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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제자리 밤벌레 나의 짧은 사랑이여 봄맛 수면내시경 굽히다 동빈항의 꿈 임자 연근을 졸이다 얼갈이배추 중심 횟집 골목 거기 있다 대구 주전자 젊음 2부 품 폼페이 양귀비 무심한 불효 소리 우물 엄마의 부적 추억 버스정류장 누름돌 목련 눈 이팝나무 아래서(1968) 빈방 자리 무명 요 책벌레 팝콘 3부 홍합 그해 여름 옥수수밭에서는 모래밭에 앉아 불안 달달한 꽃잎 수상한 나이 축제 오일장 집 등대 길을 묻다 가시내 비지찌개 초록 그래, 그래 4부 봄 암소 그리우면 아내 논두룸 콩 늙은 냉장고 로드킬 문어 삶는 집 멍 이를테면 어떤 봄 햇살 세모 비닐 오렌지 그래그래 여름밤 연두를 놓치다 뜨거운 오후 해설 / 작은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_양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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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담그는 날
메주가 뜨지 않게 대나무로 얼개를 친다 곧게 자란 속성을 굽히려면 저도 나도 맞버틴다 어느 순간 제 처신을 알았는지 옹가지 모양 따라 순하게 굽힌다 가끔 들여다볼 때 독 안이 제 몸인 양 등 굽힌 곡선이 편안하다 장 뜨던 날 대나무를 들어 올리니 처음 그대로 쫙 뻗친다 어찌 견디었는지 어찌 참았는지 굽은 맛이 짭짤하다 ---「굽히다」중에서 밤을 깎다 벌레가 드러난다 달아나는 그림자를 쫓으니 후미진 골목 안 끝 집으로 들어간다 지붕이 무너지고 담벼락이 깨어진 그 집 사방이 뚫린 벽이었던 그 시절 순순히 방을 비운 적이 있었다 맞서지 못하는 그 모퉁이 그 벽을 겨우 붙잡고 하루가 무너지고 깨어졌던 때가 있다 --- 「밤벌레」중에서 오래전 너를 종일 잡고 있었다 손끝 발끝까지 기억이 물들었다 한 달쯤 앓고 강변에 나서니 그새 봄은 갔다 그새 봄은 갔다 --- 「연두를 놓치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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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아남은 생활의 조각들이 빚어낸 서정
— 김철순 시집 『발톱 끝에 날개가 돋는다』 출간 1. 낡고 익숙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오래 살아남은 마음’ 경북 청도 출신의 김철순 시인이 작가 시인선 28번으로 신작 시집 『발톱 끝에 날개가 돋는다』를 출간했다. 산문집 『소리를 갈아타다』와 디카시집 『푸른 악보』를 펴낸 바 있는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낡고 익숙한 일상의 시간들을 소중하게 품어낸다.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은 극적인 사건보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물건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 계절을 견디는 음식과 늙어가는 몸 등 일상의 장면들을 새롭게 비춘다.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오래 살아남은 마음으로서의 서정성”을 잔잔하고도 깊이 있게 전한다. 2. 세월의 인내와 타인과의 온기: 주요 작품 세계 떫은 나를 삭히게 해줄 돌을 만났다 그 돌은 뻗대며 살아 오르는 나를 자꾸 눌렀다 삭히고 삭힌 응어리는 더 살아올라 거품을 물고 쓴물을 뿜고 숨죽여 가라앉기도 했다 그렇게 40년 동안 살았다 그렇게 기다리다 나도 돌이 되었다 — 「누름돌」 전문 「누름돌」에서 ‘돌’은 김치를 삭히듯 시인의 뻗대는 시간을 묵묵히 눌러주는 평범한 도구이다. 그 오랜 압박 속에서 시인의 응어리는 거품과 쓴물을 뿜어내며 역동적으로 삭아간다. 마침내 시인이 “나도 돌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이 단단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오래 눌러준 존재의 의미를 비로소 몸으로 깨달았다는 뜻이다. 즉, 시인이 돌을 부린 것이 아니라 돌이 시인을 조금씩 변화시킨 것이다. 