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이 책에 대해 9
서론: 환멸로 가득 찬 현재 11 진보, 디스토피아, 향수 17 기회로서의 환멸화 21 산업적 근대에서 단독성들의 사회로 22 1 문화투쟁으로서의 문화갈등: 33 하이퍼컬처와 문화본질주의 33 사회적인 것의 문화화 37 문화화 1: 하이퍼컬처 42 문화화 2: 문화본질주의 47 하이퍼컬처와 문화본질주의: 공존과 갈등 사이에서 52 보편화하기 ― 보편적인 것의 문화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57 2 평준화된 중간계급사회에서 3계급사회로: 신중간계급, 구중간계급, 프리카리아트계급 67 글로벌한 맥락과 역사적 맥락 75 변화를 가져온 기본 조건: 탈산업화, 교육의 확대, 가치관의 변화 83 3계급사회의 파테르노스터 속에서 90 신중간계급: 성공적 자기실현과 도시적 코스모폴리타니즘 94 구중간계급: 붙박이 삶, 질서, 문화적 방어 101 프리카리아트계급: 이를 악물고 버티기와 더 낮은 계급으로의 탈락 106 최상류계급: 부를 통한 거리 두기 111 공통적 특징: 젠더, 이주, 지역, 사회적 환경 113 정치적 양극화 경향과 사회의 미래의 시나리오들 128 3 산업사회를 넘어: 양극화된 탈산업주의와 인지문화자본주의 137 산업적 포디즘의 흥망성쇠 146 포화 위기 151 생산 위기와 양극화된 탈산업주의 155 지구화, 신자유주의, 금융화 163 인지자본주의와 비물질적 자본 167 문화적 재화와 문화자본주의 174 승자독식 시장: 인지적·문화적 재화의 확장성과 매력성 181 극단들의 자본주의: 사회적인 것의 경제화 190 4 탈진된 자기실현: 포스트모던적 개인과 정서 구조의 역설 199 자기규율에서 자기실현으로 204 성공적 자기실현: 야심찬 이중 구조 209 부정적 정서를 유발하는 것으로서의 자기실현 문화 216 실망의 악순환으로부터의 출구? 228 5 자유주의의 위기와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모색: 235 개방적 자유주의에서 매립된 자유주의로 235 정치 패러다임과 정치적 역설 241 문제 상황과 문제 해결: 규제 패러다임과 활성화 패러다임 사이에서 245 사회조합주의 패러다임의 부상 250 과잉규제의 위기 254 개방적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부상 258 개방적 자유주의의 삼중적 위기 264 증상으로서의 포퓰리즘 272 미래의 패러다임으로서의 ‘내장된 자유주의’? 279 내장된 자유주의의 과제 286 |
|
환상의 종말은 단지 진보와 평등을 추구해온 ‘좌파’에게만 닥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규제 철폐 등의 ‘민주주의’를 추구해온 ‘우파’에게도 닥치고 있다. 그 결과가 글로벌 포퓰리즘의 역습이다. 가령 트럼프주의가 대표하는 그것은 - 마치 나치, 즉 국가사회주의가 민족이라는 우파 이념과 사회주의라는 좌파 이념을 혼합했듯이 - 21세기의 현실로부터 상처입고 정치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좌우의 모든 사람을 뒤죽박죽으로 혼합 중이다. 그것의 전형이 이탈리아의 집권 정당이다.
‘친명’이니 ‘비명’이니 하는 정치 쇼를 반복하는 한국 정치 또한 ‘연성 포퓰리즘’ 체제라면 과장일까? 아무튼 ‘글로벌 포퓰리즘의 역습’은 프랑스혁명 이후 소위 좌우파라는 양대 정치 진영에 의해 유지되어온 근대 정치의 종말을 의미한다. 가령 현대 정치의 탄생지 중 하나인 프랑스 정치 상황을 보라. 기존의 진보를 대변해온 공산당이나 사회당의 ‘존재감’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기독교 중심의 보수파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은 신중간계급을 대변하는 마크롱의 〈전진〉이라는 급조 정당 그리고 극우파 〈국민전선〉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전통적 좌파를 대변하는 〈노란 조끼〉는 거리 위에 있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의 모순을 (‘대중정당’을 매개로) 의회라는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협상 · 해소한다는 민주주의 교과서의 정치론은, 이제 옛날의 금잔디에서 이야기되던 환상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것은, 포퓰리즘이 아르헨티나부터 현재 신나치 현상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독일과 푸틴의 러시아까지 이르는 ‘글로벌한’ 현상임을 보면, 일시적이거나 과도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 모든 ‘환상의 종말’ 현상은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화 때문이다. 즉 20세기 말까지의 산업 자본주의가 포스트모던 경제에서 문화인지 자본주의로 변형 중이다. 이와 함께 산업과 (육체)노동과 노동조합, ‘부르주아(평생 직장인)와 프롤레타리아(산업 노동자)’ 등 그동안 익숙해온 모든 것이 대기 중으로 휘발되고 있다. 계급 아닌 계급인 두 계급이, 즉 글로벌 수퍼리치와 언더클래스underclass 또는 프리카리아트precariat가 풍문의 유령에서 현실 속의 악몽으로 등장 중이다. 가령 20세기 말까지의 ‘문화연구’에서는 완전히 사려졌던 계급이 사회적 상상계 속으로 복귀 중인 것이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이 잘 보여주듯이 이제 지구촌의 부의 90%정도를 소유한 수퍼리치는 더 이상 노동, 그러니까 근면성실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는 주식 동학 개미 등을 통해서도 널리 확산 중이다. 즉 베버 식의 자본주의의 정신과 ‘소명’ 윤리는 이제 신화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반면 언더클래스는 ‘언더’클래스라는 말대로 계급으로조차 포착되지 않는다. 그들의 노동 또한 ‘소외’ ‘이하under’이다. 프리카리아트라는 말대로 존재는 ‘위태위태하고’,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 벌어 하루 먹지만’ 문재인 정부처럼 진보를 참칭하는 정권의 우아한 위선의 희롱 대상이나 될 뿐이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두 ‘신흥’ 계급은 가령 여의도 금융가 또는 뉴욕의 맨해튼에서 공존하지만 무관하다. 무관계의 관계 속에서 병존한다. 19세기의 프롤레타리아는 ‘무산’계급이었지만 동시에 미래의 계급이었다. 하지만 프리카리아트는 노동조합도 또 정규계약도 없는 임시직에 종사하는 등 공식적으로는 자본주의와 ‘무관계’ 계급이다. 비공식적으로만 유관이다. 공식적 노동조합도 그들을 백안시한다. 그들은 ‘정신’, 즉 문화와 인지가 없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무젤만이다. 따라서 이제 ‘에이, 안 되면 노가다나 하지 뭐!’조차 과거의 사치가 되었다. 프리카리아트에게 할당되는 ‘육체’노동은 위에서 말한 대로 무관계의 노동이며, 단순 육체노동조차 곧 AI로 대체될 전망이다. 따라서 경제에서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정치에서의 ‘진보’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 21세기 사회는 피라미드형이 될 것인가 아니면 모래시계형이 될 것인가? 아니면 (SF영화) ‘엘리시움’형[양극화의 첨단화]로 치달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