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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들뢰즈
유미경 시집 여는 글 / 4 평설 : 내장된 슬픔 치유와 삶의 극복 의지 / 6 제1부 : 붉은 감나무 아래, 그 소녀 달빛의 세레나데 / 28 아담과 이브 / 29 목련 / 30 리더의 시선 / 32 비싼 슬픔 / 34 O. 헨리, 시월의 마지막 / 35 영양제 / 36 낙타는 울지 않는다 / 38 푸른 장막의 파열음 / 39 8월의 숨통 / 40 인생은 / 42 헤어질 무렵, 스물셋 / 43 그리움을 기리다 / 44 시간의 발톱 자국 / 46 제2부 : 치악산 돌꽃이 피는 시간 치악산 들뢰즈 / 48 치악산 몸 마중 / 50 치악산 돌꽃 / 52 앉은뱅이 / 53 그날 그 소녀가 온다 1 / 54 그날 그 소녀가 온다 2 / 58 외가에서 돌아온 날 / 60 풀잎 / 62 습관 / 63 살구뚝 마을 / 64 그 여름, 라벤더 / 65 지문의 타공打孔 / 66 후리지아 / 67 수선화 / 68 눈물의 원조 / 69 해 뜨기 직전 / 70 제3부 : 비상하는 날개 날것의 삶 / 72 비상하는 날개 / 73 내 우주 별 / 74 원주천 강변에 앉아 / 76 원주 풍물시장 / 78 첫눈 / 81 다이어트 / 82 설거지통 / 84 주말 부부 / 85 제사 증후군 / 86 그리움 / 88 매미 / 89 빛이 나를 기억한 이유 / 90 비상하는 눈물 / 91 월급날 1 / 92 월급날 2 / 93 신호등 황색불 앞에서 / 94 채무와 변제, 누가 그의 죄를 사했나 / 96 달빛의 증언 / 98 삶과 상실의 변주 / 100 제4부 : 봄으로 가는 길 새 아침 / 102 들풀의 씨가 되어 / 103 입추立秋 / 104 봄 (코로나 해제) / 105 분수 / 106 내 별 / 108 별 / 109 기다림 / 110 3월 2일 / 112 육십갑자 그녀의 생일에 / 113 하조대 / 114 계룡산 동학사 가는 길 / 116 조기뿐이랴 / 117 곰국 끓는 소리 / 118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20 연꽃이 될 상相인가 / 122 천년 지기 반계리 은행나무 / 124 살아있는 자의 특권 / 126 봄으로 가는 길 / 128 인생, 바람이 잠든 자리에서 / 130 삼겹살 / 132 맞춤법 / 133 그녀의 집으로 / 134 지금, 할 수만 있다면 / 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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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침묵이 깊어질 때 비로소 들리는 소리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소란함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볼 때마다, 저는 단어라는 징검다리를 놓아 제 안의 외딴섬을 건너가곤 했습니다. 그렇게 홀로 밤을 지새우며 건져 올린 언어들을 이제야 세상 밖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올립니다. 시를 쓰는 일은 제게 숨을 쉬는 행위 그 자체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유독 좋아했고 책 읽는 것을 즐겨 하던 저였기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비바람 치는 세상의 풍파 속에서 마음의 뼈대를 곧게 세우고, 서글픈 기억과 상처들을 언어라는 고운 천으로 하나씩 어루만지는 치유의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삶의 고비마다 흩어지는 마음을 붙잡아 준 시들이 있었기에, 저는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세상의 슬픔을 대신 앓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가슴이 시리고, 툭 떨어지는 낙엽 한 장에도 삶의 유한함을 느끼며 채워지지 않는 고독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시집에 담긴 글들은 그 고독의 터널을 지나며 온몸으로 써 내려간 제 영혼의 무늬들입니다. 