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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사주
인생이 언제 안 힘든 적 있었나
제철소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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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장 사주를 읽다
다 생일이야
생년월일을 알려주시오
사주는 과학?

2장 나를 읽다
바보일주
세계의 달력, 그 안의 시간들
우울에도 무늬가 있다
기가 약하다고요?
편으로 살아남기, 정으로 살아가기

3장 관계를 읽다
당신은 내게 어떤 계절이었나
젠더냐 사주냐
아낌없이 쓰는 나무
빌려 쓰는 이름들

4장 다시 사주를 읽다
삼재, 내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
이런 점집은 가지 마세요
사주에서 안 좋은 말을 들었을 때

부록 1. 사주 Q&A
부록 2. 정홍칼리의 오행 상상 지도

저자 소개 1

정홍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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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이름보다 사주로 기억하는 게 편한, 글 쓰는 무당. 나무, 불, 흙, 금, 물의 기운으로 당신을 기억한다. 소외된 존재를 소외되게 두지 않는 치열한 공부와 실천, 조심스러운 해석이 운명학이라 믿는다.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8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160쪽 | 110*178*20mm
ISBN13
9791188343966

책 속으로

사주가 보여주는 계절은 누군가에 대한 뚜렷한 인상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계도 요구한다. 누군가를 기호로 환원하게 되면 정작 그의 지금 마음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움직이는 영상으로 기억하려고 애쓴다. 생년월일을 읽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침묵을 듣는다. 사주는 그다음이다.
---p.19

사주도, 신점도 미신이라는 시선은 여전하다. 나는 그것들이 미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고 싶다. 미신이면 어때서? 문제는 미신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무엇을 미신 취급하고 무엇을 상식이라 부르느냐가 아닐까. 점집을 찾는 여성을 한심하게 보는 시선과 여성이 소설을 읽으면 현실감각을 잃는다고 믿던 시선은 같은 자리에서 나온다. 점을 본다는 건 우주의 중심에 자신의 감각과 질문을 두는 일인데.
---p.25

“남자 사주인데 여자로 태어났네. 성질 죽여야겠다.” 다짜고짜 반말인 건 그렇다 치자. 그의 다음 말은 이랬다. “이혼도 세 번 하겠네.” 나는 결혼할 생각도 없는데. 나무의 양기는 남성성으로만 해석됐다. 나무의 질감이나 내음은 없었다. 학교에서, 정신과에서, 미디어에서 듣던 말들이 이어졌다. 그날 내가 들은 것은 사주의 언어가 아니라 익숙한 편견의 언어였다.
---pp.36-37

내가 보는 달력은 다섯 개다. 그레고리력, 만세력, 음력, 마야력, 생태다양성 달력. 어떤 이는 묻는다. 무당이라서 그렇게까지 보는 거냐고.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는 특별한 달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여러 개였던 시간을 다시 꺼내 쓰고 있을 뿐이니까. 세계에는 하나의 시간표만 있지 않았다. 달의 시간, 해의 시간, 계절의 시간, 물때 시간, 박쥐의 시간. 사주도 그중 하나다.
---p.49

돌이켜보면, 인생이 언제 안 힘든 적 있었나. 맞다, 끼워 맞추기라면 끼워 맞추기지. 하지만 슬픔의 패턴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사주는 계절의 언어로 지난 삶을 위로해주었다. 아, 이때는 그런 때였구나. 지나온 삶의 모든 장면을 안아줄 수 있었다. 거기 두고 온 넋들을 이곳에 데려오는 느낌이었다.
---p.61

사주에서 정과 편은 중요한 방향감각이다. 정은 정면으로 들어오는 빛이고 편은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이다. 같은 빛인데 각도가 다르다. 정으로 사는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온다. 편으로 사는 사람은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도착해서 동네를 혼자 돌아다닌다. 정은 발레처럼 박자를 맞추고, 편은 힙합처럼 박자를 비튼다. 둘 다 춤인데, 리듬을 타는 방식이 다르다.
---p.76

어떤 관계는 깎아내고, 어떤 관계는 뿌리를 내리게 한다. 그렇게 겹쳐진 계절들 위에 내가 서 있다. 나도 누군가의 봄이었을 테고, 누군가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그 계절을 가늠하는 동안,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다.
---p.99

사주는 몸이 기억하는 계절이다. 젠더는 문명이 수천 년 동안 짜놓은 계절표다. 사주보다 오래됐고, 훨씬 촘촘하다. 그 계절표는 성별을 구분하는 초음파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다. 분홍을 입을지 파랑을 입을지, 인형을 줄지 축구공을 줄지, 언제 울고 언제 웃어야 하는지 정해져 있다. 봄에 누가 밥을 하고 겨울에 누가 바벨을 들고 누가 이불을 빠는지도. 사주보다 먼저 새겨진 계절표. 나는 사주가 그것보다 깊다고 믿고 싶었는데, 젠더는 계절이 뻗어나갈 방향을 이미 짜놓은 각본이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p.106

나무인 나는 내 몸이 통과한 이야기를 마구 쓴다. 이런 글에는 다음과 같은 반응도 따라온다. ‘상처를 전시하며 관심 받으려는 노출증 환자.’ 나대는 여성을 겨냥하는 오래된 돌멩이. 나대지 말라는 뜻이다. 근데 나대는 게 갑목의 본능인 걸 어쩌지. 아무리 돌멩이를 던져도 나무는 뻗어나간다. 어쩔 수 없다. ‘빤쓰를 내리고’ 쓴다. 나무는 뿌리로 다른 나무에게 신호를 보낸다. 같은 고통이 번지기 전에 먼저 알리는 신호, 동시에 나 좀 살려달라는 신호. 나도 그렇게 쓰고 나야 잠이 온다.
---p.119

몇 해 전, 동물해방물결이 주최한 동물행진에서 동물 위령굿이 열렸다. 열두 동물을 위한 굿상을 준비했다. 이름만 빌려 써왔던 그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굿상을 준비하며 열두 동물이 먹는 음식을 하나씩 찾아보았다. 쥐가 좋아하는 음식을 검색하면 쥐약이 나왔고, 물살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검색하면 낚시 미끼 정보가 떴다. 화면 앞에서 오래 멈췄다. 먹는 음식을 물었는데 돌아온 답은 죽이는 법이었다. 그 존재에 대해 아는 거라곤 ‘없애는 법’뿐인 사이. 인간 동물이 비인간 동물에게 그어온 선이었다.
---p.123

점집에 다녀온 뒤 귀신이 붙은 듯 찝찝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귀신 탓이 아니다. 돈까지 내고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는 다 안다’는 식의 태도를 느껴서다. 신령이나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례함.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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