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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잊은 당신에게
김기홍 제2시집 여는 글 _ 꿈을 잊은 당신에게 / 4 격려사 _ 존재의 집으로서의 시 세계 / 6 평설 _ 꿈을 잊은 시대를 건너는 시의 윤리 / 8 제1부 : 봄비로 오신 님 기다리는 봄 / 32 봄비로 오신 님 / 34 개화開花 / 35 고향의 봄 / 36 소생과 희망의 사월 / 37 꽃잎에 어린 얼굴 / 38 영춘迎春 / 40 춘화春花 / 42 봄과 소년 / 43 거리의 침묵 / 44 화단, 화분 텃밭 / 46 또 오는 4월에 / 48 60년 전, 봄이 오는 길 / 50 제2부 : 노을이 질 때면 골목길 설화 / 52 소나기 / 54 흰 구름 먹구름 / 56 일상, 무료한 날 / 58 노서老暑 유감有感 / 59 귀로歸路 / 60 노을이 질 때면 / 61 노욕老慾 유감有感 / 62 돌담 / 63 가로등의 마음 / 64 조약돌 / 66 제3부 : 늦가을의 환상 가을 연가 / 68 가을하늘과 내 마음 / 70 가로街路에서 / 71 늦가을의 환상 / 72 내 마음을 / 73 고목枯木 된 과목果木 / 74 낙엽 속의 환상 / 75 외로움 / 76 오솔길 / 77 노을에 걸린 그녀의 환상 / 78 산보散步 / 80 만추 단풍의 비련 / 81 아버지의 추석 성묘 / 82 마지막 잎새 / 84 제4부 : 연민에 침묵하는 나목 겨울나무 / 86 연민에 침묵하는 나목裸木 / 87 눈이 쌓이네 / 88 눈 내리는 외로운 밤 / 89 첫눈 오는 날 / 90 어느 한가한 겨울 오후 / 91 꿈꾸는 겨울나무 / 92 멀고 먼 인생길 / 94 선인장 / 96 회상回想 / 97 화단 정리 후 / 98 묘지 / 99 노숙인露宿人 / 100 |
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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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사〉
존재의 집으로서의 시 세계 서촌 김원(시인, 문학평론가) W. 워즈워드가 “표현의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했듯, 인류는 원시 시대부터 동굴의 벽화와 암각화를 통해 무엇인가를 그리고 새기며 표현 욕구를 실현해 왔다. 그 과정에서 그림 기호나 글자를 남기기도 했으며,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나무껍질이나 가죽 위에 동물의 뼈로 뭔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행위는 생존의 표현을 넘어,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 근원적 시도의 일환이었다. 제천의식에서 제사와 춤, 노래는 일종의 종합 예술이었으며 그 속에서 불리던 노랫말을 시의 기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기홍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잊힌 꿈을 당신에게」를 읽으며 필자(筆者)는 원초적 기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 시집은 김 시인이 60여 년 전부터 써왔던 시를 모아 시집으로 묶는 것으로 각 시에는 창작한 연월이 기재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인이 얼마나 오랜 세월 시를 사랑하며, 시인으로 살고자 한 열망을 품어왔는지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시를 쓰고자 했으나 생계와 현실 속에서 오랜 세월 산업역군으로 살아야 했던 한 남성이 은퇴 후 그간 써놓은 시를 정리하여 두 번째 시의 집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사실은 깊은 울림을 준다. 유협劉勰은 문심조룡」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저서를 남기는 일”이라고 했다. 물질적 축적보다 오랜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시를 통해 세계와 자신을 관조해 왔다. 그가 구축한 시 세계는 상위 몇 퍼센트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기쁨, 즉 시적 감성과 통찰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삶의 긴 여정 속에서도 시를 놓지 않고 시와 더불어 살아온 김기홍 시인에게 뜨거운 찬사와 겨려의 박수를 보내며 글을 맺는다. 〈평설〉 꿈을 잊은 시대를 건너는 시의 윤리 (김기홍 시집 『꿈을 잊은 당신에게) - 은설 강소이(시인, 교수, 문학평론가) Ⅰ. 