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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지혜와 거리두기 7 구병모 숨값 37 김선재 뜻밖의 의지 51 김수온 애프터눈 티 63 여성민 밤에 해변에 75 임현 미망 89 정지돈 프랑크 헨젤 99 에필로그-기혁 시소설: 비어있는 것을 규정하는 한 방식 111 |
Lee, Jang-wook,李章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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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된 후에도 지혜는
엉뚱한 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죠. 낮에도 밤에도 누구를 만나도 그곳이 어디어도 지혜는 지혜로워지지 마세요! 라고 말했는데 그건 물론 지혜가 지혜였기 때문에 가능한 농담 아무래도 우습지 않은 농담 아무도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농담 ---「이장욱, 지혜와 거리두기」중에서 지난번에 내가 뭐랬어 숨만 쉬고 살아도 돈이 든댔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따박따박 떼어 가는 건보료 하며 병원 문턱에도 안…… 못 가는데 그냥 허공에 녹아 사라지잖아 설탕 같은 숫자가 결산이며 자료라고, 너 이렇게 먹고 입었다며 화면을 건드리고 지나가지만 숫자와 맞바꾼 구체적인 실물을 내가 만져 본 적은 손에 꼽잖아 나 정말 구제救濟 받고 싶다고 주민 센터에 갔거든 건보료만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여기가 아니래 건보공단에 가래 그래 갔지 담당자가 그래 소득이 있으니까 안 된다고 그래 하지만 월세로 나가고 밥 먹을 돈도 전화요금도 없는데요, 했더니 그건 또 우리 소관이 아니래 어쨌든 너는 돈을 벌고 백 원 천 원이라도 벌고 거기서도 세금이 까이는 게 당연한데 어떻게 건강보험만 날로 먹으려 드느냐고 그래 지금 젊어 그렇지 창궐하는 공기요정들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호흡기 질환자인데 평생 병원 문턱 한 번 안 넘어 보고 살 거 같냐고도 그래 그러면서 나를 구제驅除할 것 같은 눈으로 바라봐 ---「구병모, 숨값」중에서 나는 왜 아직 여기 있을까. 침묵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밤이면 가끔 그런 것이 궁금해진다. 애초부터 나를 만든 건 희망이 아니다. 나는 그저 희망이나 절망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떠돌 뿐이다. 비가 지나간 뒤 더 짙어지는 웅덩이나 웅덩이를 건너뛰는 아이의 짧고 작은 허공. 나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발음되는 존재다. 물론 나는 네가 발음할 수도 발음한 적도 없는 존재였다. 곁에 있는 내가 너를 감각할 수 없는 이유다. 나는 보고, 본 것을 전하거나 기억할 뿐이다. 눈을 뜬 네가 비척비척 일어나 빈 화분 쪽으로 돌아앉는 지금도, 나는 너를 바라보기만 한다. 속옷을 내리고 검은 똥을 흘리는 너를. 창백하고 건조한 얼굴을 드는 너를. ---「김선재, 뜻밖의 의지」중에서 여인들은 커튼이 쳐진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베레모를 푹 눌러쓴 군인은 이미 마을을 떠나고 없다. 마을을 떠나 본 적이 없기에 여인들은 군인의 행방을 모른다. 한동안 침묵이 지속된다. 하루도 잊어 본 적 없는 얼굴을 저마다 떠올린다. 마음을 다해 기르고 가꾸었던 모든 것들에는 각자 지어 준 이름이 있다. 입술 끝으로 발음하기도 전에 곁을 떠나곤 했지만. 마을의 여인들은 그런 슬픔을 하나쯤 안고 살아간다. 그들의 얼굴이 차갑게 식은 버터쿠키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창문을 닫아 버려서 다시, 연기가 부양하고 있다. ---「김수온, 애프터눈 티」중에서 아름다워. 구름을 봐요. 어디선가 몰려오는 구름. 밤인데도 해변인데도 구름은 이렇게. 구름은 얼음인가 봐. 녹으며 형태를 바꿔요. 개처럼도 흐르고 개의 머리와 개의 머리가 섞여요. 애인이 일어나 몇 걸음 다시 걸었다. 파인애플을 파는 사람이 해변에 서서 파인애플을 팔고 있었다. 이 달콤한 향기.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독일인은 말하고 구름을 보며 시인은 앉아 있고 파인애플을 파는 사람은 파인애플을 팔았다. 누군가 에어플레인, 에어플레인, 하고 외쳐서 독일인과 애인과 시인과 파인애플 파는 사람이 거의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야구공 하나가 에어플레인처럼 그들 사이를 날아갔다. ---「여성민, 밤에 해변에」중에서 유리벽 앞에 서면 수심 깊은 곳의 어종처럼 속이 비쳤다. 상가의 물건들이 내장이 되었고 제과점 앞에서 갓 구운 부레를 달고 있을 때가 제일 좋았다. 심심한 오후엔 자전거 가게에서 체인처럼 감겨 있는 창자를 구경했다. 어디로든 굴러다니고 싶었다. 재채기를 하면 자꾸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수천 개의 아가미들이 비늘을 풀고 헤엄쳐 갔다. 손안에 가두려 움켜쥐면 지느러미가 건드리고 간 자리마다 손금이 어지럽게 돋아났다. 잎맥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결 같기도 하고, 누군가 있지도 않은 수초를 보았다고도 했다. 