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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부 짧은 생각, 긴 여운 8초의 철학자 풍경 한 모금 삼신三身 자동차와 말 노부부의 윤회 배와 나 호미손의 기도 기쁠 땐 슬픈 기억이 그립다 길 위의 법문 고정불변의 법칙 와이퍼 근육 낙조落鳥 동성동본 인연 개미들의 시위 소리의 온기 N분의 1 주객전도의 유혹 부메랑 족장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환승 — 추모공원 가는 길 2부 나의 씨앗, 나의 거름 엄마의 유모차 꿈에서 본 아들 다시는 없을 이별 슬픔 줄이기 봄소풍 행복한 안녕 일곱 살 심부름 깜빡거리는 것들 멀미 그날, 나는 슬픔으로 배불렀다 마지막 강을 건너는 배 아픈 걸까 고목과 빈집 초기화가 깨운 아이 고향집 처마에 걸린 세월 낯선 곳에서의 익숙함 서러운 하루 자화상 2 엄마의 꽃식탁 읍내 장터 3부 느린 사유의 그늘 다리 위 로댕 가당과 무가당 빈자리 늦은 프로포즈 고도의 일상 묵언 헛된 바람 작은 새를 부러워했다 일그러진 얼굴 공명 인연 금지된 은혜 지푸라기 낙화 조화造花 가을산의 소리 사계四季를 품은 산 나란히 걷는 그림자 골목길, 강자와 약자의 경계 어둠 속의 눈 4부 삶에 관한 질문 강릉의 가뭄 늦은 8월의 동해 파도 아기별의 기로 공생共生과 기생寄生 우렁이의 정원 분식집 첫 오해 한나절 혼쭐 보호수의 간병 팝콘 매화 골목의 무법자 행복이 별건가 3월의 합창 그리움 대독천의 겨울 손님 낙엽의 기도 생존의 본능 가슴이 머무는 곳 모서리의 기분 웅크린 시간의 기록 해설 성문城門을 나서는 첫걸음의 다짐_이달균(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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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게 아니었어
아니, 어쩌면 이게 진짜 삶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암흑 속 나아갈 길은 끊어지고 들리지 않는 절벽 앞 두려움마저 거추장스런 사치다 마주하고 견디며 살아내는 일 그것은 뜻밖의 불행이 아니라 고도의 일상 대부분은 드러난 감각으로 살지만 마음이 예민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더듬이 하나로 세상의 거친 결을 짚고 선다 섬세한 떨림이 닿는 자리마다 침묵은 노래가 되고 온몸으로 마침내 눈부신 오늘을 맞이한다 --- 「고도의 일상」 중에서 나는 시골 굴뚝이 뿜어내는 연기를 좋아했다 아른아른 피어올라 노고지리 향수가 되고 지글지글 아랫목을 데우던 진국 같은 연기 연기 사라진 하늘은 매끈하니 심심하기 그지없다 나는 시골의 흙투성이 농로를 좋아했다 아슬아슬 좁은 길은 철부지 사랑의 놀이터 삽살개 뛰놀던 흙내 나는 추억 곧게 펴진 길 위에서 마음은 오히려 길을 잃는다 나는 시골의 짐승 울음을 좋아했다 어릉어릉 새벽을 깨우던 생생한 기상나팔 서로의 안부를 묻던 짓궂은 대화였는데 빈 울타리를 넘는 소리는 이제 먹먹하게 스러진다 아련하던 것들은 모두 길 위로 흩어지고 좁던 흙길은 덧댄 만큼 서먹해졌다 사라진 것은 깊은 그리움으로 남아 우체통마저 떠난 낡은 고향집으로 하루가 천천히 저물어간다 --- 「그리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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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단순히 한 권의 첫 시집이 아니라, 오랜 시간 품어온 삶의 기록이자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고 늦은 시작을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공감과 잔잔한 용기를 건네는 『기쁠 땐 슬픈 기억이 그립다』는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울림으로 독자 곁에 머무를 것이다.
