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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세계
김선재
문학실험실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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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_1978
_감상 세계
_계절의 끝
_물과 오후
_어느 날 숲속에서
_보이지 않는 집
_토끼의 사실
_숲 바깥쪽으로
_마음 없는 마음

해설_김형중(문학평론가)

저자 소개 1

1971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나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6년 『실천문학』에 소설을, 2007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얼룩의 탄생』 『목성에서의 하루』,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누가 뭐래도 하마』, 연작소설집 『어디에도 어디서도』, 장편소설 『내 이름은 술래』 『노라와 모라』, 시소설집 『뜻밖의 의지』(공저)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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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8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352g | 138*208*20mm
ISBN13
9791198481771

책 속으로

오늘은 동지라는 말로 작은 여자에게 보내는 메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의 일흔두 살 된 친구에 대해 쓴다. 눈에 갇히는 바람에 눈이 어두운 그 친구에게 책을 읽어준 적이 있다는 내용이다. 죽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짧은 소설이었다. 그럼 이미 다 죽은 거네. 듣고 있던 장은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따뜻한 안부나 인사는 생략한 메일을 전송하고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지워지는 창문을 본다. 밤은 길고 얼어붙어 작은 여자에게서는 결코 답장이 오지 않을 거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들은 지금 눈 속에 있다. 눈은 오래오래 녹지 않을 것이다.
--- 「감상 세계」 중에서

식은 심장이 얼어 쪼그라드는 동안 먼 곳에서는 제를 지내는 초가 켜지고 바람을 담은 향은 번번이 흐려질 것이다. 어두운 곳에 모인 향내가 흐르지 않는 건 식어가는 나의 원(怨). 길 위에서 쓰러진 자가 치러야 할 당연한 대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아이가 죽고 죽은 자리에서 자란 아이들이 품 안에서 식어가는 자식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 풀은 자라고 그때가 되면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는 비어 있을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빈 원처럼. 다시. 끝없이.

눈 위에 눈이 쌓인다. 죽은 자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시간이다. 얼굴이 지워진 아버지가 깨진 내 육신을 어루만진다. 나는, 처음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눈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른 봄날 산나물을 캐러 온 눈매 고운 계집아이가 아직 다 녹지 않은 눈 속에서 드러난 내 발뒤꿈치를 건드릴 것이다. 그때까지 어떤 방식으로도 기록에 남지 않기를. 그것이 내 최후의 원(願)이다.
--- 「1978」 중에서

슬픔을 어떻게 이기나. 그렇다면 슬픔에 져야 하나. 슬픔은 왜 이렇게 내내 내다 버려지지도 않나. 선실 바닥에 누워 눈을 감은 채 그런 생각을 하던 여자는 좀 전에 남자가 중얼거리던 말을 떠올렸다.
-이 양반아. 바다는 이기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남자는 분명 여자가 벤 목 베개를 고쳐 베어주며 그렇게 말했다. 아주 옛날 자신이 이 바다를 건널 때 들었던 말이라고 했다.
-그럼 이번이 두 번짼가요?
그 정신 없는 와중에도 여자는 그렇게 묻고는 이내 자책했다. 돌았네. 돌았어. 여자는 드러누운 채 실성한 사람처럼 코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자신은 누구와도 아무 일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느라 힘든 사람이었다. 평범하고 평화롭게. 그게 여자의 꿈이었다. 누구도 이기지 않고 미치지도 않은 채로 살고 싶었다. 두통이 다시 시작되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여자는 크게 심호흡하며 띄엄띄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떤 논리나 마음보다 앞선 끝없이 피로한 몸뚱이가 거기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자꾸 잠이 와서 다시 선잠에 빠진 여자는 얕은 꿈을 꿨다. 바닥이 없는 꿈이었다. 무엇인가가 없는 바닥 쪽으로 여자를 자꾸 잡아당겼다. 끙끙 앓다가 하선을 안내하는 방송을 들으며 깼을 때 남자는 이미 배에 없었다.
--- 「물과 오후」 중에서

