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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_7
톱니바퀴_131 어느 바보의 일생_193 오랜 벗에게 띄우는 편지_235 해설_24 |
Ryuunosuke Akutagawa,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芥川 龍之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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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사상도, 문예의 틀 안에 들어온 작품인 이상, 반드시 시적 정신의 정화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문예에 이르는 그 신성한 불을 어떻게 지피느냐 하는 데 있다. 어쩌면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지, 정진하는 힘 같은 건 생각보다 별 효과가 없다. 그러나 정화하려는 열정의 많고 적음은, 작품의 격이 높고 낮음을 결정한다. 시적 정신은 문예의 가치와 직결된다.
--- p.39 사람들의 ‘생활상이 묻어난 시’를 읊으려면,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본 사람이 나와야 한다. 만약 그게 안 되면, 생활자 옆에서 그들을 쭉 지켜본 사람이 나타나거나. 공산주의나 아나키즘 사상을 작품에 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작품 속으로 석탄처럼 감은빛을 띠는 시적 장엄함을 불러들일 수 있는 건 오직 프롤레타리아 정신뿐이다. 요절한 필리프는 이런 영혼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 p.78 모든 예술은 그것이 예술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정열을(실제로 무언가 행하려는 우리의 정열을) 잠재우고 만다. 그 힘에 지배당하는 순간, 마르스의 자손이 되기는 글렀다고 봐야 한다. 그곳에 안주하는 자는 — 순수하고 무결한 예술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바보들까지 모두 행복해진다. 하지만 하이네는 사람들을 돌보느라 항상 변하지 않는 광명의 세계, 상적광토의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심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 p.128-129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나를 노린다. 일순간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그런 데다 반투명 톱니바퀴까지 하나둘씩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직감한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목을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그러는 사이 눈앞 톱니바퀴는 그 수가 늘더니, 급기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 p.189-190 「어느 바보의 일생」을 다 쓰고 난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어느 고물상에 박제된 백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백조는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있었지만, 어느새 노래진 날개까지 온통 벌레가 먹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마치 자신의 일생을 보는 것 같아 눈물과 쓴웃음으로 가슴이 미어져왔다. 지금 그 앞에 놓인 길은 발광 아니면 자살뿐이었다. 그는 홀로 해 지는 거리를 걸으며, 그를 멸하러 오는 운명을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 p.230-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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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간혹 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했다. 그러고 나서 눈을 감았다 뜨면,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반투명한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점차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 재미있어서, 다시 해를 쳐다보고는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고는 했다. 어느 순간에는 눈을 감아도 눈꺼풀 안에서 반짝이며 사라질 줄 모르는 그 반투명한 잔상이 꼭 해의 그림자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해를 너무 오래 쳐다본 나머지, 그 잔상이 유독 크고 오래 남았던 적이 있었다. 한참 시야에 머무르는 그 잔상을 보며, 장난을 치다 눈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모르다가, 어느새 사라진 잔상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 잔상이 사라지지 않은 채 계속 남았더라면, 또는 해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생겨나 한참을 머무르다가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했더라면, 그 불안함과 두려움은 마음속에 그림자를 드리웠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잔상에 시달렸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갑작스레 시야에 나타나 한참을 머물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반투명한 톱니바퀴를 마주해야 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점차 수를 늘려 가며 시야의 절반가량을 가리다가 끝내 사라진 뒤에는 어김없이 두통이 찾아오는.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톱니바퀴」의 화자가 한 체험이지만, 아마 거기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자신의 체험이 짙게 배어 있었을 것이다. 「톱니바퀴」의 이야기가 ‘어느 바보의 일생’과 흡사하다는 것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시달리던 편두통의 전조 증상 중 하나가 섬광암점이라는 사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잔상에 시달리는 사람이 평범하게 살기란 분명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를 괴롭힌 것이 그 잔상만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여러 고통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음을 택했다. 그것이 마치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가에게 주어진 비극적인 운명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는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의 미학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구조적 미관’보다는 시적 정신을 부르짖었던 그는, 그러나 자신이 지은 소설에도 거의 다 ‘이야기’가 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적 정신을 담고자 한 그의 시도가 실패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안에는 분명 시적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문제는 아마 뛰어난 재주 탓에, 시적 정신을 표현하면서도 구조적 미관까지 담아내고 마는 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는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만 쓸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말이다. 「톱니바퀴」라는 소설은 그 점에서 특징적이다. 언뜻 ‘이야기’가 없는 소설인 듯하다가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를 이뤄 버리는 것이 그를 괴롭히던 톱니바퀴 같기도 하다. 어쩌면 그가 시달리던 톱니바퀴는 시적 정신을 좇으면서도 ‘이야기’의 구속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또는 냉혹한 사회구조 속에서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어야 했던, 그 자신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커트 보니것은 1969년 『시카고 트리뷴』에 실린 글에서 예술의 역할을 ‘탄광 속 카나리아’ 이론으로 설명한 바 있다. 탄광 속 카나리아는 탄광에 일산화탄소가 누출되면 그것을 광부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데, 예술가란 무릇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해, 예술가들은 시적 정신으로써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곤 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주로 활동했던 시기는 우리에게 ‘다이쇼 로망’이라는 말로 유명한 다이쇼 시대였다. 그러나 ‘로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 시대의 이면에서는 새로운 억압과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다이쇼 시대가 저물고 쇼와 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억압과 불안의 그림자는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본 반투명 톱니바퀴는 다이쇼라는 이름의 일산화탄소였을지 모른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그 애석한 카나리아의 마지막 지저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