이달균 시인은 해설 「성문을 나서는 첫걸음의 다짐」에서 “전제순의 이 시집은 화려한 수사나 기교로 독자를 압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시간 삶의 그늘에서 조용히 길어 올린 말들이, 담담한 호흡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고 평한다. 또한 “예순이라는 생의 굽이에서 건네는 고백이기에 문장들은 조급함 대신 사유의 깊이를, 장식 대신 절제된 울림을 품고 있다”며, 이 시집을 “이제 막 세상에 내놓는 첫걸음이지만 이미 충분한 시간이 담긴 도착”이라고 평가한다.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이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오랜 시간 침잠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정직한 떨림과 깊이로 읽힌다는 것이다. 우연과 필연 사이, 어느 가장자리에서 타인과 나 사이, 아득한 간격을 건너 잊힌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얼굴 하나 오늘 깃털의 무게로 내려앉는다 묶을 수 없고 가둘 길도 없어 가느다란 눈빛 하나 겨우 맞추면 소리없이 서로에게 실려가는 너와 나 — 「인연」 전제순 시의 가장 큰 특징은 관계와 삶을 감상적으로 미화하지 않는 데 있다. 「인연」에서는 “우연과 필연 사이, 어느 가장자리에서 / 타인과 나 사이, 아득한 간격을 건너 / 잊힌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얼굴 하나 / 오늘 깃털의 무게로 내려앉는다”라고 노래하며, 인연을 육중한 관계성이 아니라 거의 감지되지 않을 정도의 가벼움으로 도착하는 현상으로 포착한다. 이어지는 “묶을 수 없고 가둘 길도 없어 / 가느다란 눈빛 하나 겨우 맞추면 / 소리없이 서로에게 실려가는 / 너와 나”라는 구절은 관계가 감정으로 봉합되지 않고, 붙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만 성립함을 보여준다. 난간 끝, 한뼘의 경계 위 하늘과 바다를 저울짓하듯 갈매기 한 마리 서 있다 누가 주인인지 묻지 않아도 머무는 쪽이 자리를 가진다 발소리 하나에 공기를 찢듯 몸을 던졌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와 비워 둔 자리처럼 아무도 붙잡지 않는 무심한 눈빛으로 지나가는 것들을 흘려보낸다 다리 위 생각에 잠긴 형상 하나 끝내 닿지 못할 곳을 향해 고독한 조각상이 되어 너른 바다를 깊이 사유한다 — 「다리 위 로댕」 「다리 위 로댕」에서는 갈매기와 조각상이라는 두 개의 형상을 병치하며 관계의 불가능성과 존재의 조건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난간 끝, 한뼘의 경계 위 / 하늘과 바다를 저울짓하듯 / 갈매기 한 마리 서 있다”는 도입부는 존재가 서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리이자 언제든 이탈 가능한 경계선을 제시한다. “머무는 쪽이 자리를 가진다”는 구절은 존재의 정당성이 본질이 아니라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냉정한 인식을 드러내며, “비워 둔 자리처럼 / 아무도 붙잡지 않는 무심한 눈빛”은 관계가 깊어질 수 없다는 조건을 보여준다. 시의 후반부에서 “생각에 잠긴 형상 하나 / 끝내 닿지 못할 곳을 향해 / 고독한 조각상이 되어 / 너른 바다를 깊이 사유한다”는 대목은 사유하는 주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담아낸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시적 태도는 감정을 절제했다는 데 있지 않고, 감정을 제거한 자리에서 드러나는 구조적 인식, 즉 머묾과 이탈, 사유와 불가능성 등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데 있다. 인연을 신비화하거나 미화하는 대신, 그것을 끝내 붙잡히지 않는 현상으로 남겨두는 시인의 태도는 「인연」과 「다리 위 로댕」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일관되게 드러난다. 이러한 건조하고도 집요한 방식은 관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감정의 심화가 아니라 발생과 소멸의 조건으로 재배치하며, 이 시집만의 뚜렷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삶의 순환 속에서 자신을 되묻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지 않는다 먼 궤도를 돌아 등 뒤로 돌아와 꽂히는 부메랑 오늘 건넨 한 번의 눈길은 보이지 않는 빛의 씨앗이 되어 가장 추운 겨울에 이름 없는 꽃으로 피어난다 우리는 늘 저울 위에 서 있다 디딘 발자국이 길이 되고 품은 마음의 결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미는 손이 된다 빛을 내어주면 앞길이 먼저 밝아진다 이 순환의 궤도 안에서 나는 어떤 원을 그리고 있는가 — 「부메랑」 「부메랑」에서는 삶의 순환과 윤리적 성찰이 담담하게 형상화된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지 않는다 / 먼 궤도를 돌아 / 등 뒤로 돌아와 꽂히는 부메랑”이라는 구절은 자신의 행위가 결코 소멸되지 않고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삶의 원리를 드러낸다. 이어 “오늘 건넨 한 번의 눈길은 / 보이지 않는 빛의 씨앗이 되어 / 가장 추운 겨울에 / 이름 없는 꽃으로 피어난다”는 대목은 작은 온기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되돌아온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마지막의 “이 순환의 궤도 안에서 / 나는 어떤 원을 그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과녁이 바로 자신임을 숙지하며, 앞으로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조용한 각오를 담아낸다. 『기쁠 땐 슬픈 기억이 그립다』는 늦게 시작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오랜 공직 생활과 삶의 무게, 가족과 고향, 일상 속에서 길어 올린 기억들은 시인의 절제된 언어와 만나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성찰의 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시집은 단순히 한 권의 첫 시집이 아니라, 오랜 시간 품어온 삶의 기록이자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고 늦은 시작을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공감과 잔잔한 용기를 건네는 『기쁠 땐 슬픈 기억이 그립다』는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울림으로 독자 곁에 머무를 것이다. ■ 시인의 말 기억이 닿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병치레가 잦았습니다. 아픈 시간을 견디며 자연스럽게 노트에 마음을 적기 시작했고 그 습관은 오래도록 제 곁에 남았습니다 이십 대 초반에는 기자 생활을 했지만 이런 부실함으로 오래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공직에 몸담았고 그 자리에서 서른여섯 해를 살아왔습니다. 바쁜 삶 속에서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만은 오래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순을 앞둔 지금 오랫동안 익숙했던 삶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이제는 다른 길을 천천히 걸어보려 합니다. 이 시집은 그 조용한 전환점에서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은 다짐이자, 새로운 출발의 기록입니다. 잘 쓰려 하기보다 살아온 마음을 솔직하게 남기고 싶었습니다. 이 짧은 기록이 누군가의 하루에 잠시 머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2026년 초여름, 전제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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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도 완결이 아니라 경과라고 말한다. 하물며 이제 그 첫걸음을 시작하는 시인이라면 그 유보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문학은 바로 그 경과의 순간에서 가장 솔직한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첫걸음의 향기가 어디로 향할지는 가늠키 어렵지만, 기다리는 이의 예감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말에 물을 먹이고 성문을 나서는 시인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그 결과를 천천히 바라보면 될 일이다. 전제순의 다음 시집을 기대한다. - 이달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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