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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초록을 궁리하는지 알 수 없어
임경자
더푸른출판사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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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3

1부 감나무가 살고 있어요

퐁퐁국화 10
풍선초 11
애기 감나무 12
수크령산비탈에 선 나무 16
모감주나무 17
날다 18
노고초 20
굴참나무 22
봉선화 24
산딸나무 26

2부 무엇이 이곳까지 끌고 왔을까

앨런 튜링 30
배흘림 32
회초리푸른비단이끼 33
미단시티공원전망대 34
실미도 36
역설수면 38
만학 40
곰국 42
국철 1호선 44
기생 46
걱정 48
방패연 50
케렌시아마중물 54

3부 청대로 물을 들여

쪽풀 58
우물 60
서편제 62
보름 64
끼니 65
천탄 66
섬 68
피뢰침 70
속울음 72
산통 74
정조준 76
공소 증후군홈 80

4부 시간을 베고 자라다

시장풍경 84
카코토피아단풍버스 88
눈 오는 날 90
보시길 93
가명회전근개파열 96
단모환 98
귀천 100
변씨의 봄날 102
노을 사랑 104
두륜산 106
너의 생일에 108

■ 해설 _ 이병국
그늘의 품, 그 무한한 밀착의 시학 110

저자 소개 1

2003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2012년 명지전문대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4년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하였다. 2024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지원금을 수혜하였다. 2025년 『한국문학예술』 희곡 신인상을 받았다. 시집 『우주가 잠들었을 때 나는 달이 되었다』 『어우렁 그네』와 산문집 『셋이 타는 자전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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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28g | 128*208*20mm
ISBN13
9791122028744

책 속으로

수크령*



도시를 떠나 너른 벌판에 서 있고 싶었다

4.3의 참혹한 섯알오름*을 오르며
바람에 흔들리는 이삭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보랏빛 영상
둥글고 휜 이삭마다 보랏빛 꽃을 매달았다

바람 부닥치는 언덕에서 겨울을 나며
뿌리에서 나온 신아가 또 뿌리를 내고
해마다 번성해서 군락을 이루려고 했다

질긴 생명력과 억척스러움
‘결초보은’의 전설을 품고 있었다

아, 아름답고 슬픈 연대
이곳에서 1950년 7월
참극이 벌어졌다니 믿을 수 없다

너른 촐밭*은 사라지고
풀밭의 절정을 따라 걷는데
서러움의 절정을 걷는 것만 같다

목소리들이 발목을 붙잡는다

*외국 이름 같아도 우리의 이름을 가진 식물.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4.3 사건의 아픔을 간직한 유적지.
*풀밭 제주방언

-

앨런 튜링*



어두운 방에 그를 닮은 기계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나는 말을 걸어본다
“기계처럼 생각하고 있나요?”

대답 없는 그의 등허리를 바라보다가
자꾸만 내 눈길이 아래로 떨구어진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인간만 생각하는 영혼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당신의 의견은 이해받았나요?”
그의 침묵은 계속되고 나는 호기심을 닫는다

세상의 말들이 통하지 않을 때
그는 낯선 문자를 풀어냈지만
자신의 과거는 풀지 못했다

나는 2026년으로 돌아와
손바닥만 한 기기에게 질문한다
“앨런 튜링도 AI 개발자인가요?”
“네, 현대 기준으로 보면 AI 개발자 시초 같은 분…”

그는 죽고 그를 닮은 기계가 그를 설명한다
지금 그는 있는 걸까? 없는 걸까?

6개월 시한부인 내가 1년 후에 읽힐
나의 시를 쓰고 있는데…

*1936년 영국의 수학자 튜링이 고안한 이론적인 계산기 및 현대컴퓨터 과학의 선구자이자 인공지능(AI) 개념을 처음 제시했으며, 기계가 지능을 갖췄는지 판별하는 '튜링 테스트'를 고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

기생



상암동 하늘공원 갈대숲에 야고*가 빌붙어 산다

제주 억새가 서울 오는데 따라왔을까

어떤 기생은 그렇게 집요하다

내게도 고독이 빌붙어 산다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수십 년 따라다니며

자꾸 시를 쓰게 만든다

새떼 떠난 휑한 벌판에 서 있을 때

새가 남긴 깃털을 오래 바라보게 하고

노을 지는 지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볼 땐

어둠에 떨게 될 여린 꽃의 숨소리를 듣게 한다

고독한 것이 고독한 것을 감지하게 하는 것은 고독의 습성일까

고독과 함께 살아온 지 수십 년 독한 시가 나왔다

지독한 고독의 기생을 나는 당분간 방치할 거다

*들판에 사는 풀이라고 해서 ‘들 야(野)’자와 ‘줄풀 고(菰)’자를 합쳐 부른다. 억새 뿌리에 기생한다.

-

단풍버스



S#1. am 8시/ 잠실역 너구리상 앞
너구리 상 앞에는 단풍놀이 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11월 주말이라 복잡한 길, 타고 갈 버스 기사가 계속 통화 중이다. 우리는 보험설계사 40으로 내장산에 가려고 이곳에 모였다. 나와 그림자가 등산복 차림으로 맨 뒤쪽 의자에 앉는다.

S#2. am 10시/ 정안알밤휴게소
내려오면서 내내 말이 없던 기사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0분 후에 출발합니다.” 첫마디를 던진다. 나와 그림자는 화장실에 들른 후 커피를 들고 차에 오르고 모두 승차했다는 듯 기사가 다시 고속도로를 달린다.

S#3. pm 12시/ 정읍전복돌솥밥집
내장사 가는 길에서 산을 올려다보니 아래쪽은 짙은 녹색, 중간은 노란색, 위쪽은 붉은색을 띠고 있다. 빨강! 빨강! 소리치면서 나와 그림자가 위쪽을 향해 먼저 뛰어간다. 빨강! 빨강!이 감탄사가 아니라 호명 같다.

S#4. pm 3시/ 내장산 주차장
한 참이 지나도 한 사람이 차에 오르지 않는다. 두 번째 안내방송 멘트를 들은 그림자가 울면서 차에 오른다. 그림자가 주목받는다. 실적이 거의 없던 그림자, 마이크를 잡고 울먹울먹 미안함을 표시한다. 우리 모두 그림자의 이름을 처음으로 새겨 넣는다.

출판사 리뷰

■ 시인의 말

상실은 삶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시가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애기 감나무 초록 잎에 기대어
이 시집을 어머니께 바친다

2026년 가을
임경자

추천평

임경자 시인은 “길 위에 길이 있”(길어 그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간다. 그곳에는 “발밑에 풀벌레가 찌륵거리고/ 머리 위 새가 휘이-오, 휘이-호”하며 시인을 반긴다. 시인은 “중턱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오래전 “시골집 뒷담 뒤에” 있던 “대밭”을 떠올린다. “할머니가 아기 재우듯 대나무가 자장가를 불”러 주었던 그곳으로부터 시인은 멀리 와 있지만, 지금 이곳이 종착지가 아님을 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쌓아 올린 시간을 관조하는 시인은 “길이 끝난 지점에서 더 많은 길이 뻗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금은 부재한, 시간으로부터 길어 올린 삶과 정동의 감각을 품고 그리움과 슬픔을 승화시키며 새로운 시의 길을 향한 또 다른 노정을 잇는다. 임경자 시인의 그 묵묵한 시적 수행을 따라 우리도 길 위에 발을 내디뎌본다. - 이병국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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