머리말 - 꿈을 잃은 시대, 조용한 질문의 시작 김기홍 시인은 2024년에 첫 시집 『잊힌 꿈을 찾아서』를 상재上梓한 바 있다. 보들레르와 랭보와 같이 서정적이고 철학적인 시편들이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시집의 평설을 필자(筆者)가 썼던 인연이 있어 두 번째 시집의 평설을 또 맡게 되었다. 김기홍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꿈을 잊은 당신에게』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조용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이 시집은 거창한 선언이나 격렬한 고발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일상의 풍경과 개인의 체험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잃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표제에 담긴 ‘꿈’은 개인적 희망을 넘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윤리적·정신적 기반을 의미한다. 꿈은 환상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윤리다. 상실의 시대에 쓰인 회복의 기록인 것이다. 이 시집에서 꿈은 더 이상 미래를 향한 낙관이 아니라, 잊히고 희미해진 기억에 가깝다. 시인은 그 흔적을 더듬으며 상실 이후의 삶을 성찰한다. 따라서 이 시집은 꿈을 잃은 시대를 향한 조용한 성찰이며, 동시에 그 꿈을 다시 불러내려는 시적 윤리의 기록이다. 김기홍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꿈을 잊은 당신에게』는 작품의 성격을 크게 6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상실과 황폐의 도시 감각 2. 자연 · 고향 · 원형적 기억 : 뿌리의 시학 3. 시간 · 기다림·존재의 윤리 4. 역사 · 시대의식과 윤리성 : 증언의 시학 5. 삶의 노동성과 현실 인식 6. 자연, 기억, 가족 서사의 정서적 기반 그 면면을 살펴보도록 한다. Ⅱ. 시편 들여다보기 1. 상실과 황폐의 도시 감각 시대 인식과 도시 비판에 해당하는 시는 〈죽어버린 도시〉와 〈시장 골목을 거닐며〉를 우수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그중에 〈죽어버린 도시〉를 주로 살펴보기로 한다. 〈죽어버린 도시〉의 첫 구절, “살기 위해 죽음을 향하는 길을 걷는가 / 죽기 위해 생존을 향하는 길을 걷는가”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인의 삶은 목적을 상실한 채 생존과 소멸 사이를 표류한다. 시인은 이 역설적 질문을 통해 독자를 사유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두 번째 시집이라는 위치 또한 중요하다. 첫 시집이 세계에 대한 발견과 자기 확인의 단계였다면, 이 시집은 성찰과 책임의 단계에 해당한다. 김기홍 시인은 이제 개인적 감상을 넘어 시대와 사회, 존재의 윤리까지 시선의 범위를 확장한다. 〈죽어버린 도시〉는 붕괴된 문명, 현대 문명의 황폐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도시는 문명의 성취 공간이 아니라, 욕망과 소멸이 순환하는 폐허의 현장이다. 살기 위해 죽음을 향하는 길을 걷는가? 죽기 위해 생존을 향하는 길을 걷는가? 오늘도 인간들은 파란 하늘도 보이지 않는 고층 건물이 들어선 좁다란 거리에서 자연을 굽거나 삶아 허기를 채운다 모든 것이 그들의 것 욕망이 이성을 희롱하는 거리 여기저기 유탈된 해골 부스러기, 욕구가 쏟아버린 지독한 향수가 썩어 잉태한 구더기 속에서 사람들의 흥망성쇠가 분해된다. 구더기가 지배하는 거리 선한 자가 지나는 길에는 흙이 보이는데 악한 자가 지나는 길에는 구더기만 보이고 욕망이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거리는 처절하게 녹아내려 민초의 구두 뒤축을 붙들고 늘어진다. 어둠이 스멀스멀 내리는 비밀스런 밤거리는 환희와 환락이 출근하는 거리 어둠은 곧 휘황찬란한 욕망에 묻혀버린다 침묵이 내려앉은 적요한 서재에는 그 언젠가 천하를 호령하던 젊은 노장이 날 선 붓을 들고 세상을 첨삭하고 파란 하늘이 무서워 밤마다 지하실 화려한 아방궁에서 울어대던 앰프도 소리도 소인배들의 허장성세도 멈춘 채 도시의 무수한 불빛도 사랑의 유희도 가버린 밤거리, 인적 없는 거리에는 광고탑 네온사인과 쇼윈도 불빛만이 살기 위해 어두운 밤을 지킨다. - 〈죽어버린 도시〉 全文 “파란 하늘도 보이지 않는/ 고층 건물이 들어선 좁다란 거리”는 자연이 차단된 폐쇄적 공간을 형상화한다. 