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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추천사 말과의 인연 이상한 오두막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무과 준비 어렵게 통과한 무관 목축인이 되다 넓혀지는 목장 헌마 시작 탐관오리의 말 착취 벼슬길에 오르다 고향으로 돌아오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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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일의 고향인 의귀리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바로 위아래 마을이라 초등학생 때 김만일이 말을 기르던 의귀 오름으로 소풍 가기도 했어요. 그럼, 가까운 거리에 사니 김만일 이야기를 입을 통해서 들었냐고요? 아니요. 그런 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른이 되어서 동화를 쓰면서야 알게 되었어요. 음식을 만들려면 재료를 준비하듯이 글을 쓰려면 소재를 준비해야 하거든요. 소재를 찾던 중 말로 나라를 구한 헌마공신 김만일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역사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기억에서 잊히기 마련이지요. 헌마공신이라는 칭호까지 얻었음에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 자라나는 아이들도 접할 수 있도록 동화로 써서 널리 알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말의 생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보니 몇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품고 있는 생각이 글이 되어 밖으로 내보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말과 관련한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김만일과 관련된 자료도 평전을 비롯해서 앞서 나와 있는 책들의 도움을 받았고요. 마침, 올해는 붉은 말의 해이기도 하지요. 말의 해에 말과 함께 평생을 보내고 헌마공신이라는 칭호까지 얻은 분의 이야기로 책을 내게 되어 기쁘네요.”
---「작가의 말」중에서 “만일 아버지는 이때 보았던 치마돌격대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 만일이도 돌격대처럼 용감한 군인이 되게 해야지.’ 만일 아버지는 을묘왜변 전투에 참가하기 전까지는 김인찬 장군의 후예로서 가문의 영광을 위해 군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을묘왜변을 겪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만일이 훌륭한 무관이 되기 위해서는 말 타는 연습부터 시켜 주려는 것이었다.” ---「말과의 인연」중에서 “만야를 잃어버려서 찾으러 다닐 때 왔던 곳이라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길은 점점 익숙했다. 오두막이 있었던 곳까지 왔을 때였다.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검은색 말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말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어서 만일을 보지 못했다. 만야?” ---「목축인이 되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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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은 남의 말을 돌보는 테우리가 아니고 넓은 목장 주인이 되고 싶었다.
만일이 열여섯 살이 되는 설날 저녁이었다. "무과 시험 준비 때문에 밭까지 팔아서 말을 사겠다고요?" 만일은 아버지의 말에 놀랐다. 만일 아버지가 사 온 말은 온몸이 검은색인데 이마에서 코까지 흰 줄이 그어지고 다리 아랫부분이 흰색이었다. 만일 눈에는 재동 아버지가 일하는 9소장에 구경 갔을 때 가라말이라고 했던 말과 닮았을 뿐 뭐가 좋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야(말의 이름)는 만일을 태우고 앞으로 걸어갔다. 만일은 아픈 엉덩이보다 잃어버린 만야가 더 걱정이 되었다. 말을 찾으러 다닌 지 한 달이 지났다. 잃어버린 만야를 봤다는 문시봉이 만일 부자를 안으로 들였다. 만일은 목장에 찾아가는 것보다 옥이한데 정신을 온통 뺏고 있었다. 옥이는 말 위에서 만일의 단단한 가슴이 자신의 등에 닿았을 때의 여운이 목장에 도착해서도 남아 있었다. 비록 만야를 찾지 못했지만, 만일 아버지와 만일은 옥이가 빌려준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만일은 기마술에서는 반년이 지나도록 기초를 벗어나지 못했다. 만일이 옥이네 목장에 일을 도우러 다닌 지도 일 년이 다 되었다. 만일은 또다시 옥이네 목장에 오게 되었다. 만일은 목장 주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시봉 어르신과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훌륭한 무관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상한 대로 만일은 처음 도전한 무과 시험에서는 검술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탈락했다. 만일은 두 번째 도전해서 초시에 합격했다. 만일이 증광시 때 초시에 합격하고 나서 2년 후에 3년마다 치러지는 식년시 때 복시에 도전했다. 그때 만일이 나이 23세였다. 만일은 이듬해인 스물네 살이 되는 해에 옥이와 결혼했다. 혼인한 다음 해에 첫아들을 낳고 삼 년 뒤에 둘째 아들을 낳을 때까지도 복시에 합격하지 못하다가 세 번째 도전했을 때 복시를 통과했다. 다행히 임금님 앞에서 치러지는 진시를 한 번에 통과되었다. 이때 만일이 나이 삼십이 세였다. 만일은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 말 목장 주인이 되려고 무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만야를 잃어버렸을 때 만야는 세 살, 만일은 열여섯 살이었다. 숲 속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검은색 말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앞발과 뒷발이 동시에 땅에 닿았다고? 어! 제마가 틀림없어." 재동이 뭐가 안다는 듯이 말했다. 만일은 만야를 데려오지는 못해도 수태한 암말을 잘 키워 좋은 종자의 말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야는 만일이 끌고 내려오는 암말 뒤를 따라왔다. 