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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다운 밥을 먹었다는 감각
불확실성과 애매함으로 점철된 집밥의 세계가 나를 키웠다 그 서랍을 비울 것이다 모든 부엌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까짓 밥, 겨우 밥 --연경과 유경의 짧은 대화 양배추 참치 덮밥과 마음의 안정 집슐랭 원 스타 --전골, 솥밥, 덮밥, 차밥 더 많이 끓이면 더 맛있다 실패해도 어쩔 수 없는 몇몇 야심들 --집에서 모일 때 톨스토이와 닭고기 미역국과 부엌에 있는 사람 이상한 잡식동물의 우주 가능하면 많은 날들의 밥상이 결국 밥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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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토르트 식품의 발전 덕분에 나는 무사히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외식 산업의 발전 덕도 중간중간 보았고, 때때로 배달 노동자들의 노고에 기대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생기자 나는 곧장 집밥으로 돌아왔다. ---p.13
이론적으로 나는 김치를 담글 줄 안다. 엄마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추는 몇 포기를 절여야 하고 고춧가루와 젓갈 등은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다. 그냥… 그냥 적당히 넣다 보면 적당한 상태가 된다. ---p.18 집에 있는 재료로 어떻게든 요리를 하려고 기를 쓰면서 ‘이런 음식도 있을까?’라고 검색하면 아주 높은 확률로 이미 해 먹어본 사람이 있다.(20 이 ‘연근 돼지고기 완자 배추탕’은 운이 좋았다.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부활할 수 있었으니까.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먹지, 뭐.” 이 말은 가끔 작은 재앙을 불러온다.(...) 냉장고의 저온은 언제까지나 부패를 막아줄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건 그냥 내 희망 사항일 뿐이다. 시간 앞에서 멀쩡한 놈은 없다. ---pp.29-30 “냉장고 없애면 매일 장을 봐서 신선한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다고요? 그 장 누가 봅니까?” ---p.32 사과씨 후벼 파내는 도구는 1년에 한 번 사용할까 말까 하지만 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두유 제조기는 한동안 정말 자주 써먹었는데 이제는 시큰둥해져서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로 구석에 방치된 신세다(하지만 두유를 다시 만들어 먹을 것이라고 계속 다짐하고 있다). 이 와중에 나는 단단한 아이스크림도 부드럽게 떠낼 수 있다는 아이스크림 스쿱을 탐내고 있다. ---p.44 유경은 남편 일로 한국 식품점에 가려면 차를 갖고 세 시간 반은 나가야 하는 미국의 어느 지역에 1년간 살았다. (...) 도시락 싸기가 힘들어서 “한국 급식 사랑해요, 한국 최고”라고 울부짖은 전력이 있다. (…) 유경: 좀 사 먹고 싶다, 나도. 연경: 배달 시킬 수 있는 메뉴도 제한적이겠네. 유경: 그래서 하던 거 먹던 거 돌려막기야. 큰애가 “왜 맨날 똑같은 거 먹는 것 같지?”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똑같은 거 돌려 먹는 중. ---pp.55-56 나도 내가 산뜻하고 부지런하고 건강하고, 뭐 그런 훌륭하고도 모범적인 사람이면 좋겠다. 언제나 건강한 식단을 손수 만들어 먹는 것에 주저함이 없고 매일 맛있는 것을 해 먹은 후 잘 정리된 주방을 상쾌한 기분으로 나설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음식을 만들기는 귀찮고, 배달 음식을 먹은 후의 불만족스러움도 싫다. ---p.64 대파를 적당히 송송 썬다. 동그랗게 썰어야 하나 어슷어슷 썰어야 하나? 내키는 대로 하자. 양배추를 너무 작게 썰었나? 아니면 너무 두껍나? 상관없다. 어차피 불에 익히면 큰 차이 없다. 양파도 넣어야 하는 게 아닐까? 괜찮다. 냉장고에서 꺼내와서 까기가 너무 귀찮다. 대파면 충분하다. ---p.65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 되려는 야망은 없다. 그래도 하루에 최소 한 시간은 나에게 밥을 해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바람이 있다. ---p.70 두 명이 한 끼에 깨끗하게 먹어 치울 수 있도록 음식을 해보려고 했다. 시도는 종종 한다. 그런데 2인분의 음식을 만들자면 뭐랄까, 속이 답답하다. 