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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메모주의자
메모해둘걸 ____ 8 비메모주의자의 고통 ____ 18 나는 왜 메모주의자가 되었나 ____ 30 메모에 관한 열 가지 믿음 ____ 40 메모는 나를 속인 적이 없다 ____ 56 메모의 부화 ____ 66 2부 나의 메모 10월 6일, 김소연과 오소리의 날____ 74 제기랄, 나도 꿈이 있었으면 좋겠다 ____ 86 한 사람의 어떤 노력도 중요하지 않은 세상 ____ 100 지금 어디선가 고래 한 마리가 숨을 쉬고 있다 ____ 110 말과 몸 ____ 116 꼽추의 일몰 ____ 130 나는 당신을 위해서 메모합니다 ____ 144 에필로그 ____ 1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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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메모의 화신이었던 때가 있다. 취업 준비를 앞둔 시점이었다. 갑자기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고 결심했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게 하필이면 서점 계단이었다. 그날 나는 그 당시 나를 자기연민에 빠지게 했던 비애,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나의 비애는 아무것도 안 하고 나를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남들이 알아봐주길 원했다는 것이다. 나의 비애는 스스로 인정하고 존중할 만한 그 어떤 일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 초라함이 비애의 정체였다. 나는 이것을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채 눈물로 인정했다.
“난 너무 후져.” --- p.31 모든 노트의 맨 앞부분에는 항상 상당히 조악한 그림을 그려넣었다. 이동 중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한 빼빼 마른 인간(졸라맨처럼 생겼다)이 한 발은 땅에 딛고, 다른 한 발은 땅에서 뗀 그림이었다. 내가 발을 땅에 딛게 하는 힘, 그 땅에서 발을 떼게 하는 힘, 둘 다 바로 메모였다. 그다음 페이지에는 책에서 읽은 좋은 생각들을 대략적으로 써놓았다. ‘오늘의 문장’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 ‘눈에 불을 켜고’라는 제목을 달아두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p.36 빈 공간에 단어를 써놓는 것의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 ‘친구’라고 쓰면 나는 그 단어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싶다. ‘무지개’라고 쓰면 그 단어를 보고 싶다. 그런 단어들은 아주 많다. 흑조, 4월의 눈, 호랑가시나무, 러시아식 꿀 커피……. 나는 그 단어들을 여행의 단어들이라고 불렀다. 내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을 움직이는 단어들이었다. 각각의 단어들에는 사연이 있다. 그러나 내가 왼편에 얼마나 멋진 문장들을 옮겨 썼든 나의 삶은 오른쪽 페이지에 아직 완전히 쓰이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 엉성한 생각들은 좀 더 정교해지고 정확해지다가 언젠가는 현실이 되어야 했다. 나는 점점 더 쓰이지 않은 페이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싶었다. 내 메모장의 여백이 현실보다 더 중요한 현실 같았다. 먼 훗날 나는 보르헤스가 이것을 아주 멋진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단어를 읽지만 그 단어를 살아낸다.” --- p.38 나는 문장 수집가였다. 그 안에 내 인생을 담아놓을 가치가 있는 문장들만을 찾아다녔다. 한동안 아주 열심히 책을 읽었다. 그 뒤로도 정신적 위기의 순간에 책을 더 열심히 읽는 습관이 생겼다. 위기의 순간에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메모했다. 위기의 순간에 말들이 오히려 더 간절하게 들린다. 슬플 때는 사소한 기쁨도 결정적이다. 메모는 나를 속인 적이 없다. 결국은 힘이 된다. 괴로움 속에서 말없이 메모하는 기분은 얼음 밑을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것과도 같다. 곧 봄이 올 것이다. --- p.57 내가 이런 메모 놀이를 한 이유는 상실 때문일것이다. “브루투스, 너마저…….” 이 탄식을 한번 뱉어내고 싶었다. 예전에 좋았던, 믿었던 많은 사람들도 변해간다. 우리가 나눴던 꿈은 한때의 일인 것처럼. 그리고 누구보다 독하게 세상에 대한 환멸감을 뿜어댄다. 나는 그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그러냐고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슬프지 않겠는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꿈은 슬픈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사뮈엘 베케트는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슬픈 세상에서 혼자 이런 글을 쓰면서 웃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다. --- pp.108-109 한 해가 끝나고 또 한 해가 시작되면 다이어리를 구입한다. 혹은 어디선가 얻기도 하고 선물로 주고받기도 한다. 한 해가 흐르는 동안 나는 시간의 흐름을 단어로, 문장으로 바꿔놓는다. 메모를 한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의 메모장 안에서 인내심과 경이로운 순간들, 생각들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이 두 단어 ‘인내심’과 ‘경이로움’이 빚어낸 놀라운 이야기들이 함께하길 바라 마지않는다. --- p.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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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메모주의자가 되었나
젊은 시절 “인간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고” 싶어서, “슬픈 세상의 기쁜 인간이 되고” 싶어서 르포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저자는 어느 순간 스스로가 “너무 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정체는 스스로가 자주 과대평가 되었다는 자각이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달라지기로. 뭔가를 하기로. 그만 초라하게 살기로. 하지만 달라지려면 새로운 눈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 꿀벌이 꿀을 모으듯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모으며 ‘메모의 화신’이 되었다. 노력하면 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며. 물론 근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믿어야 했다. 믿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근거를 마련해야 했고, 그 근거가 메모였다. 우리는 메모를, 단어를 살아낸다 저자는 그때의 메모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메모들이 지금의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나였던 그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내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일지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나의 메모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는 책에서 1부가 메모주의자가 되는 이야기라면 2부는 작가의 개인적인 메모들이다. 메모장이 꿈의 공간이면 좋겠다고 믿는, 그 안에 살고 싶은 세상이 있다면 좋겠다고 바라는 저자의 실제 메모를 담고 있다. 스스로도 알아보지 못할, 급히 “휘갈겨 쓴 글씨들, 수없이 반복된 질문들, 물음표, 물음표, 그 물음표 뒤에 수많은 대답들. 그러나 그 노트에는 발돋움을 하면서 돌파하려는 한 인간이 살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