이처럼 김철순 시인은 사물이 시간을 견디며 아름다워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응시하고, 그 안에서 사물과 사람이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을 통해 고유한 서정성을 빚어낸다. 또한 그의 시에 등장하는 유난히 말수가 적은 인물들은 타인과 자신 사이에 놓인 긴장감을 느슨하고 편안한 감각으로 전환해 낸다. 듣고 싶지 않은 여자의 삶에 나는 더욱 겨울나무처럼 움츠러드는데 오랫동안 무언가에 쫓겨 온 것 같은 길고양이 한 마리 여자의 무릎에 덥석 안겨 숨었다 나비야 우리 집에 같이 살자 올겨울 너와 나 무척 따뜻하게 말야 몇 대의 버스가 다시 우리 앞에 서고 다시 떠났고 여자가 탈 버스도 이미 떠났는지 모르지만 어떠랴 오지 않을 이를 기다리며 나에게도 덥석 무언가가 안기기를 바라본다 — 「버스정류장」 부분 겨울 버스정류장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낯선 여자와 길고양이 한 마리를 통해 타인과의 느슨하고도 따뜻한 연결을 그려낸다. 상처와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시적 화자가 고양이의 체온을 통해 소외감을 위로받으며, 자신에게도 따뜻한 온기가 안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겨울 버스정류장에서 시적 화자는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 곁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고, 여자는 화자가 별로 관심 갖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눈치 없이 부려놓는다. 시적 화자는 그녀 앞에서 “겨울나무처럼 움츠러”들지만, 그 순간 길고양이 한 마리가 여자의 무릎으로 뛰어든다. 놀라운 것은 그 뒤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낯선 여자가 고양이를 보며 “나비야/우리 집에 같이 살자/올겨울 너와 나 무척 따뜻하게 말야”라고 말을 건네는 걸 보며, 시적 화자 역시 “나에게도 덥석 무언가가 안기기를” 바라게 된다. 이 풍경 속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타인에 대한 관용이나 연민 같은 것이 아니라 고양이의 체온이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대신 함께 따뜻한 것을 품게 되면서 조금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런 고양이를 ‘길’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서로를 낯설게 여기는 이들을 하나로 이어준 건 그들의 공통된 목표가 아니라 그들이 목적지로 향하면서 어느 순간 잊어버린 자기 자신의 소외감이나 고독이었다는 것이다. 3. 평론가의 눈으로 본 시 세계와 의의 김철순 시인의 시는 방황이나 상처의 기록을 긴 서사로 늘어놓지 않고, 가장 짧은 시구들 안에 밀도 있게 접어 넣는 묘미를 지닌다. 「밤벌레」, 「나의 짧은 사랑이여」, 「연두를 놓치다」 등의 단편들은 과거의 아픔을 보편적인 언어로 납작하게 만들지 않고, 독자의 현재 시간 속에서 계속 새로운 울림으로 살아나게 한다. 양진호 문학평론가는 “김철순의 시는 우리가 함께 겪어온 소박한 시간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과거의 경험들이 우리의 현재를 다시 밝힐 수 있도록 그것들을 시어들로 소중하게 품어낸다”고 평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낡고 익숙한 대상들의 잠재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김철순 시인의 시선은, 스스로의 내면을 조용히 돌아보게 만드는 뭉툭하지만 단단한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 시인의 말 장 담그고 매실 담그는 사십 년 내 작은 역사 유효기한 없는 불변의 양념이다 신혼 때 담은 지렁장이 해마다 섞여 씨장이 되고 매실청도 뚜껑마다 날짜를 새겨 창고 가득하다 맛 들고 진해질 때 나도 따라 철들어 갔다 떫은맛 시큼한 맛이 달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참 많은 일들이 나를 밟고 쓰다듬고 밀치며 지나갔다 내 몸의 유효기한이 얼마인지 날이 갈수록 삶의 애착도 질겨진다 내 생이 곰팡이 슬지 않기를 2026년 여름, 김철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