세상의 피리들은 얼마나 많은 재채기를 뱉어 냈기에 구멍 속에 음계를 갖는 것일까, 생각하면 몸 안의 뼈들은 가벼워지다 투명해졌고 내가 다 잃어버린 것들의 발자국이 기억나지 않았다. ---「임현, 미망」중에서 프랑크는 말을 마치고 저를 바라봤어요. 완전히 어두워진 밤이었고 우리는 몽펠리에와 니스 사이의 어딘지 모를 숲 길을 달려가고 있었어요. 저는 달빛에 번득이는 헨젤의 흰 자위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 치는 미친 게 틀림없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야. 왜냐하면 〈바다의 침묵〉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었거든요! 저는 그가 나를 떠보려고 이러는 건지 잠시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소설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평온하고 확신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렇게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프랑크 헨젤은 처음이었습니다. ---「정지돈, 프랑크 헨젤」중에서 |
시소설詩小說이라는 단어는 얼핏 시와 소설의 특정을 뒤섞어놓은 장르를 떠올리게 한다. 외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시소설, 혹은 운문 소설로 번역 가능한 ‘verse novel’이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며, 국내의 경우 크로스오버crossover 형식을 표방하는 시소설 작품집이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출간된 바가 있기에 어감만 놓고 본다면 일반 독자들에게도 아주 낯설게 여겨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독자들의 예상과 달리 시의 장르적 특징과 소설의 장르적 특징을 뒤섞는 작업은 뜻밖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시소설을 창작하기 위해선 먼저 시와 소설에 대한 장르적 규약을 확정 짓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 전공자나 문학에 조예가 깊은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미하일 바흐찐, 유리 로트만 등 러시아 구조주의 평론가들의 난해하기 그지없는 저서를 살펴보더라도 시와 소설의 분명한 경계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러시아 구조주의자들은 종종 소설을 규명하기 위해서 시적인 자질을, 시를 규명하기 위해서 소설적 자질이 비교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을 토대로 시와 소설 각각의 장르가 일정한 규약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발표 당시 작가가 부여한 성격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밝혀 낸다. 이를테면 운율이나 리듬감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시에서 시적 특성을 찾아낸다거나, 전체가 운문으로 쓰인 소설에서 소설적 특징을 이끌어 내는 식이다.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시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시가 아니라, 여하한 소설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시이기 때문에 시인 것이다. 소설 역시 운문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라 운문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인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시소설은 시와 소설의 특징을 뒤섞는 작업이라기보다 이미 각 장르에 내재해 있는 시적 혹은 소설적 자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작업인 셈이다. (…중략…) 이 책의 출간 전 작가들에게 요청했던 바는 시소설 청탁을 받았을 당시의 당혹스러움을 수정에 최대한 반영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교의 세련됨을 더해 달라는 요청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각자의 문학적 경험과 믿음으로 시소설을 호명해 달라는 무척 난감한 부탁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시소설은 장르가 아닌 도전이며, 시와 소설의 기대를 모두 배신해야 하는 가면 쓴 내포 작가의 능청스러움과 절박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시인이나 소설가 모두에게서 늘 반쯤은 잠겨있는 상태. 투명 인간의 근사한 외출복처럼 어쩌면 그것이 호명될 때에야 비로소 겉옷을 걸치고 보이지 않는 속살을 빚어내는 형식인지도 모르겠다. - 기혁 시인·리메로북스 노조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