제 부끄러운 고백이자 치열한 사색의 조각들이 한 줄 읽는 여러분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으로 가닿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고단한 삶의 여정 속에서 잠시 이 시집을 펼쳐 든 이들에게, 제 시가 차가운 손을 녹여줄 작은 온기가 될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더없는 축복이겠습니다. 이 시집이 마침내 세상에 나와 빛을 보기까지, 저의 침묵을 묵묵히 견뎌주고 곁을 지켜준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울러 제 서툰 언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시고 격려해 주신 샘문그룹 문단의 이정록 회장님, 손해일 선생님, 모든 인연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길가에서 발길에 차이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깊은 사색에 잠기는 계절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2026년 8월 20일 智音 시인 유 미 배상 [평설] 내장된 슬픔 치유와 삶의 극복 의지 - 손해일(시인, 문학박사, 국제펜한국본부 35대 이사장) 智音 유미경 시인(이하 유 시인)의 첫 시집 치악산 들뢰즈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시인에게 첫 시집은 설레임과 함께 자신의 역량을 한껏 쏟아 붓는 정성의 결과물이다. 구슬을 꿰듯이 흩어져 있는 개별 시 작품을 모아 안락한 집을 지어주는 일이다. 약력에 의하면 강원도 원주, 치악산 밑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는 유 시인은 중앙일보 여성 백일장 공모전 우수상, 한국일보 공모전 최우수상을 비롯해 샘문뉴스, 샘문학, 한국문학, 문학그룹샘문 신춘문예, 샘문학상, 한용운문학상 한국문학상에 당선되었다. 아울러 행정학 석사, ㈜닥터유 대표, 뉴스넷코리아 발행인, ㈜지에이코리아(케이코리아지사 영업대표) 등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활동을 하는 전문직 커리우먼이다. 그런 연유인지 기본기가 탄탄해서 시적 발상이나 시어 선택, 시를 이끌어가는 저력이 범상치 않다. 머리글에서 유 시인은 어려서부터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유독 좋아했기에 “시를 쓰는 일은 제게 자신에게 숨을 쉬는 행위 그 자체”이다. “이번 시집의 글들은 그 고독의 터널을 지나며 온몸으로 써 내려간 제 영혼의 무늬들”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시를 남다르게 대하는 유 시인의 결기를 느끼게 한다. 76편의 작품을 4부로 나눈 유 시인의 이번 시집의 특징을 필자 나름대로 “내장된 슬픔 치유와 삶의 극복 의지”라 규정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이 시집은 단순한 시작품 모음이나 낭만적인 감정의 유희가 아니다. 유 시인의 슬픔의 근원인 생활 속의 애환들을 적나라하게 표출한 자전적인 작품집이기 때문이다. 그 외 여러 좋은 작품들이 있으나 논의를 생략한다. 1. 표제시 - 치악산 들뢰즈와 낯설게 하기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엉뚱하고 난해한『치악산 들뢰즈라는 시집 제목부터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다. 독자로서는 ‘들뢰즈’가 뭐지? 라는 궁금증부터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난해시의 경우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크가 주창한 소위 ‘낯설게 하기’라는 시의 속성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십여 년째/ 매주 토요일/ 도시의 껍질을 벗고/ 치악산을 오르는 한 남자// 대충 걸친 옷자락, 바람을 입고/ 낡은 카메라는 구름을 따라/ 뱀처럼 유연히 숭숭 숲을 가른다// 간간이 들리는/ 고라니 외침은 오래된 문장보다 깊고/ 치악산 계곡의 음률은/ 그의 논문보다 시원하다고ᆢ.