인간은 인공 구조물 속에 갇혀 자연을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자연을 굽거나 삶아 허기를 채운다”라는 표현은 문명의 폭력성을 압축한다. 욕망은 이 시의 중심 어휘이다. “욕망이 이성을 희롱하는 거리”, “욕망이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거리”는 윤리와 이성이 무너진 도시 구조를 드러낸다. 욕망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힘으로 기능한다. 〈죽어버린 도시〉에서 도시는 “구더기가 지배하는 거리”로 형상화된다. 이 시집에서 도시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것은 욕망과 폭력, 소외와 침묵이 중첩된 구조적 공간이 된다. 이것은 자본과 소비 논리에 잠식된 현대 문명의 부패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시인은 화려한 고층 빌딩 이면에 잠복한 생명의 소멸 구조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특히 ‘구더기’의 이미지는 문명의 내부 부패를 상징한다. “구더기가 지배하는 거리”는 이미 죽음이 진행 중인 세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 속에서도 윤리적 기준을 포기하지 않는다. 선과 악의 대비는 인간의 선택 가능성을 남겨둔다. 밤거리의 묘사는 자본과 소비 문명의 공허한 생존 논리를 드러낸다. 결국, 이 시는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인간성의 위기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매우 비판적이고 무거운 시를 문명 비판적 이미지학으로 그려낸 수작秀作이다. 푸른 꿈을 꾸며 현실의 고된 길로 나왔다 러시아워 rush hour가 아직 한참 남은 시간의 거리 오가는 행인이 몇 보일 뿐, 한산하기만 하다 상가 골목 이른 새벽부터 법석거리던 사람들처럼 아직 여기저기에서 분주히 서성거리고 있다 그들의 일과는 계속되고 싸구려 할인 판매장은 난장판을 이루고 하늘이 멀리 보이는 고층 건물에 둘러싸인 좁은 거리엔 자동차가 줄지어 구른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흩어진 정신을 모아 나의 꿈길을 걸어간다 (1965.12.22.) - 〈시장 골목을 거닐며〉 全文 이 시는 거대한 도시 비판 대신, 미시적 일상의 장면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포착한다. 러시아워 이전의 한산한 거리, 싸구려 할인 판매장, 분주한 상가 골목은 자본주의적 일상의 풍경이다. 위의 시 〈시장 골목을 걸으며〉에서도 “고층 건물로 둘러싸인/ 좁은 거리엔 자동차가 줄지어 구른다”라고 했다. “난장판을 이룬 할인 판매장”, “고층 건물에 둘러싸인/ 좁은 거리엔 자동차가 줄지어 구른다”와 “흩어진 정신을 모아/ 나의 꿈길을 걸어간다”라는 구절에서도 시인은 “꿈길”을 걸어간다. 꿈길은 현실과 단절된 몽상이 아니라, 현실을 통과하며 지켜내야 할 내면의 방향성이다. 김기홍 시인 시는 일상과 이상(理想) 사이의 균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균열 속에서 주체의 윤리를 모색한다. 시장 골목과 고층 건물 사이, 법석거리는 사람들, 줄지은 자동차 속에서 시인의 꿈은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차지하자는 꿈을 꾸지 않는다. 시인의 꿈길은 ‘좋은 시’를 써서 세상에 남기는 일 - 선한 영향력으로 사람들 마음에 빛이 될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시인의 아름다운 꿈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2. 자연·고향·원형적 기억 : 뿌리의 시학 도시의 황폐함과 대비되는 지점에서, 김기홍 시인은 자연을 존재의 근원으로 호출한다. 〈노을이 질 때면〉, 〈조약돌〉, 〈짝 바위 골 소나무〉는 이러한 자연 인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짝바위산 언덕마루 흙에 덮인 벼랑에 뿌리 내린 등 굽은 노송 한 그루 절리에서 떨어져 벼랑 아래 길게 누운 숫바위와 그 옆 거송을 향해 비스듬히 바라보고 서있다 갈라져 깨어진 바위틈에 깊게 뿌리 내리고 덮인 흙을 자양분 삼아 뻗는 뿌리, 바위를 감싸고 얼기설기 인연처럼 얽혀있다 봄에는 꽃바람이 지나가며 유혹하고 뜨거운 여름 햇볕이 바위를 달구며 바위를 깰 듯한 비바람 뇌성벽력에 놀라고 모진 눈보라 삭풍이 바위를 얼리는 추위에도 뿌리 깊은 소나무 버티고 서있다 올곧게 크진 못했으나 고난과 질곡의 세월을 묵묵히 이겨낸 등 굽어 기울어진 자태는 인고의 세월을 겪은 선비의 표상인 듯하다 부디 건재하여 짝바위, 벼랑 아래 거송과 천 년 해로했으면 - 〈짝바위골 소나무〉 全文 이 시의 소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인내와 생존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이상화된 존재가 아니다. “고난과 질곡의 세월을 묵묵히 이겨내/ 등 굽어 기울어진 자태”에서 소나무는 곧 인간과 삶의 은유이며, 특히 선비의 인내의 표상으로 확장된다. 