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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 성 상
귀의 성 하 해설 : 가정소설의 문법과 반봉건적 인식의 조우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
李人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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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순이는 교군 속에 앉아서 별생각이 다 난다.
‘내가 왔단 말을 들으면 영감이 오죽 반가워하랴. 춘천군수로 있을 때에 하루 한시만 나를 못 보면 실성한 사람 같더니, 그동안에 날 보고 싶어 어찌 살았누. 영감은 날더러 올라오라고 노자 보낸 지가 오랬을 터이지마는, 필경 우리 아버지가 돈을 다 쓰시고 나를 속인 것이야. 영감이 글도 잘한다는데, 왜 언문은 그렇게 서투르던지. 편지를 하면 아버지께만 하고 내게는 아니 하니,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 속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지 이제는 서울로 올라왔으니 아무 걱정 없지. 집도 크고 좋아라. 나 있을 방은 어덴구.’ 그렇게 생각하며 교군 속에 앉았는데, 안대청에서 웬 여편네 목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아이 종, 어른 종, 행랑것들이 안마당으로 모여드는데 춘천 읍내 장꾼 모여들듯 한다. 여편네 목소리지마는 무당 년의 소리같이 씩씩하고 시원한데, 폭포수 쏟아 놓듯 거침없고 쉴 새 없이 나오는 말이라. 마루청이 쪼개지도록 발을 구르더니, 명창 광대가 화용도 상성 지르듯이, “금단아, 사랑에 가서 영감 여쭈어라. 영감이 밤낮으로 기다리시던 춘천집이 왔습니다고 여쭈어라. 요 박살을 하여 놓을 년, 왜 나가지 아니하고 알진알진하느냐. 요년, 이리 오너라. 내가 저년부터 쳐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다. 옥례야, 점순아.” _상편 중에서 (점순) “마님, 마님께서 쇤네 말을 들으시겠습니까?” (부인) “요년아, 무슨 말이든지 얼른 하려무나. 내게 유익한 말이면 무슨 말을 아니 듣겠느냐?” (점순) “마님께서 저렇게 심려하실 것 무엇 있습니까. 마마님이든지 침모이든지 다 죽고 없으면 마님께서 걱정이 없으시지요.” (부인) “얘, 그를 다 이를 말이냐. 그러나 그년들이 새파랗게 젊은 년들인데 죽기는 언제 죽는단 말이냐? 그년들이 도리어 내 약과를 먹으려 드는 년들이다. 약과뿐이라더냐. 내 눈만 꺼지면, 그년들이 이 집 기둥뿌리를 빼놓을 년들이다.” (...) (점순) “그럴 터이면 마님께서 돈을 많이 쓰시면, 춘천 마마님과 침모를 죽일 도리가 있습니다.” 하면서 부인의 귀에 소곤소곤하는 대로 부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이 떡 벌어졌더라. _상편 중에서 “내 몸 하나는 능지처참을 당하더라도 우리 거북이나 살려 주오.” 하는 목소리가 끊어지기 전에 그 목에 칼이 푹 들어가면서 춘천집이 뻐드러졌다. 칼끝은 춘천집의 목에 꽂히고 칼자루는 구레나룻 난 놈의 손에 있는데, 그놈이 그 칼을 도로 빼어 들더니 잠들어 자는 어린아이를 내려놓고 머리 위에서부터 내려치니, 살도 연하고 뼈도 연한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 결 좋은 장작 쪼개지듯이 머리에서부터 허리까지 칼이 내려갔더라. 구레나룻 난 자가, 춘천집이 설 찔렸을까 염려하여 숨 떨어진 춘천집을 두세 번 거푸 찌르더니 두 송장을 끌어다가 사태 난 깊은 골에 집어 떨어뜨리는데, 춘천집 모자의 송장이 사태밥에서 내리 굴러 들어가매, 적적한 산 가운데 은 같은 달빛뿐이라. 그 밤 그 달빛은 인간에 제일 처량한 빛이러라. _하편 중에서 그 묘 쓴 후에 삼학산 깊은 곳에 춘삼월 꽃 필 때가 되면 이상한 새소리가 나는데, 그 새는 밤에 우는 새라. 무심히 듣는 사람은 무슨 소린지 모르지마는 유심히 들으면 너무 영절스럽게 우니, 말지기가 그 새소리를 듣고 춘천집의 원혼이 새가 되었다 하는데, 대체 이상하게 우는 소리라. 시앗 되지 마라 시앗, 시앗 시앗 되지 마라 시앗, 시앗 시앗새는 슬프게 우는데, 춘천 근처에 시앗 된 사람들은 분을 됫박같이 바르고 꽃 떨어지는 봄바람에 시앗새 구경을 하러 삼학산으로 올라가니, 새는 죽었는지 다시 우는 소리 없고, 적적한 푸른 산에 풀이 우거진 둥그런 무덤 하나 있고, 그 옆에는 조그마한 애총 하나뿐이더라. _하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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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성 없는 소설이라는 오래된 혐의
