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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상실은 추상 속에만 존재하지 않고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속에 갇힌 느낌 절인 청어 숨겼기에 더 잘 보이는 것 시력 용기를 낼 용기 진짜 삶 두 개의 세계 워시 타워 고양이 별 세속적이다 하지만 아름답구나 2장. 힘이 빠져도 멈추지 않으니 감각해석능력 진짜 나무 유일한 행성 미식가의 길 트라우마 시시포스 베를린의 천사 시차 적응 쓸쓸하지만 씩씩하게 용기와 연습 성장과 낭비 유머 감각을 잃지 마 3장. 춤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진정한 낙관주의자 속임수 고통의 이유 얼굴 괄호 없애기 여전히 거기에 있는 것들 동생의 결혼식 번아웃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은 그래도 여전히 빵이다 |
손보미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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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연애와 헤어짐, 인간관계의 괴로움 그리고 내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어쩐지 삶을 살아간다는 건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계속 잃고 훼손시키기만 하는 과정이리라는 생각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한마디로 나는 삶이란 계속 상실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p.38 「시력」 중에서 나를 견딜 수 없이 슬프게 한 건, 그가 우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마음 놓고 울게 되면 과거의 침입에 속절없이 당하게 될까봐, 겁이 나서. 어쩌면, 제대로 울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p.45 「용기를 낼 용기」 중에서 나는 궁금해졌다. 그게 과연 이득일까? 기쁨을 느끼는 대신 고통도 느끼게 되는 삶과, 고통을 느끼지 않는 대신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삶. 그 둘 중 무엇이 더 이득일까? ---p.48 「진짜 삶」 중에서 우리 고로가 영원히 죽지 않는 세계. 그 세계에서 나는 고로를 얼마큼 사랑할 수 있을까? 죽음이 멈추면 사랑도 멈추게 될까? 사랑에는 대가가 필요하고, 행복한 만큼 슬퍼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기 싫다. (중략)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내 슬픔은 끝도 없이 작동하고 있다. ---p.59 「워시 타워」 중에서 때때로 울음을 좀 터뜨리면 어떤가? 때때로 좀 쓸쓸 해지고 슬퍼지면 어떤가? 내 주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 몰라주면 좀 어떠한가? 외톨이면 또 어떤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의 녹색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내 인생에 불쑥 나타나서 손을 흔들어줄 텐데. 그런 순간이 언젠가 두 번쯤은 또 올 텐데. ---pp.129~130 「쓸쓸하지만 씩씩하게」 중에서 그는 결국엔 엉망진창이 되어서 춤을 멈추게 될지라도, 다시 추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해 썼다. 파탄밖에 남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래서 두려움에 몸서리치게 되더라도 다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대해 썼다. ---p.152 「진정한 낙관주의자」 중에서 많은 것들을 자세히 보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다는, 무언가를 인식하는 데에 솔직하고 정직하지 못했다는, ‘다르게’ 보기 위해서는 ‘깊게’ 보아야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그런 생각. ---p.179 「괄호 없애기」 중에서 때때로 우리의 삶, 혹은 세계를 굴러가게 만드는 삶의 형식 중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같은 결말이 예상된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릴 수 있는 선택들이 있다. ---p.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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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에 대한 묵은 오해를 넘어
진정한 낙관주의자로 거듭나기 위해 ‘낙관’의 사전적 정의는 ‘인생이나 사물을 밝고 희망적인 것으로 봄’이다. 흔히 사람들은 낙관을 절망에 눈 감고 무조건 밝은 면만 바라보는 태도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손보미 작가는 낙관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누구보다 예민하게 삶의 어둠과 결핍을 감지하는 사람이다. 반려묘의 투병 앞에서 막연한 안도에 기대기보다 병세를 냉정하게 살피고, 혼란스러운 사회적 참상과 정치적 파동 앞에서도 피로감을 핑계 삼아 외면하지 않은 채 더 깊이 진실을 응시한다. 예전에는 지금 일어나는 일의 밝은 면만 볼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을 낙관주의자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진정한 낙관주의자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행과 결핍과 고통을 똑똑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 이상을 꿈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_본문에서 그의 낙관은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고서야 비로소 작동한다. 절망과 무력감에 빠졌을 때조차 작가는 다시 몸을 일으킨다. 반려묘를 떠나보낸 후 역설적으로 그 슬픔이 서로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기적 같은 증거임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곤 맛있는 크루아상을 찾아 부지런히 빵집 순례를 하고,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서툰 몸으로 수영장의 물살을 가른다. 삶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것. 작가가 말하는 진정한 낙관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는 결국엔 엉망진창이 되어서 춤을 멈추게 될지라도, 다시 추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해 썼다. 파탄밖에 남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래서 두려움에 몸서리치게 되더라도 다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대해 썼다. _본문에서 소설가는 무엇으로 쓰는가 보고 읽고 들은 것들이 문장이 되기까지 손보미 작가는 이야기를 보고 읽는 일을 오래도록 사랑해온 사람이다. 이 산문집에도 그 취향이 곳곳에 배어 곳곳에서 영화와 책 이야기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는 그것들을 자기 삶의 장면과 나란히 놓는다.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에서는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기 어려워했던 인물이 만든 ‘포옹 기계’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마땅히 품어야 할 온기를 이야기하고,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속 서툰 손으로 구워낸 프렌치토스트 한 접시를 떠올리며 부서진 삶마저도 끝내 긍정하는 마음을 깨닫는다. “조각이 나든 아니든 맛은 똑같아. 빵은 빵이란다.” 나는 어쩐지 이 말이 마음에 든다. 무언가 인생의 진리가 들어 있다고 느낀다. 잘리든 안 잘리든 빵은 빵이다. 원한 적 없는 상실과 마주해야 할 때, 누군가에게 모진 말로 상처를 주거나 받았을 때, 어떤 관계에 완전하게 실패한 기분이 들 때, 어쩐지 “빵은 빵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면 엄청 안심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삶은 삶이다. 빵은 빵이다. _본문에서 소설가가 평소 무엇을 보고 읽으며 시간을 통과하는지, 그 방대한 경험이 얼마나 진실한 문장으로 거듭나는지를 엿보는 일은 『유머 감각을 잃지 마』가 건네는 또 다른 매력이다. 작가는 이십대 시절,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블로그에 적으며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 짓곤 했다. 이번 산문집에서 영화와 책이 일상의 사건들과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것 역시 오랜 습관의 아름다운 연장선이다. 성실하게 보고 읽어온 사람의 시선 안에서 평범한 일상은 여러 겹의 이야기로 되살아나고, 독자들은 그 다정한 겹을 따라 걷다 문득 잊고 지낸 각자의 기억과 문장들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