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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유일자가 연대하는 세상을 꿈꾸며
1. 왜 지금 슈티르너인가 2. 에고이스트와 그의 시대 3. 인간이란 무엇인가 4. 삶의 주인으로서의 나 5. 슈티르너 VS 근대사상 6. 슈티르너 VS 아나키즘 7. 슈티르너 VS 현대사상 8. 슈티르너 VS 동양사상 맺음말: 나는 유일한 존재다 |
朴洪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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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르너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자본이나 국가, 정부, 그 모두를 권력이자 권위로 거부한 점에서 아나키스트였지만, 다른 아나키스트들이 여전히 그것과 다른 집단을 선호한 반면 유일자를 이상으로 삼은 에고이스트 개인주의자였고, 그런 개인주의자들이 연대하는 세상을 꿈꿨다.”
--- 「머리말」 중에서 “내가 슈티르너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의 생각이 공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서가 아니다. 그 방향은 분명 옳지만 유일자로 살아가는 방법과 같은 구체적인 내용을 거의 말하지 않은 점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옳다.” --- 「1장」 중에서 “니체가 말한 엘리트적인 ‘초인’보다 슈티르너가 말한, 인간이면 ‘누구나’ 유일자라고 보는 인간상이 더욱 바람직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나이가 들면서 초인이 아니라 유일자라는 자각이 더 뚜렷해지고, 초인보다 유일자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4장」 중에서 “슈티르너는 고유한 개인의 성장과 표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고전적 아나키즘의 휴머니즘적 가정에도 궁극적으로 비판적이다. 아나키즘의 존재론은 근본적으로 특정한 휴머니즘 원칙을 고수하는 이상화된 주제에 의존한다. 따라서 슈티르너의 사상이 모든 초월적 사상(특히 ‘인류’를 포함)에 반대하는 자기결정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슈티르너를 단순히 아나키스트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 「6장」 중에서 “슈티르너의 반역 전략과 푸코의 자기돌봄 기획은 둘 다 주체와 주체의 자기와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자유의 우연적 실천이다.” --- 「7장」 중에서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은 불교의 ‘천상천하유아독존’과는 반대로 보일 수도 있는 무아(無我) 사상과 대립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따르는 도리를 스스로 체현하는 것이 불교라고 한다면 이러한 불교 사상은 슈티르너의 사상과 너무나 흡사하다” --- 「8장」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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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자’로 살 것인가, ‘유사자’로 머물 것인가
개인과 자유를 평생 물어온 법학자 박홍규가 꺼낸 질문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거부한 사상가, 막스 슈티르너의 삶과 생각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는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매이지 말라고 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국가와 민족, 종교와 도덕,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처럼 사람들이 목숨 걸고 믿는 것들을 그는 유령이라 불렀다. 어느 편이 옳은지 따지는 대신 그런 것을 믿는다는 일 자체를 의심했고, 오직 자신의 양심에만 따르는 ‘유일자’로 살자고 했다. 그런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이 1844년에 나온 『유일자와 그의 소유』다. 세상의 반응은 싸늘했다. 한때 슈티르너를 몹시 좋아해 마르크스에게 꼭 읽어보라는 편지까지 보냈던 엥겔스는 그 책에 분노한 마르크스를 보고 덩달아 돌아섰고, 두 사람은 슈티르너를 비난하는 책을 원저보다 두껍게 썼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그가 유령이라 부른 관념들을 함께 비판하며 유물론자가 되었고, 3년 뒤 그들이 쓴 『공산당선언』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비난은 곧 평가로 굳어져 슈티르너는 매도되거나 아예 잊혔다. 사진 한 장 남지 않아, 오늘 그의 얼굴을 전하는 자료는 엥겔스가 반세기 뒤 기억만으로 되살린 스케치 한 장뿐이다. 『에고이스트의 탄생』은 그렇게 잊힌 철학자와 그의 사상을 한국 독자에게 온전히 전하는 책이다. 2023년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우리말로 옮긴 박홍규는 난해하기로 이름난 그 원전의 개념을 하나씩 풀어내는 한편, 슈티르너의 생애와 시대를 촘촘히 복원한다. 나아가 그의 생각을 근대사상과 아나키즘, 현대사상과 동양사상에 차례로 마주 세운다. ‘초인’이 될 필요는 없다 저마다 ‘유일자’로, 그러나 함께 “그것은 ‘어떤 교리나 전통이나 외부적 결정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양심에만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유일자’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유일자다.” - 「머리말」 막스 슈티르너는 170년 전 사람이고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나온 것도 1844년이다. 그러나 저자 박홍규는 「머리말」에서 유일자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쓴다고 밝힌다. 자신이 아는 한 슈티르너가 말한 유일자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적은 없다는 것이다. 제법 오래된 사상이 이 땅에서는 아직 제대로 소개도 되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유일자란 누구인가. 슈티르너에게 에고이스트와 유일자는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두 이름이다. 그런데 에고이스트라는 말은 보통 자기 이익만 꾀하는 사람으로 읽히고, 이타주의의 반대말로 쓰인다. 그러나 슈티르너가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쓴 에고이스트는 전혀 다른 존재다. 