// 평일엔 서울에서 금을 캐고/ 휴일엔 치악산에서 철학자 되기/ 차이와 리좀/ 되기와 탈주/ 들뢰즈와의 외사랑// 산중 옹달샘에서 도시의 땀을 씻으며/ 죽도록 들뢰즈가 되고픈 남자// 그를 본다/ 침묵의 사유 속/ 선진의 절규를 듣는/ 치악산 선객의 눈// 땅에서 왔다, 바람을 입고 다닐 뿐/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존재// 유목민의 끝없는 유랑을/ 들뢰즈의 사유 속에서 끌어내/ 익숙한 ‘나’를 낯선 ‘되기’로 고뇌하는 자// 그는 오늘/ 이 시 속에서/ 또 다른 되기를 한다.// - 「치악산 들뢰즈」 전문 우선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하고 난해한 ‘들뢰즈’라는 단어부터 살펴본다.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작가, 사상가의 이름이다. 그의 철학은 기존 서구 철학의 근간이었던 고정된 틀(나무, 정주, 동일성)에 갇히지 않는다. 끊임없이 연결되고 변화하는 차이와 생성을 중심에 두고,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 나가는 유목민(노마드)의 혁신적인 철학이다. 부연하면 다음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차이와 생성’ 과정에 있다. 둘째, 리좀(Rhizome)개념이다. 보통의 나무처럼 뿌리, 줄기, 잎으로 위로 뻗는 게 아니라, 잔디, 칡넝쿨, 대나무 뿌리처럼 중심도 시작도 없이 얽히고 설켜서 끝없이 뻗어나가는 탈중심적 네트워크 형식이다. 셋째, 노마디즘(유목주의)이다. 정착민처럼 특정 가치관이나 틀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사유로 공간적, 제도적, 탈영 토화를 지향한다. 넷째, 신처럼 초월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평면(현실)에서 동등하게 얽히며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소 난해하지만, 이런 개념을 숙지하고 표제시를 분석해 보면 궁금증이 풀릴 것이다. “이십여 년째/ 매주 토요일/ 도시의 껍질을 벗고/ 치악산을 오르는 한 남자”가 ‘치악산 들뢰즈’의 주인공이다. 그는 들뢰즈 되기를 신봉하며 몸소 실천하는 자유인인데, 아마도 화자의 남편(?)이 아닐까 싶다. “평일엔 서울에서 금을 캐고/ 휴일엔 치악산에서 철학자 되기/ 차이와 리좀/ 되기와 탈주/ 들뢰즈와의 외사랑// 산중 옹달샘에서 도시의 땀을 씻으며/ 죽도록 들뢰즈가 되고픈 남자”이다. 유목민의 끝없는 유랑을/ 들뢰즈의 사유 속에서 끌어내/ 익숙한 ‘나’를 낯선 ‘되기’로 고뇌하는 자”이며, “치악산 선객의 눈”“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존재“이다. 다소 독특한 이 ‘치악산 들뢰즈’를 20년째 지켜보는 아내의 시선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시는 쉽고 상식적인 진술의 차원을 넘어 비유와 상징을 가미해 이미지를 만들다 보면 점점 어려워지는 소위‘낯설게 하기’의 속성을 피할 수 없다. 유 시인의 작품 중 난해 시에 속하는 「낙타는 울지 않는다」를 살펴본다. 독자로서는“도대체 무슨 시가 이리 어려워? 낙타가 운다는 거야, 울지 않는다는 거야?”라며 혼란스러울 것이다. 태양은/ 불에 그을린 북소리처럼/ 사막 위를 두드린다.// 옷은 젖은 채/ 말라붙지 못한 기억을 품고/ 그 기억은 모래알처럼/끝없이 흘러내린다.// 낙타가 운다./ 그 발자국마다/ 묵음의 울음이/ 칠흑 어둠 끝에서/ 사막을 삼키는 파문이 된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위에서/ 낙타는 지루한 침묵을 남긴다.// -「낙타는 울지 않는다」 전문 사막여행을 해본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50~70도를 오르내리는 살인적인 불볕 더위가 “불에 그을린 북소리처럼” 사막을 두드린다. 