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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그들은 늘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면서 그곳은 좋은 곳이라고 했다 끌려가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그곳은 이미 좋은 곳일 기회를 박탈당했는데도 그곳이 정말 좋은 곳인지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상실했는데도 그 시간 그 공간에 나의 몸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나를 위한 자리가 비워져 있다고 말했다 너는 그 자리를 반드시 지켜야 해 「건강해질 수 없을 것 같아」(1월 10일·2009) 부분 웃기지 않아? 대통령보다 누군갈 더 좋아하는 건 너무 쉬운 일 같은데…… (...) 그런데 또 이상하게 대통령이라는 말 때문에 대단한 고백처럼 들리기도 해 대통령은 수면 내시경 못 하는 거 알아? 국가 원수잖아 얼마나 국가랑 원수 졌음 수면 내시경도 못 하게 하냐…… 「대통령보다 형이 더 좋아요」(6월 1일·2011) 부분 사랑받는 일의 중대한 위험성에 대해 다루는 책을 읽었다 책의 초입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이 책에 있는 내용을 외부로 공유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권고하고 있다 책을 읽는 일이 마치 사랑받는 일처럼 느껴졌다 「사랑받기」(7월 8일·2018) 부분 사랑이 이긴다는 구호는 너무 크고 두툼하다 잠깐 들어 올려(무거워서 잘 안 들림) 그 아래 납작하게 깔려 있던 것들을 봐 「사랑하기」(7월 15일·2024) 부분 시각을 적는 순간 시간은 감. 이로써 완전히 시간과 엇갈리게 됨. 엇갈리는 것으로 시간과 관계 맺기. 「시각 적기」(7월 31일·2012) 부분 모두 다 같은 것을 보고 있다. 세상에 딱 한 줄기의 빛만 남은 것처럼 「천막에는 천막사의 이름이」(8월 7일·2026) 부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짓은 무엇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은둔자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편지를 보내는 것은 은둔을 방해하는 행위다 은둔자는 편지를 읽음으로써 세상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은둔자를 사랑한다는 건 은둔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편지」(11월 14일·2025) 부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일이 몇 가지 생겼어. 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일보다는 조금 덜 멋져. 「일기에게」(11월 22일·2025)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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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아래 가려진 것들
그 곁에 놓여야 할 ‘등등’ 사랑은 인기 있는 단어다. 그렇다면 내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백 번 말해도 사람들은 귀 기울여줄까? 백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해도 도망가지 않아줄까? -「작업 노트」에서 집필 초기 시인은 사랑에 다다르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캠코더 앞에 세워놓고 물었다. “날 사랑해?” 이 ‘사랑 갈취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거듭 사랑을 고심한 끝에 시인은 결국 지쳐버리고 만다. “사랑 생각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아”(「작업 노트」, 144쪽). 시집 속 화자 역시 사랑에 질려 있는 듯하다. 그는 “사랑 말고 다른 얘기는 없나?” 묻고 “사랑을 금지”(「사랑혐오」)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사랑’이란 단어가 2백 번 넘게 등장하는 이 시집에는 그 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큼 여전히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 지치도록 사랑을 말하고 탐색하는 작업을 통해 배시은은 ‘대문자 사랑’을 정돈하는 과정에서 잉여로 취급돼 사라져야 했던 ‘등등’을 돌이켜본다. 시간과 장소가 (그리고 사랑이) 뒤섞인 이 시집에서 한 가지 더 주요한 지점은 다수가 만든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태도, ‘선택’이다. 「건강해질 수 없을 것 같아」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판단한 ‘좋은 곳’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자신을 위한다는 이들에게 끌려다니며 ‘나’는 무엇이 좋은지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잃는다. 좋은 것을 주려는 마음, (또다시) ‘사랑’ 아래 자행되는 강요 속에서 “나는 마침내 사랑으로 정돈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러기로 선택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내 사랑의 뜻을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시집에서 ‘사랑’은 일기나 메모 같은 일상적 텍스트 사이에서 불쑥 등장하는데, 사랑을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일상은 각자의 사정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목의 ‘등등’은 “사랑과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지만 사랑을 말하는 동안 곁에 있게 된 것들”이며 “사랑으로 정돈되지 않는 것들이 머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페이건드라카, 「발문|사랑해요, 그러니까 딴 얘기해요」). 『사랑 등등』은 사랑에 관한 생각이 다른 이야기를 모두 대신하도록 두지 않는다. 이 시집의 ‘다른 이야기’는 사랑에 도달하면 치워도 되는 곁가지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 관한 말을 잠시 멈추게 하고, 그 말 아래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을 만나게 한다. “사랑을 사랑이라는 단어에 가두지 않는 반칙”(「생각하기」)을 궁리한 끝에 배시은은 그렇게 사랑 곁을 계속 넓혀간다. 사랑 다음에 오는 것들 엇갈리는 시간과 관계 맺기 ‘등등’을 되짚는 일은 기록을 어떤 순서로 읽을 것인지와도 맞닿아 있다. 기록을 쓰인 순서대로 모으면 시작과 변화와 끝을 관통하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연대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해석이다. 그것은 흩어진 말들을 한 가지 의미로 모으는 일, 곧 앞서 시인이 피하려 했던 ‘정돈’과 다르지 않다. “복원으로 그의 삶은 얼마나 훼손되었을까?”(「작업 노트」, 143쪽) 고민에 다다른 시인은 기록에서 의미 도출하기를 멈춘다. 결론 짓기보다 과정 자체를 보여주기로 한다. 뭉뚱그리고 비약하여 우리가 하나의 또렷한 의미를 뽑아내기 전에, 한 사람의 경험을 사랑에 관한 비유로 섣불리 처리해버리기 전에. 『사랑 등등』이 연대순 대신 월일순을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8년부터 2030년까지의 기록은 쓰인 해가 아니라 날짜에 따라 놓인다. 2006년 1월 1일의 기록 뒤에 2029년과 2023년의 1월이 이어지고, 마지막 기록은 2003년 12월 29일이다. 차례에는 날짜만 적히고 제목은 본문에서야 나타난다. 달력은 누구나 쓰는 익숙한 시간 박제 형식이다. 가장 익숙한 말을 의심하며 출발한 시집은 시간을 다룰 때에도 무엇보다 익숙한 형식을 골라 그 안을 어긋나게 만든다. 그렇다면 기록이 시간을 붙잡을 수 있을까? 더 정확한 시각을 적으려 하지만 적는 동안에도 시간은 지나간다. 그럼에도 적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시각 적기」). 믿지 못하면서 계속 사랑을 말하는 태도가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시각을 적는 태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 그리고 사랑을 말하는 일은 나에게 가장 막막한 일이었고 사랑을 한참 떠벌린 뒤에도 여전히 막막하다. -「작업 노트」에서 『사랑 등등』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결론을 앞세우는 대신 추적하고 복원하는 사이 마주친 모순들을 지우지 않은 채 세계를 넓혀가면서, 사랑을 말하는 동안 그 말 바깥으로 밀려났던 것들을 되돌려놓을 뿐이다. 달력이 그렇듯 마지막 장 다음에는 다시 1월이 올 것이다. 고민은 끝나지 않고 사랑은 여전히 막막하지만 시인은 떠오르는 의심들을 부둥켜안고 계속 쓸 것만 같다. 이 목록을 받아 든 독자는 무심하게 넘겨왔던 나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믿지 않으면서. “믿기지 않는 것들을 모아다가 믿기지 않는다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마를 쓰다듬어주”면서(「율법」). 그러니 이 시집 안에서 “믿음의 반대말은 사랑이다”(「작업 노트」, 14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