자연은 여기서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등 굽어 기울어진 노송”은 상처 입은 생명의 형상이다. 절벽과 바위틈이라는 열악한 환경은 삶의 조건을 상징한다. ‘뿌리’는 이 작품의 핵심 이미지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지탱하는 뿌리는, 존재의 내적 중심이자 윤리적 기반이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소나무는 묵묵히 버틴다. 여기에는 저항보다는 인내의 미학이 자리한다. 후반부에서 소나무는 “인고의 세월을 겪은 선비”로 전환된다. 자연과 인간의 동일시는 개인의 삶을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천 년 해로”라는 소망은 관계와 공동체의 윤리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김기홍 시인의 세계에서 ‘지속의 윤리’를 대표한다. 깨진 바위, 부서진 돌, 모난 돌맹이 삼, 사, 오, 육, 팔각형의 돌 서로 부딪고 구르면 둥글둥글한 돌이 된다. 고향도 부모도 모두 떠나온 타향 형제는 많아 여기 조약돌 형제들 숨바꼭질한다. 철썩 철썩 차르르 착, 사락사락 깨진 바위 부스러기가 갈리고 갈려 둥근 조약돌이 되기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났을까! 흐르는 물에 씻겨 부딪히며 굴러 내려온 조약돌 부딪히고, 깨지고, 부스러지고, 갈리며 아직도 갈 길은 멀다. - 〈조약돌〉 -몽돌해변에서 全文 〈조약돌〉은 더욱 분명한 형성의 은유를 제시한다. “부딪히고, 깨지고, 갈리며” 조약돌은 고향을 떠난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 김기홍 시인에게 삶은 원형적 완성으로 향하는 과정이 아니라, 끝없는 마찰 속에서 둥글어지는 고통의 역사인 것이다. 3. 시간·기다림·존재의 윤리 - 기다림의 미학 김기홍 시인의 정서 축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행복이다〉, 〈가로등의 마음〉은 시간과 기다림을 존재의 방식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특히, 〈가로등의 마음〉은 이 시에서 가로등은 밤을 밝히는 사물인 동시에, 고독한 존재의 은유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 타인을 위해 자신을 소모하는 윤리적 주체로 그려지고 있다. “영혼을 불태워 밝히는 마음”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가로등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소모하는 존재이며, 침묵 속에서 견디는 윤리적 주체이다. 노오란 별빛, 신비에 쌓인 달빛보다도 더욱 밝게 흐르는 대기의 호흡 속에 감춰진 하늘 그 하늘을 밝히는 마음 영원한 세월의 기다림 기다림 속에 잊힌 사연 슬픈 기억을 앗아간 영혼 영혼을 불태워 밝히는 마음 갈 길은 너무나 멀기에 달무리가 선 어느 날 초록 별빛보다도 더 애타게 더 사무치도록 흐느끼는 기다림 많고 많은 못 다한 대화를 엿들으며 공허가 밴 가슴 젖어드는 외로움 그 작은 가슴에 못 박는 영원한 기다림 못 다한 사랑의 대화 그 대화 속엔 하나하나 기다림이 흩어지고 서글픈 꿈들은 영글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데 아직도 기다리는 마음 기다리던 마음이 연속된 가슴 희미한 사색에 잠긴 표정 표정은 말없이 굳어 가는데 여기 암흑의 장막 속에 회기回歸를 갈구하며 철야 비치는 마음, 가로등 - 〈가로등의 마음〉 全文 자연의 빛보다 더 밝게 비추는 가로등은 책임과 헌신의 상징이다. ‘기다림’은 이 시의 중심 개념으로,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로 제시된다. 가로등은 수많은 사연과 슬픔을 지켜보지만 개입하지 않는다. 이는 타인의 고통 앞에 선 존재의 한계이자 숙명이다. “공허가 밴 가슴”, “젖어드는 외로움”은 사물과 인간의 경계를 허문다. ‘회귀回歸’라는 표현은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존재론적 욕망을 드러낸다. 