옷을 흠뻑 적시는 땀은 한 번도 마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비오듯 흘러내린다. “낙타가 운다.” 그러나 그 울음은 밖으로 소리 내지 않은 “묵음默音”이다. 즉, 낙타는 울지만 울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온천지가 광활한 사막뿐이라서 시작도 끝도 없어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위에서” 낙타는 속으론 울지만, 안으로는 삼키는 “지루한 침묵을 남긴다” 2. 내장된 슬픔과 트라우마의 근원 이번 유 시인의 시집 원형질은 가슴 깊이 ‘내장內藏된 슬픔’이라고 본다. 이것은 원초적 내재 된 생채기 즉 심리적, 정신적 마음의 상처이기에 세월이 가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영국의 문필가요 정치가인 호레이스 월폴은 “세상은 느끼는 자에겐 비극이요, 생각하는 자에겐 희극”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유 시인은 이 생채기로 인해 세상은 ‘비극’ 쪽에 경도된 듯하나 글을 쓰면서 스스로 삶을 치유하는 내공을 갖췄다. 유 시인은 머리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비바람 이는 세상의 풍파 속에서 마음의 뼈대를 곧게 세우고, 서글픈 기억과 상처들을 언어라는 고운 천으로 하나씩 어루만지는 치유의 여정”이라고 한다. “시인은 세상의 슬픔을 대신 앓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유 시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서글픈 기억과 상처’의 실체는 무엇일까? 「외가에서 돌아온 날」과 「그날, 그 소녀가 온다 1.2」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몇 줄의 시에 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담겨 있다 외가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물밑에 잠겨 있었던 우리 동네// 뒷동산은 무너져 내렸고/ 사람들은 저마다/ 어느 비명 속으로 흩어졌다.// 어린 날의 나는 그때/ 아무것도 안하고도/ 인생을/ 도둑맞았다.// 고운 한복에 양산을 들던/ 엄마의 하얀 손은 꿈처럼 아련해졌고/ 어디론가 떠밀려 알 수 없는 행방에/ 처절하게 부서진 둥지// 그 밤, 해 떨어지는 어둠이 무서워/ 새벽이면 아빠의 베개를 더듬으며/ 간신히 숨을 쉬던 작은 소녀가 있었다.// 다행히 곁에 둔 큰 집/ 그해의 수해 덕에 식사시간은/ 매번 치열한 수저 육상이었다.// 할머니는 큰집 장손의 입에/ 어떻게든 갈치 한 점 물리려고/ 밥그릇을 들고 쫓아 다녔고/ 사촌 동생은 작은 손으로/ 온 얼굴을 가리며 저항했다.// 한번도 손주를 이기지 못하던 할머니,/ 그 서글픈 편애의 틈바구니에서/ 내게 건네지던 달달한 쑥개 떡 하나// 그 아련한 단맛으로도/ 차마 달래지지 않던 유년의 밤이 있었다.// 외가에서 돌아온 후로/ 내 나이보다 길고 축축했던 어둠,// 소리 내어 우는 법을 잊은 아이/ 그토록 오랜 나날을/ 밤마다 베개가 홀로 울었다.// - 「외가에서 돌아온 날」 전문 어릴 적 혼자만 외가로 놀러 간 후 유 시인이 어느 날 친가로 돌아와 목격한 것은 참혹한 수해 피해 현장이었다. “외가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물밑에 잠겨 있었던 우리 동네// 뒷동산은 무너져 내렸고/ 사람들은 저마다/ 어느 비명 속으로 흩어졌다.// 어린 날의 나는 그때/ 아무것도 안하고도/ 인생을 도둑 맞았다.”그 비통한 기억이 유 시인에게는 “인생을 도둑맞은/ 어린 꼬맹이 소녀”의 근원적 생채기이다. 설상가상인 것은 그 수해의 참상 중에 어디론가 떠내려가 버려 생사불명인 되었던 어머니의 존재이다. 어머니를 찾다 지친 시간과 가정이라는 둥지를 잃은 상실감이 엄청난 비극이다. 그 아빠마저 또 잃을까 봐 아빠의 베개를 밤마다 더듬거리며 전전긍긍하던 어린 소녀, “그 외가에서 돌아온 후로/ 내 나이보다 길고 축축했던 어둠,// 소리 내어 우는 법을 잊은 아이/ 그토록 오랜 나날을/ 밤마다 베개가 홀로 울었다.