국회
25. 카부르 서거와 그 말경의 뜻
26. 가리발디 투옥되다 그 뒤 영국으로 건너가다
27. 가리발디 로마에 다시 들어가다 그리고 폐하여 다시 사로잡히다
28. 이태리가 로마에 서울을 정하니 대통일의 사업이 이루어지다
29. 신채호의 결론

저자 소개 1

申采浩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같은 해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자, 그의 뒤를 이어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같은 해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자, 그의 뒤를 이어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한다. 1907년 신채호는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선다.

1908년 신채호는 여성 계몽 잡지 『가정잡지』의 발행인이 됐고, 같은 해 『대한매일신보』에 5월부터 8월까지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을 연재한다. 5월에는 『을지문덕』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했고 다음해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출간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신채호는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사상의 전파를 위해 『해조신문』를 발간한다. 1914년에 『조선사』의 저술을 시작한 신채호는 만주를 여행하면서 광개토왕 왕릉 등 고구려 고적을 답사한다. 다음해 북경 도서관에서 『조선상고사』의 집필을 위한 연구 자료를 수집한다. 또 박은식(朴殷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박달학원을 설립한다. 1919년 신채호는 임시정부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된다. 같은 해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 글을 썼고 대한 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의 부단주가 된다. 다음해, 보합단(普合團)의 내임장으로 추대된 그는 독립군 자금을 모집한다.

1921년 북경에서 김정묵(金正默), 박봉래(朴鳳來)등과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만들어 『통일책진회 발기 취지서』를 발표한다. 다음해 북경에서 조선 역사를 연구해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한다. 그리고 1923년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만들었고,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창조파로 활약한다. 다음해 관음사(觀音寺)에서 역사 연구에 몰두한다. 1925년에는 1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를 연재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미발표 작품인 『전후 삼한고』를 쓴다. 1928년 대만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된 신채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아 뤼순 감옥에서 복역한다. 다음해 『조선사연구초』가 동지들에 의해 서울에서 출판된다.

1931년에 그는 『조선일보』에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사』를 연재했고, 10월부터 12월까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한다. 1936년 2월, 신채호의 나이 57세,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은 후,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타국 땅에서 옥사한다. 1945년에는 신채호학사가 설립되었고, 다음해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조선사』의 서문을 『조선사론』으로 표제하여 광한서림에서 출판한다. 1948년 『조선상고사』를 종로서원에서 발행했고, 1955년 단재유고출판회에서 『을지문덕』을 순 한글로 번역 출판한다. 1962년 신채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2007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단재 신채호 전집』이 발행되었다.

신채호의 다른 상품

역자 : 신채호
독립운동가, 역사가, 언론인. 호는 단재이다. 한국 근대 역사학의 이념과 방법론의 기초를 놓았다. 한말 언론 활동 등의 계몽 운동과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서 진행된 초기 역사 연구는 「독사신론」 등의 역사논문, 이순신 · 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에 대한 전기와 역사 관계 논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10년 망명 후에 본격적인 역사 연구에 몰두하여 1920년대 이후 『조선혁명선언』『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를 집필했다. 그의 역사학은 이념과 방법론에서 중세의 왕조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하였고, 그의 정신주의적 민족주의 역사학은 이후 한국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저자 : 량치차오
중국의 뛰어난 학자 · 정치가. 호는 음빙실(飮氷室)이다. 대학자 캉유웨이의 제자로 변법자강 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근대화 개혁 이념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생 동안 지질줄 모르는 필력을 휘둘러 방대한 저술 활동을 전개했다. 이 성과는 사후에 발간된 총 12권의 『음빙실합집』에 망라되었다.

주요 저작으로 『신민설』『중국전제정치진화』『선진정치사상사』『청대학술개론』 등이 있다. 그밖에 『고대희랍학술론』『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설』 등 서양 문화 소개 서적과 여러권의 서양 위인의 전기도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03월 31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283쪽 | 626g | 148*210*20mm
ISBN13
9788989047032

책 속으로

이태리의 건국은 로마 획득이 그 마지막인데, 로마를 얻을 때에 이르면 저 삼걸들이 미치는 직접적 효력은 이미 모두 없었다. 그때 마찌니는 이미 그만두었고, 카부르는 이미 죽었으며 가리발디는 구금된 터였다. 예전에는 머리를 쓰고 목숨을 바쳐 수십 년을 경영해도 얻을 수 없더니 이제는 하루아침에 평온하고도 쉽게 거두어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혹 식견이 얕은 자는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오호 어찌 그러겠는가. 벽에 용을 그릴 때 그것이 날아가는가의 여부는 눈동자를 그려 넣었는가 아닌가에 있다. 눈동자를 그려 넣는 것은 본디 때가 있기 마련이지만 화가의 심력도 실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가리발디 장군의 거사 이후로 주변국들은 이태리 백성의 용감함을 두려워했고 이태리 백성의 열성을 사랑하여 동정을 표시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1870년 보불 전쟁이 일어났는데, 전쟁은 순식간에 끝났지만 유럽의 형세는 이로 인하여 크게 변하였다. 소리 죽여 울며 원한을 품은 채 항복조약을 맺은 프랑스는 로마 교황의 보호자가 될 힘이 없어졌다. 이태리 왕은 온 정성을 다해 교황을 설득하여 양보하라고 했지만 교황 피우스는 여전히 완고하게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1879년 9월 20일, 왕의 군대가 로마에 들어가 최고의 신전에 삼색기를 내걸고, 나라안에 명령을 내려 백성들은 각자 왕을 따를 것인지 교황을 따를 것인지 자유롭게 투표하라고 하였다. 그런 뒤 투표함을 열어 표를 검사하니 왕을 따르는 자의 수는 40,788명이오 교황을 따르는 자의 수는 겨우 46명이었다. 드디어 이듬해 1871년 6월 2일에 사르데냐 왕 에마누엘레가 이태리 황제에 즉위하여 로마에서 국회를 열고 국회 의원에게 이렇게 칙고하였다.

---pp.117~118

신채호의 서론--

무애생은 말한다. 위대하구나 애국자여! 장하구나 애국자여! 애국자가 없는 나라는 지금은 비록 강하다고 해도 분명 약히질 것이며 아무리 번성하고 있다 해도 반드시 쇠약해질 것이며, 흥하고 있다고 해도 마침내 망할 것이다. 살아 있다 해도 필시 죽게 될 터이니..........

--- p.3

리뷰 총점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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