만야를 빼닮은 수망아지 돌격이 태어난 이듬해 봄부터 초여름 사이에 장인어른네 목장에서 온 암말들이 앞다투어 새끼를 낳아 배로 불어났다. 만야가 돌격이 세 살이 되던 해 춘분날 아침에 생을 다했다. 만일은 악조건 속에서도 장점을 찾아내는 안목도 있었다. 만일은 자기의 생각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도 있었다. 만일이 말을 키우기 시작한 지 8년째 되는 해인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율곡이 십만 양병설을 건의했지만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지 십 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한 마리의 말도 귀한 시기에 백여 마리의 말을 바치자 선조 임금은 기뻐하며 포상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경록 목사가 지켜준 덕분에 만일네 목장에는 임진왜란이 끝나서도 우수한 씨수말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경록 목사가 죽고 난 후 새로 부임해 온 목사들은 만일네 목장 말에 눈독을 들였다. 진상마는 어쩔 수 없는 나라의 사정이기도 했지만, 말 착취는 개인에 따라 크게 달랐다. 유독 성윤문 목사는 착취가 심했다. 번창은 하늘로 올라간 만야의 손자이며 돌격의 아들이다. 망아지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만일은 씨수말로 키우려고 특별히 아꼈다. 만일은 문득 흠이 있는 말로 진상마에서 제외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은 남아 있는 말 천 마리 중에서 절반인 오백 필을 추려 나라에 바쳐서 탐관오리의 실상을 고발하기로 했다. 탐관오리한테 전부 뺏기느니 이 방법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대는 말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한 공이 참으로 크다. 내 어찌 그 공을 저버리겠소.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중추부의 지중추부사에 임명하겠노라.” 광해임금은 김만일에게 정2품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지중추부사(중추부의 지사)의 자리에 겸직하여 임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헌마공신’이라는 칭호까지 내려주었다. 만일은 71세의 나이에 벼슬길에 오르게 되자. 목장 일은 아들들이 맡았다. 상주 아버지는 고려 말에 목호(고려 시대 탐라목장에서 말을 기르는 몽고인을 이르던 말)로 들어왔다가 제주에 눌러앉아 살게 된 조상의 8대손이다. 상주 아버지 재동은 만일이 목장을 시작할 때부터 고정 일꾼으로 사십 년 가까이 만일네 목장에서 일했다. 만일이 고향에 내려온 지 2년이 되었을 때였다. 광해임금이 인조의 무력 정변으로 쫓겨나 광해임금이 아닌 광해군으로 강등되었다. 말 때문에 제일 골머리를 않았던 비변사는 김만일이 내놓은 말로 여진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었던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비변사에서는 임금에게 김만일의 품계를 높여 줄 것을 청원했다. 인조임금은 숭정대부 벼슬을 내렸다. 숭정대부는 정1품 바로 아래인 종1품으로 고위 관료 계급이었다. 이때 만일의 나이는 팔순이었다. 관직을 받기는 했지만, 명예직으로 고향에서 지냈다. 만일은 팔순이 넘기고서는 목장 일에서 손을 뗐다. 만일이 목장을 거쳐 간 숱한 말 중에 유독 생각나는 말은 만야와 만야의 아들 돌격과 돌격의 아들 번창이었다. 탐관오리들이 종마를 뺏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눈에 상처를 내야 했던 번창이와 두 마리의 종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월의 끝자락, 따사로운 어느 날 만일은 죽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식구들을 불러 앉혔다.“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 이 말을 유언으로 인조 10년(1632년) 10월 27일 팔십삼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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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땅에 깃든 김만일의 이야기
『조선왕조실록』 "나라 안의 좋은 말은 모두 김만일이 기르는 것" 헌마공신은 임진왜란 등 극난 극복을 위해 자신이 기른 말 수천 필을 바쳐 공을 세운 공로로 김만일에게 나라에서 내린 칭호였다. 헌마공신은 제주 사람 김만일이 유일하다. 김만일은 광해군과 인조 시대에 걸쳐 말을 헌납하여 종1품 승정대부 벼슬을 얻었다. 헌마공신은 공신 중에서도 매우 명예로운 칭호로 꼽힌다. 김만일은 말 키우기에 좋은 제주의 중산간 마을인 의귀리에서 태어났다. 어렵게 무과에 합격하고서도 군인의 길을 접고 고향인 의귀리로 돌아와서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말 기르는 일에 전념했다. 조선 시대에 말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전투력과 기동력을 좌우하는 핵심 군사자원이었다. 장수들이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며 지휘하고, 식량이나 무기, 화살 등을 실어 나르는 데도 말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전쟁 시에는 더욱 말이 필요했다. 김만일은 전쟁으로 나라가 어려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말을 바쳤다. 그것도 잘 훈련된 준마였다. 준마는 좋은 종마에서 생산된 말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훈련을 해야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라 안의 좋은 말은 모두 김만일이 기르는 것이라는 소문도 있을 정도로 그는 말 기르는 데 특출했다. 김만일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종마의 맥이 끊어질 정도로 착취가 심했을 때였다. 어떻게든 종마는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종마를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말에 흠집을 내어서 진상마로 차출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흠집이 있으면 진상마로 적합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