애호박을 4분의 1개, 팽이버섯 반 봉지, 양파 4분의 1개, 아주 작은 감자 한 알만 썰어 넣고 된장찌개를 끓이려다 보면 이상하게 음식이 쪼잔하고 맛없어 보이는 기분이 든다. ---pp.92-93 그러니까 아마도, 이 밥상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도 상관없는지 모른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밥상이 열린 세계인지 닫힌 세계인지의 문제다. ---p....) 내가 어떤 음식을 하든, 결과물이 맛있든 맛없든, 나는 가능하면 많은 날들의 밥상이 다른 이들과 이어지는 열린 세계였으면 한다. ---p.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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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를 넣은 김치찌개에는 사연이 있다
유익함도 노동도 아닌, 한 사람으로부터 펼쳐지는 집밥의 장면들 집에서 해 먹는 밥은 집 밖 음식보다는 건강하다. 주머니 사정에도 도움이 된다. “배달 음식을 자꾸 시켜 먹으면 돈이 술술 빠져나간다.” 동시에 집밥은 지난한 과정이다. 먹고 싶은 “메뉴를 생각하고 집에 있는 재료와 없는 재료”를 따져봐야 한다. 메뉴 선정부터 “장보기, 재료 손질, 본격 조리, 남은 음식 처리, 설거지,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가 한 세트다. 그렇기에 저자는 집밥을 자주 해 먹고 늘 필요로 하면서도 집밥이 요하는 에너지가 종종 버겁다. “나를 사랑해서 따끈한 된장찌개를 먹이고 싶지만, 역시나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거실에 드러누워 있으라고 내버려두고도 싶다.” 집밥은 좋지만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라서 그는 집밥을 두고 자주 갈등한다. 다만 그 기로에서 집밥의 이로움을 내세워 집밥의 고됨을 지우려고 하지 않고, 반대로 집밥의 고됨을 부각하며 집밥의 이로움을 폄하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한 사람이 집밥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장면에 초점을 맞춘다. 누군가 필요한 재료를 전부 갖추지 못해서 김치찌개에 고구마를 넣어볼까 망설인다면, 음식의 표준이나 레시피 지키기는 무시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를 구분해 들여놓은 이가 있다면 그만의 사사로운 사정을 헤아려본다. 번거로워도 집밥을 차려 먹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 자신 안에 번지는 따뜻함을 설명하기로 시도한다. “때로는 고통스러워하면서, 때로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때로는 구구절절 한참을 풀어내야 할 만큼 복잡한 마음을 지닌 채” 시장과 부엌, 식탁을 오가며 집밥을 해 먹는 생생한 하루하루를 들여다본다. 밥을 먹는 일, 의미로 배불리는 일, 마음이 채워지는 일 매번 의식하지는 않더라도 집밥은 맥락에 놓이고 한 끼니 그 이상이 되고는 한다. 저자가 그저 때우듯이 먹은 레토르트 식품은 논문으로 씨름하던 시절과 겹쳐 있다. 그때 그는 이상하게 서글펐다.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집밥이라 해도 그 안에는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한편으로 집밥에서는 사사로운 변칙들이 허용된다. 바깥 음식과 달리 집밥은 마진을 남기지 않아도 무방하고 맛이 일관되지 않아도 문제될 게 없으며 별점이 휘두르는 평가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밥은 한 사람의 시간과 연결되어 지나온 날의 또 다른 말로 남는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불확실함과 애매함으로 점철”된 것이기에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펼쳐진다. 어제와 오늘, 앞으로 만들어 먹을 무수한 집밥은 단지 음식에 그치지 않고 그 순간과 포개어지면서도 저마다의 뜻을 남긴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집밥이란 세계는 넓어지고 또 깊어진다. “우리는 언제나 음식과 의미를 함께 먹고 있다고 생각한다. 먼 길을 다녀와서 뜨거운 국물 한 숟갈을 뜨며 집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는 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다음에 데려오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는 때. 우울한 마음을 음식으로 달래는 날이나 새로운 음식을 먹고 놀라움에 눈이 동그래지는 순간들. 음식은 또렷하게 “자, 이 김치찌개는 이런 의미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은은하고 흐릿하게 우리에게 스며든다.”(13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