저자는 에고이즘(에고이스트)을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유일자주의, 개성주의, 자아주의로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슈티르너가 쓴 ‘소유’라는 말 또한 재산권과 무관하다.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나만의 고유함을 뜻한다. 그러니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유일자로 살자”는 요청이지, 소유를 찬양하는 말이 아니다. 남보다 뛰어나려 경쟁하는 태도, 곧 에고티즘과도 구별된다. 니체가 초인을 말한 자리에서 슈티르너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누구나 초인이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각자가 구속이나 간섭 없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어울려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슈티르너가 죽었을 때 니체는 열두 살이었다. 흔히 슈티르너는 니체(주의)의 선구자로 불리지만, 저자가 둘을 갈라놓는 지점이 여기다. 니체의 초인은 소수의 것이고 그가 말한 힘은 권력의지라는 형이상학이지만, 슈티르너의 유일자는 누구나 이미 그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유령 신도 국가도, 심지어 자유마저도 “이데올로기를 귀신, 망령, 유령이라고 부르고 그것에 대한 복종을 사로잡힘, 신들림, 광신, 광기라고 비판했다. 요컨대 세상이 미쳤다는 것이다. 모두가 귀신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 「머리말」 슈티르너가 살던 19세기 전반의 독일은 가부장주의와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였고, 칸트와 헤겔의 철학이, 괴테와 실러의 예술이 그 현실을 정당화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각종 종교와 철학의 유파가 바람처럼 몰아쳤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쪽에 속해 싸웠다. 슈티르너는 그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데올로기란 사람이 스스로를 세계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허위의식의 체계다. 신, 국가, 정당, 조직, 기술, 가족, 노동, 사랑, 심지어 자유마저도 제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주체인 양 나타날 때 인간은 그 앞에 종속된다. 그러니 그가 비판한 것은 특정한 신앙이나 특정한 정치가 아니라, 무언가를 나보다 높은 자리에 두고 그 앞에 무릎 꿇는 태도 전부였다. 저자는 이 비판이 한 세기 반 뒤 푸코에게서 되살아난다고 본다. 슈티르너가 문제 삼은 내재화된 도덕적 감시가 푸코의 판옵티콘(panopticon)으로, 강압이 없는 상태를 자유라 부르지 않는 태도가 푸코의 권력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슈티르너는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았다. 왕을 무너뜨리는 혁명에 그치지 말고 법까지 무너뜨리라고 했고,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국가도 정부도 모두 권력이자 권위라며 거부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나키스트였다. 다만 저자는 아나키스트 중에서도 ‘유일자’라는 단서를 단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든 바쿠닌의 자유로운 결사든, 아나키즘 역시 인류와 인간성에 대한 충성 위에 서 있었다. 슈티르너에게는 자유도 평등도 정의도 유령이니 그 충성마저 의심의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저마다 홀로 서라고 주문한 것은 아니다. 고립은 인간의 본래 상태가 아니며 사회야말로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그는 보았다. 문제는 우리가 만든 사회가 우리를 앞서는 실체로 굳어버렸다는 데 있다. 그가 내놓은 대안이 ‘에고이스트 연합’이다. 각자의 고유함을 지키면서 필요에 따라 맺고 푸는 유동적인 결합이다. 「머리말」에 붙인 제목대로, “유일자가 연대하는 세상”이다. 눈은 없고 눈치만 있는 나라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삶 “한국인에게는 ‘눈’이 없고 ‘눈치’만 있다.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미래를 향하는 ‘눈’은 없고, 남이 어떻게 하는가를 살펴 그것을 따라 하는 ‘눈치’만 있다.” - 1장 「왜 지금 슈티르너인가」 저자가 이 낯선 사상가를 굳이 불러낸 까닭은 분명하다. 슈티르너가 비판한 것이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절실하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인 교육과 출세, 직장과 결혼과 노후. 모두가 같은 것을 좇아 평생을 경쟁으로 보내지만 성공은 1퍼센트에 못 미친다. 그런데도 실패한 99퍼센트는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매도되고, 그 구조가 다음 세대에서 반복된다. 스스로 자기 삶을 설계하는 아이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적응하기 어렵다. 유일자가 아니라 유사자(類似者)들이 무리 지어 사는 사회다. 저마다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같은 것을 원하도록 길러져 서로 닮아버린 사람들이다. 저자는 참된 근대화란 민주주의의 실천이며 민주주의란 결국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전체보다 개인이 먼저고, 그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맺는 관계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절반은 슈티르너를 다른 사상(가)들과 견주는 데 할애한다. 근대사상과 아나키즘, 현대사상과 동양사상이 차례로 불려 나온다. 권말에서 저자는 슈티르너가 붓다와 노자, 장자, 양주와 멀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사상이 유령을 쫓아내듯, 불교는 스스로 뒤집어쓴 무지의 장막에서 걸어 나오라고 권한다. 다만 불교와 도교가 유교에 억눌렸듯, 슈티르너 역시 서양에서 억압되었을 뿐이다. 모두가 유일자이기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다름을 인정하는 위에서만 함께 살 수 있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다양성의 삶, 저자가 이 책 끝에 남긴 요청이다. “어떤 차별도 없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 유일자로 함께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