// 유 시인 유년의 슬픈 아픈 현실들이 오래도록 가슴 깊이 내장內藏된 삶의 깊은 무늬가 되었다. 「그날 그 소녀가 다시 온다, 1, 2」 두 편은 왜 혼자만 외가로 보내졌는지 영문을 모르던 소녀의 ‘분리불안’과 유쾌하지 않은 추억들이 담겨져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인데 사람의 온기는 없었던 외갓집”이다. 그날로 향하는 기차 안/ “아빠, 노래 불러드릴까요?”/ 김밥 한 줄/ 빛바랜 환타 한 병/잘 까지지 않던 찐 계란// 덜컹이는 열차/ 불안한 리듬 속에서/ 동생들을 남겨두고/ 왜 나만 외가로 갔던 걸까// 내 안의 공백을 메우려/ 유난히 재잘재잘 떠들었다// 내린 곳은 감나무 붉은 눈물 맺힌 마당/ 기와 지붕이 하늘을 찌르고 넓은 마당엔 서원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사람이 사는 집인데/ 사람의 온기는 없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외삼촌도// 외삼촌의 차가운 눈빛/ 듣기 싫은 꾸중 뭉치들/ 업어 달라 조르면/ 등 뒤에서 엉덩이를 꼬집었다// 어느 날은/ 배 속에 쥐간 든 척 꾀병을 부렸다// 삼촌의 등에서/ 거친 숨소리가 뱃고동처럼 들리고/ 도착한 곳은/ 달큰한 냄새를 지나칠 수 없는/ 빵 가계였다/‘’삼촌, 쥐가 또 오면 어떻게 하지?/ 땀을 훔치던 삼촌이 툭 대답했다/ “어떡하긴 또 빵 가게 와야지”// 그 투박한 약속이/ 기역 니은 보다 먼저/ 가슴에 새겨졌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삼촌이 업고 달린 것은/ 조카가 아니라/ 자신의 서툰 사랑이었음을// 멀리서 기차 소리와 함께/ 노란 빵 봉투를 든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다시 온다// -「그날 그 소녀가 다시 온다 1」일부 「그날 그 소녀가 다시 온다 1」는 외삼촌의 한글 공부가 너무 싫어서 어느 날은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외삼촌이 병원으로 나를 업고 뛰었지만, 결국은 근처 빵 가게에서 달콤한 빵을 얻어먹었다는 추억담이다. 할아버지가 침묵속으로 들어가신 날/ 할머니는 내 눈을 가리며 말씀하셨다/ “해가 땅에 닿거든 오너라”//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산이 되었다// 엄마에게 가겠다고 도망치던 날// 파출소 창백한 불빛 아래/ 웅크리고 있던 나를 보자/ 할아버지는 나보다 더 서럽게 우셨다.// 막걸리 한 잔으로놀람을 적시고/ 시장통의 모든 것을 사주셨다// “우리 갱이, 실컷 골라라/ 할아버지가 다 사줄게”// 검정 실핀 한 쌈/ 소머리국 고기 한 점/ 그 뜨겁고 투박한 것들이/ 할아버지의 유산이 되었다.// 그 소녀는 이제 다시 간다/ 검정 실핀으로 기억을 단단히 고정하고 할아버지 품속으로// - 「그날 그 소녀가 온다 2」 이 작품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추억담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할머니는 내게 산에 올라가 있다가 ‘해가 땅에 닿거든’ 내려오라고 하셨다. 유 시인은 외삼촌의 과외공부가 너무 싫어서 엄마에게 가겠다고 도망쳤는데. 파출소로 찾아온 할아버지가 울컥하며, 손녀를 장터로 데리고 가 머리핀 한 쌈에다 맛있는 소머리국밥도 사주셨다는 추억담이다. 유 시인은 문학뿐만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금융 관련 사업과 언론 방송기자, 유통물류 제조판매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다음 시를 보면, 사기당한 금전대차와, 압류, 경매 진행, 카드 연체, 신용불량, 고소 취하와 용서 등 현실적인 절절한 사연들이 등장한다. 이 시집이 단순한 시 모음집이 아니라 유 시인의 슬픔과 눈물 아픈 현실의 삶 그대로를 보여주고, 시를 통해 치유하는 드라마 같은 시집임이 자명해진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내일은 됩니다, 이번에는 진짜 됩니다”/ 23,700시간의 세월을 뚫고 나온 허언들이/ 법 앞에 혀를 엎드린다.