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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 민족 문학의 결여, 리얼리즘의 결여 이국에서 얻은 '마음가짐' 진정할 수 없는 시대, 소설의 진정성 업둥이들의 과잉/과소 낙원 소설의 제국주의, 혹은 '미친, 새로운' 소설들에 대한 사례 보고 제2부 우리 시대의 여성 작가들 변장한 유토피아 ― 강영숙,『날마다 축제』 환상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 김형경,『성에』 Vagina Dentata:씹어 먹는 자궁 ―천운영,『바늘』 냉정과 열정 사이 ― 은희경론 질주정 사회, 거리, 군중 ― 정미경,『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불 위의 깊은 물 ― 권지예,『꽃게 무덤』 실연되는 통속과 권태, 혹은 행위예술이 되어버린 소설 ― 김연경,『내 아내의 모든 것』 '팜므 파탈' 들의 가족 로망스 제3부 반파우스트 남자가 사랑에 빠졌을 때 ― 백가흠,『귀뚜라미가 온다』 한국형 마콘도들에 관한 몇 가지 단상 림보에서 교양소설을 쓰다―민경현,『이카로스의 마지막 말』 '집'과 근대 1 ― 박완서,『그 남자네 집』/공지영, 『별들의 들판』 쇠락하는 아버지, 건설의 역군 ― '집'과 근대 2 파르마코스의 추방 ― 최인호,『지구인』 2004년, 한국 소설의 성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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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동물로 변장해 있다”.
『한 줌의 도덕Minima Moralia』에서 아도르노가 한 말이다. 그가 보기에 동물은 창살 안에 갇힌 유토피아다. 동물은 “단연코 교환될 수 없는” 것들이 아직 존재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그 이유로 유토피아에 대한 은유가 된다. 동물은 계몽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어떤 상태, 말하자면 말 그대로의 ‘자연 자체’를 ‘여전히’ 지시한다. 그러나 동물은 또한 ‘가까스로’ 그런 상태를 지시하는데, 이유인즉 그것이 동물원의 창살 안에 갇혀 구경거리로 전락한 채로만, 말하자면 변장한 채로만 존재하는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변장! 이 말은 유토피아에 가해진 계몽의 억압, 모든 것을 등가교환의 법칙 안에 포섭해버리는 체계의 횡포를 지시하는 말에 틀림없다. 아도르노가 살던 시기 이후로 유토피아는 변장하지 않고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체계는 유토피아마저도 팔아 치울 것인바, 그렇다면 변장은 유토피아의 곤궁한 처지를 지시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유토피아가 자본주의의 등가교환 법칙을 피해 달아나는 한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동물만이 변장한 유토피아일까? 창살에 갇힌 동물들의 처지는 정확하게 문학이 이즈음(특히 90년대 이후!) 처한 처지와 일치한다. 문학 또한 변장한 유토피아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창살 안에 갇힌, 그러나 갇혀서도 여전히 자본주의와는 상관없는 어떤 상태를 지시하고자 온갖 애를 다 쓰는 유토피아, 그것이 내겐 문학이다. 비관을 경계하고 낙관적 전망을 즐기는 독자들에게는 안된 말이지만, 이 창살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 pp.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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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이제까지 계발시켜온 온갖 형상화의 방법?기법”이 모두 리얼리즘 작품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면, 도대체 리얼리즘과 리얼리즘 아닌 것(예컨대 모더니즘)을 구분할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기법이 아닌 내용에? 그러나 “묘사된 대상과 실제 대상과의 일치”(설사 그것이 “직접적이고도 완전한 일치”는 아니라 할지라도), 즉‘반영론’을 폐기하고 얻어진 ‘리얼리즘적 내용’을 상정할 수 있는가? “당파성이나 총체성 같은”(따라서 총체성 구현에 필수적인‘전형’개념 역시), “종래 리얼리즘론의 핵심적 범주에 대한 폐기와 유보를 통해서 얻어진” ‘내용’ 을 굳이 ‘리얼리즘적’ 이라고 불러야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이 리얼리즘적이란 말은 모든 것이 리얼리즘적이지 않다는 말의 동의어에 불과할 것이다.
문제는 좀 더 발본적으로 제기되어야만 한다. 관성적 되풀이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리얼리즘 갱신 선언들(회통론이 되었건, 흡수통합론이 되었건, 자기갱신론이 되었건)은 전혀 종합 불가능한 두 개의 패러다임을 무모하게 접합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리얼리즘과 90년대 이후의 인식론적인 변화는 애초부터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주관에 대한 객관의 우위’ 에 바탕한 리얼리즘과, ‘객관의 주관적 경험’에 바탕한 모더니즘은 애초에 요철과 같아서, 서로에게 없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정의해야 하는 화해 불가능한 두 인식론의 산물은 아닌가? 그들이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문학의 기획에는 어쩌면 리얼리즘의 포기 또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어찌 되었든, 오로지 “폐기와 유보”를 통해서만 가까스로 유지되는 범주는 위태롭고 안타깝다. --- pp.1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