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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 홍경원 시각작가] 9
간 13 새 한컴오피스 한글 2014 문서 39 방문 67 풍장 97 두 번의 장례식, 한 번의 결혼식 125 임시 정거장 143 삼백육십오일 167 고려장 187 [물들이는 글 - 이정민, 예술모델] 227 [닫는 글 - 정여랑 작가] 231 |
정여랑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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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등껍질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줄 알았었지. 저 등껍질이 단단하고 견고해서 나를 지켜 줄 것만 같았었지. 하지만 그 아래 숨겨진 당신의 속은 어찌나 여리고 약했던지.
---「간」중에서 술을 안 먹고도 술 취한 것처럼 흐느적대며 계속해서 지루하고 시끄럽게 이야기를 이어 가다 헤어진 게 어제였다. 공원의 긴 벤치 하나 위에 올라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그렇게 한참을 쉬지도 않고 떠들다가 야, 이제 헤어지자, 어, 그래, 하고 우리는 순식간에 해산했다. 나는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우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재연은 잊을 수도 없어 함께 사는 우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울이란 놈을 욕하고, 미워하고, 연민을 느끼며 그렇게 앉아 답도 없고 쉰내 나는 대화를 계속했다. ---「새 한컴오피스 한글 2014 문서」중에서 이영이 갇혀 있는 방에는 녹음실 등에서 주로 설치하는 흡음재가 사방에 시공되어 있었다. 한쪽 천장의 모서리에는 작은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데다 자신이 내는 작은 소리마저도 다 흡수되어 버리는 것 같은 그 방 안에서 이영은 아득한 공포를 느꼈다. ---「방문」중에서 소영아, 이 여름은 정말 지독하다. 밤인데도 날이 너무 더워. 바람이 많이 불었으면 좋겠어. 몸이 너무 무거워. 더워서 그런가 봐. 미안해. 나는 바람이 되는 걸 선택했어. ---「풍장」중에서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승미의 발걸음이 오래된 모텔의 좁은 복도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겨울 냄새가 났다. 찬 공기, 콘크리트 계단, 젖은 코트 자락 같은 냄새. 승미의 걸음이 멈췄다. 이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혼자 살던 집을 오르던 계단에서. 그가 떠나고 난 뒤의 겨울이었다. ---「두 번의 장례식, 한 번의 결혼식」중에서 하필 오늘, 정류장이 사라졌다. 이 도시는 그렇게 예고도 없이 어떤 것들의 자리를 옮기거나 없애기도 한다. 사람도, 시간도, 감정도. “오늘은 내가 할 거야!” 둘째 서아가 고집을 부렸다. 이제 혼자 양치를 잘할 수 있다며 작은 칫솔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을 마냥 사랑스럽게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임시 정거장」중에서 주기는 칼같이 돌아왔다. 늦어질수록 통증은 심했고, 일찍 시작하면 일 년에 열서너 번도 해야 하는 생리라 너무 큰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차라리 이렇게 칼같이 28일 주기로 오면 예상이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리통이 시작되면 배꼽 아래로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꼬리뼈를 끊어낼 듯한 고통에, 자궁은 자신의 존재감을 격하게 통증으로 드러냈다. ---「삼백육십오일」중에서 서버는 자꾸만 자신을 먹이고 키운 사용자들의 계정을 삭제해 버리려고 들었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공간 안에서 서버가 계속 새로운 데이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수많은 계정이 서버에게 데이터를 먹이로 주고 요금을 내며 키우다가, 어느 순간에는 움직임을 멈추고, 시간이 지나면 삭제당했다. 위저드는 서버 공지에 뜬 숫자를 보다 결정을 내렸다. ---「고려장」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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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랑의 언어는 솔직하고 섬세하다. 그리고 그 언어는 몸을 향해 있다.
이 소설집의 여덟 편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 몸이, 그리고 그 안의 고통이 온전히 자신의 것일 수 있는가. 〈간〉의 토끼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통제 속에서 조금씩 이물질이 되어가고, 〈삼백육십오일〉의 수진은 매달 자신의 몸으로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표제작 〈풍장〉은 금기에 도전하는 화두를 품고 침묵과 배신의 구조를 파고들며, 〈임시 정거장〉은 도시가 지워 버린 자리마다 남겨지는 사람들을 통해 같은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던진다. 그런가 하면 〈새 한컴오피스 한글 2014 문서〉와 〈두 번의 장례식, 한 번의 결혼식〉은 설명되지 않는 사랑의 자리를 그린다. 실연이 한 남자의 언어에 스며드는 방식이든, 두 사람 사이에 겹겹이 쌓인 말할 수 없는 것들이든, 사랑은 결국 설명되지 않는 것들의 서사다. 스릴러 형식의 〈방문〉은 장편으로 다시 만나고 싶을 만큼 힘 있는 이야기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고려장〉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AI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가를 묻는다. 여덟 개의 몸, 여덟 개의 풍장. 정여랑은 그 모든 몸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펼쳐 둔다. - 조영주 (소설가/세계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