이 시에서 기다림은 패배가 아니라 존엄을 지키는 방식이다. 〈기다림은 행복이다〉는 이러한 태도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인연을 기다리는 시간은 공허가 아니라, 의미 생성의 과정으로 재해석 된다. 김기홍 시인에게 기다림은 수동성이 아니라 신뢰의 실천으로 보인다. 4. 역사·시대 의식과 윤리성: 증언의 시학 - 증언의 시학 〈거리의 침묵〉, 〈또 오는 4월에〉는 김기홍 시인의 윤리가 역사적 책임의식으로 확장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 시는 집단적 상처와 기억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 시집에서 역사 인식은 개인적 감상에 머물지 않는다. 〈거리의 침묵〉, 〈또 오는 4월에〉는 집단적 상처를 다룬 작품들이다. 〈거리의 침묵〉에서 하늘과 햇빛마저 부서진 공간은 기억의 붕괴를 상징한다. 정치적 이름들이 등장하는 대목은 이 시가 단순한 추모시가 아니라, 냉전 이후의 세계 질서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실이라는 이것마저도 가버렸다. 언제까지 그러려나 타오르는 태양에 가면은 벗겨졌다 솟아오르는 피 끓는 사자들의 성난 파도같이 밀려간 파도는 무너진 바위를 깎아버렸다 산산이 부서진 파도는 태양을 식히고 유성과 같이 나타났다가 가버린 사자들의 이름 없는 묘지에도 봄은 오는데 목이 터져라, 부르짖던 그들의 안식일, 푸른 깃발 아래서 외치던 그들은 가버렸다 세월의 물결은 흐르는데 이름 없는 사자들은 침묵으로 기다려본다 늘 안정된 생활을 하건만 이제는 외치던 사월도 빼앗은 사월도 환락의 어버이가 되었다 넋이여! 푸른 깃발 아래서 끓는 피를 응고시키던 사월이 와도 묵묵히 침묵 속에 기다려야 합니까? - 〈또 오는 4월에〉 全文 이 시에서는 반복되는 역사적 좌절을 ‘사월’이라는 상징으로 응축한다. “침묵 속에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시인의 무력감이 아니라, 기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결단의 표현이다. “진실마저 가버렸다”라는 구절은 구조적 은폐와 망각에 대한 고발이다. ‘사자’의 이미지는 무명의 희생자들을 상징하며, 시인은 이들을 호출함으로써 기억의 윤리를 복원한다. 자연의 순환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봄은 오는데”라는 역설은 시간과 고통의 불일치를 드러낸다. ‘사월’의 반복은 기억의 정치학을 비판한다. 마지막 질문은 독자를 향한 윤리적 호소이다. 이 시는 망각에 저항하는 증언 문학의 성격을 지닌다. 5. 삶의 노동성과 현실 인식 - 생존의 시학 빌딩숲을 돌고 좁은 골목을 지나 배낭을 메고 누군가의 필요를 나른다. 배낭 속 소중한 물품의 무게는 내가 짊어진 삶의 무게다. 긴급서류 뭉치, 정성껏 포장된 물품, 기쁨을 전하는 꽃다발, 꽃바구니, 화분까지 보내고 기다리는 고객을 향한 마음에 여름 한낮 쨍한 햇볕에 그림자 지고 겨울 칼바람이 손끝을 마비시키고 때론 쏟아지는 소나기에 온몸이 젖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오르며 산동네 골목에서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한다. 물품을 건네면 기뻐하며 “고맙다” 말하고 땀 흘리며 계단을 올라 “수고했다” 한마디에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지고 때로는 거친 말 한마디, 문 앞에 버려지는 꽃다발 앞에 투명인간이 된 듯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걷는 다는 일이 이토록 소중하구나 바쁜 사람들 틈에서 나만의 속도로 걸으며 도시의 풍경과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땀으로 얼룩진 하루의 끝, 남는 것은 최저임금 반 남짓한 배송비 일당, 시린 어깨, 욱신거리는 발, 삐꺽거리는 무릎, 그리고 낯선 이의 삶을 엿본 희미한 기억 나는 오늘도 걷는다. 빠르게 가는 세상 속에서 보폭을 조절하여 나만의 길을 만든다. 묵묵히 내일의 삶과 건강을 위해 - 〈도보 배송원〉 全文 「도보 배송원」은 이 시집에서 가장 현실 밀착적인 작품이다. 배낭의 무게는 곧 삶의 무게이며, 노동은 생존과 존엄의 경계에서 수행된다. 특히 “빠르게 가는 세상 속에서/ 보폭을 조절하여 나만의 길을 만든다”라는 표현을 보면, 노동으로 자기 윤리를 지켜내는 방식으로 승화된다. 김기홍 시인의 현실 인식은 냉소가 아니라, 성찰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서 시인의 시선이 구체적 노동 현장으로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배낭 속 물품은 곧 삶의 무게이다. 