// 5년여/ 땡전 한 푼 없이/ 선고 기일 이틀 앞/ “염치없습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산 사람이 말하고/ 죽은 자 다름없는 산 송장이 말한다/ 양심과 진심은/ 어디 두고 왔는가// 억, 억, 억—/ 링거 꽂아가며/ 영혼과 사투하던 시간들/ 붉은 혈꽃이/ 하얀 구름 속에서 터져 버렸다// 카드 연체, 체납, 가산세/ 압류, 경매/ 목숨 줄을 칭칭 감은/ 세상의 모든 악재의 쿠데타// 공황장애, 대인기피, 우울증, 불면증/ 닥터의 하얀 휴지가/ 말을 건넨다// 죄책감, 미안함, 자괴감/ 분노와의 질주// 그래도/ 살아 남으라//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없다/ 살아내야 하니라// - 「채무와 변제, 누가 그의 죄를 사했나」 일부 위 작품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쩌다 불운하면 겪을 수 있는 금전대차 관련사기사건과 법 집행 과정에서의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5년여 동안 사기당한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허언의 나날 속에 법정 소송 재판이 진행된다. 핵심은 선고 기일을 이틀 앞두고 고소 취하, 처벌불원서라는 합의를 요구하는 채무자 인간의 민낯과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다름없는 채권자 본인이 오히려 극심한 금전적 압박과 정신적 공황장애, 신용불량, 압류, 경매 진행 등 “세상의 모든 악재의 쿠데타”를 겪게 된다. 어릴 적 어머니를 떠나보낸 수해 현장의 트라우마와 함께, 성인이 되어 막대한 사기 피해를 입고 법정 다툼의 소용돌이를 겪은 당사자로서는 슬픔과 억울함과 울화통의 홍수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유 시인 작품의 주조가 ‘슬픔’인 것이 이해된다. 울음과 슬픔이 두드러진 다음 작품은 인용에 그치고 설명은 생략한다. 슬픔에도 값이 있다./ 푸른 눈물/ 어느 순간에는/ 더 깊게 울린다.// 가장 아픈 고통이/ 재래시장에서 흥정되고/ 아무도/ 그 값을 모른다.// - 「비싼 슬픔」 일부 붉은 태양이 끝내 우는구나./ 심장을 움켜쥐고 터지는 파열음,/ 온 천지가 그 울음에 일렁인다.// 차마 쏟아내지 못했던 슬픔은/ 잔인하도록 절제된 악장이 되어 가장 숨 막히는 종막을 연주하고,// 뚝, 후두둑./ 검은 유리 가림막 너머/ 태양 꽃이 핏방울처럼 흐르는 날.// 저 거만한 태양마저/ 찬란한 꽃비를 토해내는구나.// - 「푸른 장막의 파열음」 일부 낙타가 운다./ 그 발자국마다/ 묵음의 울음이/ 칠흑 어둠 끝에서/ 사막을 삼키는 파문이 된다.// - 「낙타는 울지 않는다」일부 마른 꽃잎처럼/ 웃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엄마 없는 저녁상 앞에서/ 해가 지도록/ 말없이 앉았다.// 뜨거운 눈물이/ 쑥쑥 자라나/ 하얀 눈길 위에/ 그렇게/ 지워져 갔다// - 「그리움」 일부 두 뺨 위/ 햇살 속에서/ 서걱이는/ 짭짤한 맛// 눈물의 여왕/ 진주일까,/ 다이아일까// -「눈물의 원조」일부 녹음 진 푸름 속/ 쓸쓸한 벤치에 앉아/ 혹여 누가 볼까// 꺼억 꺼억/ 심장을 움켜 뜯으며/ 올라치는 것// 살고자 함이/ 이리 비루할 수 있는가// -「계룡산 동학사 가는 길」일부 수직 하강의 저항,/ 젖은 눈썹은/ 깜빡임의 본능을/ 잊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반드시 그래야만/ 그 깊은 눈물도/ 그 깊은 상처도/ 더는 울지 않을 터// 눈물이여, 아픔이여—/ 날아올라라.// - 「비상하는 눈물」 일부 4. 내장된 슬픔 치유와 삶의 극복 의지 머리말처럼 유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세상 풍파 속에서 뼈대를 곧게 세우고, 서글픈 기억과 상처들을 언어로 하나씩 어루만지는 치유의 여정”이다. 즉 슬픔의 치유와 함께 “뼈대를 곧게 세우는”극복 의지가 함께 들어있다. 