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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2002년 6월『모렐의 발명The Invention of Morel』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7월 『모로 박사의 섬The Island of Dr. Moreau』 H. G. 웰스 8월 『킴Kim』 러드야드 키플링 9월 『무덤 저편의 회고록Memoirs from Beyond the Grave』 프랑스와-르네 드 샤토브리앙 10월 『네 사람의 서명The Sign of Four』 아서 코넌 도일 11월 『친화력Elective Affinities』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2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The Wind in the Willows』 케네스 그레이엄 2003년 1월 『돈키호테Don Quixote』 미겔 데 세르반테스 2월 『타르타르 스텝The Tartar Steppe』 디노 부차티 3월 『필로우북The Pillow Book』 세이 쇼나곤 4월 『떠오름Surfacing』 마거릿 애트우드 5월 『브라스 쿠바스의 유고 회고록The Posthumous Memoirs of Bras Cubas』 호아킴 마리아 마차도 데 아시스 찾아보기 |
Alberto Mang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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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치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것, 모든 권력은 악용된다는 것, 광신은 어떤 것이든 이성의 적이라는 것, 선동은 불의에 맞서는 힘을 규합할 목적이라도 여전히 선동이라는 것, 전쟁은 신이 더 막강한 군대의 편이라고 믿는 승자의 눈에만 영광으로 비친다는 것. 어쩌면 이게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암흑의 순간에 책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글로 확인하기 위해서 […] 비극적인 사건이 있고 며칠 후, 그날 아침 내내 세계무역센터 근처 책방에 갇혀 있었다는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사이렌과 비명이 들려오는 와중에 계속 책을 뒤적였다. 사토브리앙은 프랑스혁명의 혼란기에 파리에 막 도착한 브르타뉴 시인 한 명이 베르사유궁전 관람을 부탁했던 일화를 들려준다. “세상엔 이런 사람들도 있다.” 샤토브리앙은 말한다. “제국이 무너지는데, 그 옆에서 분수와 정원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 p.88~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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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시간에 진도를 따라가는 것과 혼자서, 그것도 나무 아래서 책을 읽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예를 들어, 보좌신부와 이발사가 더 이상의 미친 짓을 막기 위해 벽을 발라버리기로 한 돈키호테의 서재에 대해 레르네르 선생님이 꼼꼼하게 설명하시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혼자 읽었을 땐, 늙은 기사가 자다 말고 일어나 책을 찾으러 갔는데 그 방을 찾지 못하는 부분에서 거의 눈물을 쏟을 뻔했다. 내게 그건 악몽 그 자체였다. 잠에서 깨어 책을 보관했던 방이 사라졌음을 발견하곤 더 이상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에 휩싸이는 것. 그레고르 잠자는 변신을, 자아의 상실을 받아들인다. 돈키호테는 그러는 대신, 계속 돈키호테이기 위해 사악한 마법사가 서재를 사라지게 했다는 설명을 씩씩하게 받아들인다. 환상을 가정함으로써 그는 상상 속의 자아를 충실히 간직한다.
--- p.184~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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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나침반 삼아 삶을 여행한 한 해 동안의 기록