이 시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존엄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기후와 지형의 묘사는 육체적 고통을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동시에 “고맙다”, “수고했다”라는 말 한마디는 감정 노동의 의미를 보여준다. “나만의 속도로 걷는다”는 표현은 속도 중심 사회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다. 최저임금의 언급은 사회적 현실 인식을 강화한다. 그러나 시는 분노보다 존엄을 선택한다. 이 작품은 생존을 윤리적 실천으로 재해석한다. 6. 자연, 기억, 가족 서사의 정서적 기반 〈고향을 떠나던 날〉, 〈60년 전, 봄이 오는 길〉, 〈아버지의 추석 성묘〉에 나타난 가족 서사는 이 시집의 감정적 근간을 형성한다. 어머님과 헤어지고 언덕배기를 돌아 뒤돌아보니 멀리 언덕에 어머님이 서서 바라보고 계셨다 한참을 걷다가 다시 눈물을 훔치며 고향산천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잠시 잠시 깊은 시름에 잠겼다 ‘한번 먹은 마음, 꼭 그렇게 해야지’ 다시 한 번 굳은 다짐을 한다 열차 정거장이 가까워 오자 다시 한 번 고향 하늘을 돌아보니 저무는 하늘가에 붉은 노을이 내 맘처럼 섧게 걸려있다 - 〈고향을 떠나는 날〉 일부 잔설이 물기어린 고향길 고갯마루 넘어설 때 연둣빛 새싹 돋는 논둑, 밭둑에 뒷짐 지고 홀로 서성이는 아버지의 굽은 등이 보인다. 학자금 마련에 시름 깊던 아버지의 무거운 두 어깨 위에 가슴에 품은 청운의 꿈 얼어붙는 듯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노랫소리에 얼었던 꿈조차 서서히 녹아 흐르고 시냇가 언덕 위 새싹들은 밤새 내린 이슬 품고 햇살에 반짝이고 앙상한 가지 끝 꽃봉오리 부풀어 살이 오르고, 흙덩이 녹아 펼쳐진 들판 위에서는 새들이 노래한다. 아, 희망의 봄이여! 아, 아버지의 사랑이여! 아, 나의 꿈이여! 새봄의 노래되어 활짝 피어나리라. - 〈60년 전, 봄이 오늘 길〉 全文 특히 아버지의 형상은 희생과 침묵의 상징으로 반복된다. 이 시들에서 고향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윤리적 원점이다. 김기홍 시인의 시적 주제는 언제나 이 원점을 기준 삼아 세계를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Ⅲ 결론: 꿈을 잃지 않는 시 - 시인의 자리 『꿈을 잊은 당신에게』는 상실의 시대에 쓰인 회복의 기록이다. 이 시집에서 꿈은 환상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윤리적 근간이다. 김기홍 시인의 시는 거창한 이론이나 실험적 기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1. 상실과 황폐의 도시 감각 2. 자연·고향·원형적 기억 : 뿌리의 시학 3. 시간·기다림·존재의 윤리 4. 역사·시대의식과 윤리성 : 증언의 시학 5. 삶의 노동성과 현실 인식 6. 자연, 기억, 가족 서사의 정서적 기반을 통해 조용히 독자의 내면으로 흐른다. 이 시집을 말한다. 비록 도시는 죽어가고, 기억은 퇴색하고, 노동은 고단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기다리고 견디며 다시 꿀꿀 수 있다고. 김기홍 시인의 시도 바로 그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언어의 기록이다. 『꿈을 잊은 당신에게』는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존엄의 기록이다. 도시, 자연, 기다림, 역사, 노동은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킬 것인가. 김기홍 시인 시는 설명보다 장면을, 선동보다 성찰을 선택한다. 그의 시적 태도는 세계 속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존재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 시집에서 꿈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버티고, 비추고, 걷는 태도이다. 소나무처럼, 가로등처럼, 배송원처럼 살아가는 삶이 곧 꿈의 다른 이름이다. 이 시집은 위로이자 성찰이며, 조용한 증언이다. 독자는 이 책을 덮으며 하나의 질문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래 남아, 다시 꿈을 기억하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