-춥다.
아랫도리를 벗은 채 서 있는 유고 씨가 말한다. 조는 욕실 안을 떠도는 구린내와 묵은 암모니아 냄새에 점점 속이 불편해지는 걸 느끼며 샤워기를 집어 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수습할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건 분명하다. 물의 온도를 거듭 확인한 다음 낡은 목각 인형처럼 선 유고 씨의 등 쪽에 샤워기를 갖다 댄다. 평평한 엉덩이 골을 타고 쏟아지는 물줄기들이 가느다란 유고 씨의 다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걸 본다. 유고 씨나 조나 채 닦아내지 못한 배설물들이 욕조 바닥에 어수선하게 고이는 걸 볼 뿐, 서로 별말이 없다. 샤워기를 유고 씨의 손에 쥐여준 조는 비누 거품을 낸 타올로 그의 늘어진 엉덩이와 고환 밑을 닦아내며 숨을 참는다. 도대체,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조는 유고 씨의 몸을 헹구며 참는 일과 참을 수 없는 일 사이의 거리를 가늠한다. 유고 씨가 조를 향해 입을 연 건 그즈음이었다.
-널 낳길 정말 잘했지 뭐냐.
--- 「계절의 끝」 중에서

태어나자마자 열병을 앓아 청력을 잃은 어머니는 늘 겁에 질린 사람처럼 보였다. 나까지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를 동굴에 숨긴 이유였을 거다. 그 동굴 앞에는 촛대처럼 생긴 뾰족한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에 기어 올라가서 보면 안치해변 전체가 보였다. 작고 좁은 해변이어서 사람들은 거의 가지 않는 그곳을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고 나면 가끔 육지 것들이 흘러왔다. 비닐이나 깡통, 그리고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하면서 질 나쁜 종이만 겨우 남은 삐라 같은 게 그 해변에 뒹굴었다. 라면 봉지나 하이타이 봉지 같은 게 밀려오기도 했다. 밀려온 그것들은 육지에 대한 열망과 허상과 상상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 쓰레기들을 재료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집을 지으며 유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 섬을 떠난 건 내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였다. 간첩으로 몰린 아버지가 육지로 끌려가고 여동생이 너울에 휩쓸린 다음 해였다. 정말 섬이라면 지긋지긋했다. ……내가 안치해변에 써 놓고 온 편지를 어머니는 보았을까.
--- 「물과 오후」 중에서

나는 학생들과 눈을 맞추지 않고 계산대 위에 쏟아놓은 물건들의 바코드를 찍기 시작한다. 앞치마 속의 휴대전화가 잠잠해지는가 싶으면 다시 떨리기를 반복한다. 저 혼자 떨고 있는 꽃,이라는 문장이 떠올라서 고개를 젓는다. 그건 묘사가 아닌 것 같다. 묘사는 세계의 사소한 비밀을 발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비밀은 반드시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는 말도 떠오른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아름다움이 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2+1인 슈퍼콘과 콜라, 햄버거, 삼각김밥 두 개의 합은 1만 1천 3백 원이다. 비밀이 끼어들 여지도 없이 딱 떨어지는 1만 1천 3백 원. 그건 아름다운 걸까. 계산을 마친 학생들이 돌아가고 나는 유리 벽 너머에서 꽃이 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나팔 모양의 주황색 꽃이 송이째 바닥으로 떨어진다. 모가지가 꺾인 아름다운 짐승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어쩐지 끔찍해서 고개를 흔든다.

--- 「어느 날 숲속에서」 중에서

추천평

‘차이 나는 반복’이 아닌, ‘차이 없는 반복’을 향한 소설의 여정

“김선재의 인물들은 한국 소설사상 가장 동선이 짧은, 혹은 동선 0에 수렴하는 존재자들이다. 그런 인물들을 부르기에 유령, 특히 ‘지박령(地縛靈)’이란 말 만큼 적절한 단어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무관하고 무감하고 반응하지 않고 한 장소에 고립되어 그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그러나 가까스로 살아는 있는 그런 존재는 분명 유령적이다.” - 김형중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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