삶은 꼭 토요일 오후 세시와 닮아 자칫 혼곤하고 무기력할 수 있다. 망구엘은 오후 세시의 복판을 빼닮은 우리네 삶을 열망과 치열함으로 읽고 쓰기를 반복하며 성찰한다. 어느 날 그는 발견한다. 수천 개의 조각으로 나눠진 퍼즐이 서로의 귀퉁이에 기막히게 들어맞는 것처럼 무신경 속에 눈에 밟힌 책의 한 구절, 와글대는 신문의 낱글자 하나가 현재의 삶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순간들을 말이다. 이러한 지각과 함께 그는 부재와 무의미의 시간을 기록하기로 마음먹는다. 비로소 존재 너머에 침잠해 있던 시간들은 유의미한 것으로 재생된다. 『독서일기』는 2002년 6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꼬박 일년간의 기록물이다. 매달마다 한 권씩 총 열두 권의 책을 선택하여 일기 형식으로 책에 대한 사색과 삶의 성찰을 적었다. 뭇 일기란 것은 가장 사적인 기록물로서 글감은 무진하며 형식은 분방하여 일기는 그의 심상을 완전히 벗은 모습으로 드러낸다. 책 선정의 기준은 특별하지 않다. 10세기 기록물에서 20세기 동화까지, 작가란 호칭이 무색한 일본 헤이안 시대 궁녀 세이 쇼나곤의 기록물에서 칭찬에 인색한 니체로부터 “하나의 문명”이란 찬탄을 받았던 괴테의 소설, 비애에 잠긴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하는 아르헨티나의 비오이 카사레스의 작품까지 작가의 지명도와 작품의 장르 및 시기를 분별치 않고 다양하다. 기준이라면 열두 권의 책들이 맞춤한 듯 매 일상과 닮았다는 것. 까닭에 망구엘이 다시 읽기를 시도한 책들이다. 책을 손에 쥐고 일 년여 동안 그는 캘거리에서 뮌헨,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파리 그리고 런던까지 분주히 옮겨 다녔다. 누구보다 역동적인 일상 속에서 가족, 친구, 고향, 유년, 전쟁, 빈곤 등의 체험에 대해 그는 바지런히 사색한다. 『독서일기』는 열두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싹튼 생각과 성찰 외에도 여행에서 받은 인상들, 친구들 또는 공사를 망라한 여러 가지 일의 짧은 스케치를 담거나, 나름대로 선정한 ‘것’들의 목록을 담아 끊임없이 현장을 기록한다. 우리네 일상과 다를 바 없는 그의 일기는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의 내밀한 엿보기가 될 수 있다. 유쾌한 철학자의 시선으로 동시대를 감각하는 발랄한 재치 이 책의 뚜렷한 특성이자 개성은 ‘책을 소개하는 책’이 대개 그렇듯 흔한 줄거리 소개 및 단순한 인상 비평이 없다는 것이다. 망구엘은 “줄거리를 줄줄 읊거나, 용어를 해설하는” 일은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것은 단선적인 책 맛보기일 뿐더러, 책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게 지론이다. 하여 이 책은 열정적으로 책읽기에 몰입한 어느 독서가(알베르토 망구엘)의 내밀한 심상과 촘촘한 일상을 좇아가는 여정이 된다. 예리하며, 속도감 있는 일기란 장르를 통해 『독서일기』 외부의 독자들은 망구엘의 감각을 말 그대로 감각할 수 있다. 빈번한 행간 띄어쓰기는 지그시 멈춘 망구엘의 성찰과 사고의 순간이다. 책의 주인공을 말하고, 작가를 말하다가 문득 튀어 오른 일상의 닮은꼴을 발견했을 때 그는 행간에 멈춰 잠시 숨을 들이키며 단상과 판단을 유보한다. 책에서 건져 올린 삶의 지혜를 꿰뚫는 사려 깊은 철학가의 인상이 엿보인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소개하는 본문에서 그는 집의 의미를 되새기고, 수년 전 정착한 파리의 집이 책과 그가 묻힐 유일한 집임을 암시한다. 또한 망명자의 두고 온 집일 고국에 대해 사색한다. 그들에게 고국의 시간은 정지된 상태, 사람도 사물도 공기도 엷게라도 변하지 않은 진공 상태라고 말하며, 책에 대한 인상과 맞물려 집의 의미를 기록한다. 마침 미국의 9?11 테러로 인한 보복의 조짐이 확산될 무렵 그는 4세기 전 행동하는 정의(물론 늘 실수와 오해를 불러일으킨) 『돈키호테』를 다시 읽기 시작한다. 들뜬 광기와 마비된 이성으로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은 미국의 폭력을 경계하며, 엉거주춤 뒤로 물러선 간 곳 없는 정의와 이성을 불우한 필체로 신랄하게 비난하고 탄식한다. 덧붙여 지난 세기의 사상가과 작가 또 다른 작품들 속에서 현 시대를 관찰하고, 반성한다. 경제공황을 맞고, 정치혼란을 겪는 그의 태생지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작가의 『모렐의 기억』에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행복해야만 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생’을 공감하고, 유년 시절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회귀해 추억한다. 동시대와 동시대인을 꿰뚫어보는 그의 일기는 현자의 단정한 사색이 담겨 있다. 그의 글은 발랄하다. 선명하게 또한 빠르게 속기되는 그의 일상은 천천하고 편안하며 감각적인 행위인 ‘책읽기’란 주제와 서로 스며들어 순도 높은 고백체의 문장을 갖는다. 그러나 결코 자기반성에 도취되지 않고 잰걸음으로 일상을 좇고 날선 젊은 감각의 문체와 상상력이 즐겁고 경쾌하다. 아주 내밀한 공간에서 그는 개개의 독자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영구히 시간의 터널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재치 있는 줄글을 적은 것이다. 무한 기억을 담고 있는 뇌는 길게 늘어선 두루마리 책에 비유된다. 그는 『독서일기』를 통해 책을 읽고, 생각하며, 닿지 못하여 외면한 삶들을 관찰하고, 깨닫는 품새를 전해준다. 즐겁게 적어내린 ‘독서일기’. 누구나 삶과 꼭 닮은 책들을 손에 쥐고 삶의 퍼즐을 맞히는 기막힌 즐거움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감각하게 해주는 망구엘은 단연 세계 최고의 열정적이고, 명민한 독서가임에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