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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서경희 저
문학정원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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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1부
서라
형사
담임
서라
이레
가온
서라
형사
서라
2부
초대장
가온
민욱
기쁨
새록
서라
반장
담임
형사
이레
가온
제이
에필로그 1
에필로그 2
작가의 말

저자 소개 1

2015년 단편소설 「미루나무 등대」로 김유정 신인문 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경주시립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했으며, 극단 다파 대표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장편소설 『수박 맛 좋아』 『복도식 아파트』 『하리』 『김 대리가 죽었대』, 연작소설 『옐로우시티』, 소설집 『밤의 독백』, 청소년소설 『경로이탈』 등이 있다. 제3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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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92쪽 | 135*195*20mm
ISBN13
9791198102461

책 속으로

어렸을 때, 못된 애들이 보육원에 산다고 만만하게 보고 괴롭혔잖아. 내가 학교 화장실에 갇혔을 때 언니가 밀대를 들고 와서는 남자애들 셋을 때려눕히고 구해줬잖아. 그때 언니가 했던 말이 아직 기억나. 어떤 상황에서도 난 네 편이야, 내가 지켜줄게.
“언니, 나 구덩이에 빠졌어. 제발 좀 구해줘.”
--- p.10

1학년 5반 앞에 섰다. 열일곱이 꽃 같은 나이라는 말은 씨발, 조롱이었다. 나는 꽃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온 잡초였다. 내 동생을 지킬 수만 있다면 뭐든 못 할까. 신분을 숨길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야월포에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먼저 세게 나가는 쪽이 덜 맞는다는 거였다. 나는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 p.40

“한마음이라는 애는 왜 옥상에서 떨어졌어?”
서라가 물었다. 웃음이 뚝 멈췄다.
“재수 없게 죽은 애 얘기는 왜 꺼내.”
“찜찜하니까 그렇지. 죽은 애 자리에 앉았잖아, 내가.”
가온은 잔에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비웠다.
“몰라. 한 번도 말 섞어본 적 없어.”
그건 사실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한마음과 제대로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얼굴을 맞대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도,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체방에 사진 한 장 올려놓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 pp.57~58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한마음은 스스로 옥상에 올라갔다. 혼자서 결정했다. 아무도 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를 옥상까지 올려 보낸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 p.67

그날 이후 일진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5만 원을 빌려가서는 갚지 않고 매주 꿔달라는 소리만 했다. 언젠가부터 내 물건을 말도 없이 가져가 자기 것인 양 썼다. 돈이 없다고 하자 주먹으로 힘껏 아랫배를 쳤다. 나는 고꾸라졌고 소변을 지리고 말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걸 참았던 게 화가 됐다. 반 아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둘러싸고 마음껏 비웃었다. 도와주는 아이는 없었다. 때려도 되는 아이, 돈을 뺏어도 되는 아이, 막 대해도 되는 아이. 그러니까 나는 반의 공식적인 왕따가 되었다.
--- p.94

한마음을 떠올렸다. 중간고사에서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는데 그 애한테 밀렸다. 그 애가 미웠다. 그래서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반장 일을 하며 공부까지 하려면 늘 시간이 부족했고 다른 사람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핑계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마음이 죽었으면 하고 바란 건 아니다. 단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 애만 사라지면 내가 1등이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엄마가 나를 사랑해줄 테니까. 그땐 그랬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만.
--- pp.115-116

“너희는 살인자야. 아무리 돈이 많고 공부를 잘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아.”
“차라리 경찰에 신고해요. 벌받으면 되잖아요. 근데 우리를 처벌할 법 조항이 있나요? 영상 좀 만든 건 몇 년 형이나 받아요?”
악의적인 의도로 있지도 않은 사실을 퍼뜨려서 한 사람의 내면을 산산조각 냈다. 그래서 결국 옥상에서 떨어지게 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제대로 된 처벌이 어려웠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 p.172