어릴 적 수해 참사 속에서 어머님의 생사불명과 외가로의 ‘분리불안’ 등 가슴 깊이 내장된 슬픔과, 후일 사기 사건 피해로 촉발된 울화병을 유 시인은 시를 통해 치유하면서 삶의 극복 의지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 세상 전부가 허물어지는 깊은 앓음/ 죽을 만큼 아프다// 죽지도 못할 이 고통이/ 결코 헛될 리 없다는 믿음/ 나는 내게 주문을 건다// 우주는/ 나의 틈을 벼려 크게 쓰고자/ 내가 든 찢겨진 우산에/ 더 크게 상처를 내고/ 내 안의 그릇을 더 깊게 파내시는 중이니// 나는 지금 더 커야 할 뿐/ 성장통을 앓고 있을 뿐이며/ 약효가 스며들 때쯤이면/ 한 뼘 자라/ 그 누군가의 젖은 우산을 받처주겠지// - 「영양제」 일부 죽을 만큼 아픈 이 현실이 “결코 헛될 리 없다는 믿음”으로 자신에게 마법을 건다. 이 고통은 나를 더 크게 쓰고자 하는 하늘의 섭리이며, 영양제처럼 먹고 있는 이 성장통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자위한다. 거울 앞에 선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흔들리고 있다// 눈빛이 흐려지고/ 입꼬리도 무뎌지고/ 팔뚝살을 꼬집어 보면서/ 아/ 날것의 삶이구나// 제발/ 꿈꾸어라/ 꿈꾸건만/ 꿈이 아닌// 그 안에서도/붙들고 놓지 못하는/ 막연한 기대 한 줄// 흔들림 속에서도/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은/ 진짜 나였다// - 「날것의 삶」 일부 위 작품은 거울 앞에 선 자의 신체적·심리적 흔들림을 통해 ‘날것의 삶’이라는 적나라한 현실을 진솔하게 토로하고 있다. 사기당한 후의 막막함 속에서도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나지만, 결국 그 흔들림을 지탱하는 것은 타인이 아닌 ‘진짜 나’자신이라는 강인한 깨달음에 이른다. 벼랑 끝 같은 현실에서도 스스로 붙잡는 자아의 성찰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기회라던 인생의 교차로/ 아슬아슬 선을 넘었나/ 못 먹어도 Go/ 지구는 둥글고/ 다음 교차로는 또 만나겠지// 이 빌어먹을 황색 불에 또 속을지라도/ 또 한 번 달려보는 거다// 이게 우리들의 인생이니까!// - 「신호등 황색 불 앞에서」 일부 적색과 녹색처럼 확신을 주지 않는 ‘빌어먹을 황색 불’이라는 현실의 경계 속에서도, “못 먹어도 Go”를 외치며 다시 한 번 가속 페달을 밟는모습은 우리네 삶의 쌉싸름하면서도 유쾌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둥근 지구처럼 돌고 돌아 다시 찾아올 기회를 믿으며 제 길을 향해 내달리는 생명력이 돋보인다 희망이 절망으로 물드는 순간에도/ 기다림은 다시 몸을 일으켜/ 새로운 계절의 문을 두드린다// 살아갈 가치와 꺼지지 않는 희망/ 단단한 믿음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오롯한 증거//나는/ 기다림에 숨 쉬는/ 또 다른 기다림으로/ 마침내 ‘나’를 만날 그 순간을/ 조용히 기다린다// - 「기다림」 일부 “희망이 절망으로 물드는 순간에도”“살아갈 가치와 꺼지지 않는 희망”이 있기에, 삶의 극복 의지를 다지며, 마침내 나를 만날 또 다른 순간을 조용히 기다린다. 삶 그것이/ 눈물 한 숟가락/ 밥 한 끼// 물에 말아/ 안 넘어가더라도// 김치 한 점 쭉쭉 찢어 올리고/ 목구멍이 울다 지친/ 상처투성이 점막들이/ 슬퍼할지라도/ 이 모든 살아있음의 기적은/ 3월의 크리스마스/ 첫눈 같은 설렘//살아있다는 거/ 견뎌낸다는 거/ 이겨낸다는 거/ 그건 밥 한술의 힘/ 눈물 한 스푼/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없다.//살아있는 모든 자들의 특권/ 자/ 한 숟가락 뜨자/ 봄빛 햇살 뜨락에서// - 「살아있는 자의 특권」 일부 위 작품은 ‘눈물 한 숟가락’과 ‘상처투성이의 점막들’이라는 적나라한 고통 속에서도, 살아있다는 그 자체를 거대한 축복이자 기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눈물과 밥 한술로 대변되는 삶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봄빛 햇살 뜨락에서 슬픔을 털고 다시 한 숟가락 뜨자는 당부는, 가장 낮은 곳의 가장 뜨겁고 희망찬 삶의 찬가이다. 