임화는 《귀의 성》을 두고 “후진하고 비속한 독자층의 애독물”(〈개설조선신문학사〉)로 폄하했고, 김윤식 역시 이 작품을 “가부장제에 바탕을 둔 고대소설의 연장선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정치소설’의 결여 형태로서의 신소설〉) 작품이라 평가했다. 이인직의 대표 작품인 《혈의 누》가 청일전쟁과 국제 정세라는 거시 정치를 배경으로 삼은 것과 비교하면 《귀의 성》은 확실히 왜소해 보인다. 실제로 《귀의 성》은 ‘가정소설’이라는 외피를 걸치고 세상에 나왔다. 1907년 6월 2일자 《만세보》에 실린 《귀의 성》의 광고는 이 소설을 ‘가정소설’로 표방하고 있다. 처첩 갈등처럼 다부제(多婦制) 아래서 빚어지는 가정 내의 희비극은 당대 대중 독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 문법이었다. 《혈의 누》가 제시했던 국가 단위의 정치 대신, 첩과 본처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서사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다. ■ 가족이라는 이름의 정치 그러나 신소설은 무엇보다 1900년대 사회와 상호작용한 결과물이었다. 이 시기를 관통하는 근대와 전근대의 충돌은 가정소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귀의 성》의 가족 서사는 1900년대 사회의 모순이 고이고 분출되는 공간인 것. 이것이 《귀의 성》을 낡은 가정소설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다. 국가를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첩이 되어 시집도 친정도 아닌 자리에서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길순의 처지, 본처의 투기가 살인으로 비화하는 과정, 계집종 점순이 뒤로 꾸미는 흉계−이 모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미시 정치다. 《귀의 성》을 포함해 거의 모든 신소설의 중심에는 이러한 미시 정치를 온몸으로 통과하는 젊은 여성이 자리한다. 《혈의 누》의 옥련이 그러했듯, 《귀의 성》의 길순 역시 그 자리에 있다. ■ 두 개의 서사, 하나의 질문 더구나 《귀의 성》은 처첩 갈등 하나로 완결되는 소설이 아니다. 본처의 사주를 받은 계집종 점순과 정부 최가가 춘천집 모자를 살해하는 전반부의 축이 고소설의 문법을 계승한 것이라면, 그 죽음을 알게 된 강 동지가 벌이는 후반부의 복수극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애초에 돈을 위해 딸을 첩으로 들여보냈던 수동적인 인물 강 동지는, 딸의 죽음 앞에서 능동적인 존재로 바뀐다. 그는 점순과 최가를 직접 처단하고 김 승지 부인마저 죽인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토해 내는 적개심은 단순한 부정(父情)을 넘어 첩을 ‘상년’으로 취급하는 신분 질서 전체를 향한다. 익숙한 가정소설의 틀 위에,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새로운 서사가 포개어지는 것이다. ■ 서출(庶出)이 그린 축첩제의 파산 이인직은 우의정과 좌의정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이었지만, 정작 서출이라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귀의 성》이 축첩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데에는 이러한 개인사가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축첩제의 수혜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첩을 두었던 김 승지도, 그를 투기한 본처도, 딸을 첩으로 보낸 강 동지 내외도, 첩이 된 춘천집도, 심지어 그 살해를 사주받아 실행한 점순과 최가까지도 모두 이 제도의 피해자로 파멸한다. 결말에서 강 동지가 자신의 딸을 ‘시앗’으로 보낸 일을 참회하는 장면은, 축첩제를 옹호했던 스스로에 대한 뒤늦은 성찰이다. 다만 이러한 개인사가 이인직의 이후 행적을 이해하거나 정당화할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축첩제라는 봉건적 제도를 예리하게 통찰한 작가가, 같은 시기 조선의 식민화에는 가장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귀의 성》이 보여 주는 것은 한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반봉건 의식과 친일 협력이 한 사람 안에서 얼마든지 나란히 존재할 수 있었다는 이 시기 특유의 균열이다. ■ 정본 《귀의 성》 이 책은 1906년 10월 14일부터 1907년 5월 31일까지 총 134회(중복·누락 표기를 바로잡으면 139회)에 걸쳐 《만세보(萬歲報)》에 연재된 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귀의 성》은 연재본과 단행본을 나란히 살펴야만 온전히 읽을 수 있는 텍스트다. 두 판본 사이에 단순한 오탈자를 넘어서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연재본은 원고지 11매 분량의 결말부가 유실된 채 전하고, 반대로 단행본에는 작품 중반부 원고지 2매 분량의 서술자 논평이 통째로 빠져 있다. 이 책은 중앙서관본(1908)과 동양서원본(1912)을 폭넓게 대조해, 어느 한쪽에 없는 부분을 다른 쪽으로 메운 정본 《귀의 성》이다. 전북대학교 국문과 이만영 교수(고려대학교 문학박사)가 편집을 책임졌다. 가정소설의 문법과 반봉건적 인식이 어떻게 한 텍스트 안에서 만나는지, 그 조우의 순간을 이만영 교수의 해설이 촘촘하게 되짚는다. ■ 함께 읽을 신소설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혈의 누》,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은세계》,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이인직·김교제 지음, 이만영 옮김, 《치악산》,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모란봉/빈선랑의 일미인》,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