출판사 리뷰

아무도 밀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가 죽었다

한 학생이 학교 화단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그 애를 벼랑 끝까지 몰아간 가해자들의 이름은 소설 초반에 모두 드러난다. 숨은 범인도, 뒤늦게 드러날 반전도 없다. 『구덩이』는 사건으로 시작하지만 수사로 나아가지 않는다. 서경희는 여기서 미스터리 장르가 마련해둔 손쉬운 길을 가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어려운 질문을 독자 앞에 내민다. 다 알고 있는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몇 년 전, 우리는 전국의 학교로 번진 딥페이크 사태를 지켜보았다. 같은 반 친구와 교사의 얼굴이 합성물이 되어 단체방을 떠돌았고, 가해자의 상당수는 10대였다. 『구덩이』가 다루는 폭력이 바로 이것이다. 가온과 그 무리는 죽은 학생의 얼굴로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단체방에 퍼뜨렸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괴롭힘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가해자들은 죽은 학생과 말 한마디 섞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들에게 죄가 없다고 믿는다.

『구덩이』는 장마다 화자가 바뀐다. 전학생 서라, 사건을 쫓는 형사, 사건을 덮으려는 담임, 그리고 가해자 아이들까지 저마다 자기 목소리로 말한다. 작가는 이들 모두에게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충분히, 어쩌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준다. 그 공평함이 오히려 가해자들을 빠져나갈 곳 없이 만든다. 학교는 사건을 처리할 업무로 받아들이고, 부모들은 자식만을 지키려고 움직이며, 경찰 윗선은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권력의 편에 선다. 아이들은 그 광경을 보며 자란다. 그러니 이들이 배우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위치다. 내 부모가 어느 쪽에 서 있는가. 서경희가 그리는 소설 속 학교는 이 위치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시차를 두고
반복되는 공모

제목의 구덩이는 여러 겹이다. 하나는 열여섯 해 전 육봉산에서 갓 태어난 쌍둥이가 버려졌던 실제의 구덩이다. 또 하나는 단체방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학교폭력이라는 무형의 구덩이다. 이 겹침이 드러내는 것은 대물림이다. 오래전 힘 있는 학생을 지키려고 다른 학생에게 누명을 씌웠던 교사가 여전히 같은 학교의 교단에 서 있다. 학교는 이미 한 번 그런 선택을 했고, 세월이 흐른 뒤 그 학교의 아이들이 그 일을 되풀이한다. 아이들의 악의는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세계에서 배운 기술이다.

그래서 『구덩이』를 단순한 학교폭력 소설로 읽으면 이 작품의 절반도 보지 못한다. 이 소설의 중심에는 태어나자마자 구덩이에 버려졌던 아이, 서라가 있다. 서라는 그곳에서 살아남아 보육원에서 자랐고, 열두 살에 하나뿐인 혈육과 헤어졌으며, 바닷가 마을 야월포에서 온갖 폭력을 견디며 컸다. 거칠고 영리한 아이다.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를 빠르게 읽고, 필요하면 상대의 약점을 쥐고 협박할 줄도 안다. 그렇게 태어났다기보다 세상이 그렇게 길렀다.

죽은 아이의 책상에 앉게 된 서라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위치를 배정받지 못한 인물이다. 자기의 뿌리를 모르고 기댈 곳 하나 없다. 서라가 파고들어 끝내 알아낸 것은 은폐된 진실이 아니라 은폐할 필요조차 없는 대물림되는 구조다. 결국 모든 걸 알게 된 서라는 자기 방식의 심판을 하려 한다.

장편소설 『하리』와 소설집 『밤의 독백』, 청소년소설 『경로이탈』에 이르기까지 서경희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에서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다. 이번에도 손쉬운 구원은 없다. 『구덩이』는 학교라는 가장 작은 사회를 무대로 이 나라의 교육을 심문한다. 잘못의 크기와 벌의 크기가 왜 누구의 자식이냐에 따라 달라지는지, 그 셈법을 가장 먼저 익히는 곳이 왜 학교인지 잘 보여준다. 아이들은 자라지 않는다. 다만 자기 부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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