치악산 행구동/ 작은 길 카페/ 이른 봄이 나와 있다// 어쩌면 봄은/ 한겨울 내내 쌀쌀맞게 굴다가/ 이제야 다시 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 「3월 2일」 일부 3월 2일, 치악산 자락의 작은 카페에 마주한 이른 봄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넘어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겨울의 쌀쌀맞은 시련을 견뎌낸 끝에 건네는 그 따뜻한 기척은, 묵묵히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우리의 삶을 닮아 있다.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라는 묵직한 자각을 품고 마주한 봄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지난한 생을 온몸으로 통과해 온 이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이자 눈부신 생명력의 증거이다. 한때/ 애달프게 갈구했던 생의 몸부림과/ 사력을 다했던 뜨거운 집착들도/ 결국/바람이 스쳐 간 궤적을 따라 유연하게 흩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공허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역설은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끝내/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한 갈망처럼,/ 우리는 부재不在의 결핍 속에서/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리고/ 흔적이 사그라지는 그 자리를 종언이 아닌// 새로운 기류가 피어나는 요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바람이 잠시 머물다 떠난/ 그 적막한 자리에서.// 너의 생은 다시 찬란한 기지개를 켜며/ 또 다른/ 당신을 기다립니다.// - 「인생, 바람이 잠든 자리에서」 일부 한때 애달프게 한때 애달프게 갈구했던 생의 몸부림과 뜨거운 집착들은 비로소 모든 것이 비워진 자리에 이르러 역설적인 존재의 빛을 발한다. “우리는 부재不在의 결핍 속에서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리고,” 바람이 머물다 떠난 적막의 공간을 종언이 아닌 새로운 시작의 요람으로 승화시킨다는 이 시는 채움이 아닌 비움, 상실의 적막 속에서 찬란하게 피어나는 생명의 기적을 포착함으로써, 절망을 견뎌낸 끝에 도달하는 깊은 달관과 또 다른 순환을 향한 숭고한 희망의 메시지를 울려 퍼뜨린다. 5. 맺는말 지금까지 유미경 시인의 첫 시집 치악산 들뢰즈의 작품세계를 살펴보았다. 기본기가 탄탄하여 착상과 시상 전개, 비유와 상징을 통한 표현력 또한 매우 우수함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시의 주제가 낭만적인 서정시나 사실적인 역사적 소재보다는 극히 현실적인 소재의 비중이 컸다. 전반적으로 우수한 다른 시도 많았으나 본 원고에서는 “내장된 슬픔 치유와 삶의 극복 의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내장된 슬픔의 근원은 수해 참사로 생사 불명 된 어머님, 어릴 적 혼자 외갓집에 놀러 간 후 아무것도 안 하고도 당한 재난의 가정 붕괴 그로부터 오는 분리불안, 그리고 사기당한 건으로 이어진 법정 분쟁과 그에 따른 경제적 정신적 고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유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세상 풍파 속에서 뼈대를 곧게 세우고, 서글픈 기억과 상처들을 언어로 하나씩 어루만지는 치유의 여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를 통해 고통을 치유하려는 극복 의지와 희망의 내일을 기대하는 강인함을 알 수 있었다. 아무쪼록 유 시인이 현실적인 과제들을 해결하고 정서적 안정을 되찾으며 고통의 치유를 넘어 더 자유롭고‘행복한 시 쓰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