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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상
치악산 하 이인직의 《치악산》(상편) 해설 : 가족 갈등의 재현과 문명화의 (불)가능성 김교제의 《치악산》(하편) 해설 : 전근대적 가족 서사의 변형과 그 의미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
李人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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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여보 마누라, 우리가 젊은 터에 구구한 생각을 둘 것이 아니라, 마누라는 내가 죽고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나는 마누라가 죽고 없는 사람으로 여겨서, 내가 몇 해 만에 고국에 돌아오든지 다시 만나는 날에는 죽었던 사람을 만나 보거니 여겼으면 더욱 반가울 터이니 부디 서로 잊고 지냅시다. (…)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 몸과 제 부모, 제 처자, 제 집, 제 재물만 중히 여기고 제 나라는 망하든지 흥하든지 모르는 사람들이라. 제 손으로 제 발등 찍듯이,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를 망하여 놓고 분하니, 절통하니, 남에게 천대받기가 싫으니, 먹고살 도리가 없느니, 하면서 저물도록 하는 것은 나라 망할 짓만 하니, 그렇게 미련한 일이 있소? 나는 하늘같이 중한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바다같이 깊이 정든 아내를 잊고 만리타국에 가서 공부하려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는 생각에서 나온 마음이오. 내가 타국에 간다 하면 우리 아버지께서는 필경 변으로 여기시고 못 가게 하실 터이니 나는 아버지 모르시게 도망질하겠소. 날만 새면 갈 터이니 나 없는 동안에 부디 조심하여 잘 지내오.”
_상편 중에서 (김) “이 애 남순아, 너는 상놈의 집으로 시집을 가더라도 시어머니 업신여기지 마라. 이 애, 내가 양반 며느리를 얻었다가 참 아니꼰 꼴 많이 보았다. 나는 춘천 김 생원의 딸로서 팔자 좋아서 양반 좋은 홍 참의 집 후취댁이 되어 들어왔더니, 팔자 좀 더 좋으려고 양반의 서슬이 퍼런 이 판서의 딸을 며느리 삼았다가 복에 겨워서 며느리에게 업신여김만 받고 혼자 속만 썩였다. 춘천 김 생원의 딸이 서울 이 판서 딸에게 설움을 아니 받으면 되겠느냐?” 하며 물 퍼붓듯 하는 말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던지 거푸하는 말 한마디 없이 새록새록 새 소리가 나오는데, 그 소리가 건넌방에 있는 며느리 귀에 낱낱이 들어간다. _상편 중에서 부인은 옥단에게 속량하여 줄 언약을 단단히 하고 옥단이는 건넌방 아씨를 없애 버릴 꾀를 한다. (옥) “마님, 마님께서 이런 말씀을 자세히 들으시오. 건넌방 아씨를 치악산 호랑의 이빨로 버석버석 깨물어 먹게 하였으면 좀 좋겠습니까? 아씨가 범에게 물려 죽으면 원귀커녕 아무것도 아니 됩니다.” (부인) “이 애, 그 말 좋은 말이다. 그러나 치악산으로 보낼 수가 있느냐?” 옥단이가 부인의 귀에 무엇이라고 소곤소곤하는데, 부인의 입이 딱 벌어지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라. _상편 중에서 이때 김씨 부인은 평지에 풍파를 만나 머리를 기둥에 때린 것같이 머리가 묵직하여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가만히 앉았더니, 신교 한 채를 들어다가 안마당에 놓으며 그 뒤에 춘심이가 들어와서 그 남편의 전갈을 하는지라. 가겠다 못 가겠다 그 댓말은 아니 하고 잠자코 앉아서 젖가슴만 쥐어뜯더니, 악도 정 지나면 겁이 없는 법이라. 내대고 마주 악을 쓰며, “무어? 어찌고 어찌해? 날더러 가라고오? 가기는 어디로 가라고 하시더냐? 그래, 내가 있으면 그년을 데리고 재미있게 못 살겠다디? 검은 머리가 세어 갈 때에 그 여우 같은 시앗 년에게 쫓겨 가아? 나를 비상 먹여 죽인다니, 왜 내가 역적질을 하다 들켰나, 죽이기는 누구를 죽인다더냐? 응, 비상은 그만두고 이년의 몸뚱이를 토막토막 척척 내어 보아라, 이년이 갈 터인가. 이 핑계 저 핑계 할 핑계가 없으니까 그놈들의 횡설수설하는 말을 곧이듣고 며느리를 죽였느니 송도년을 동이러 보내었으니 내게다 몰숙 뒤집어씌우니, 그래, 네 기둥 안에 꽉 갇히어 들어앉은 사람이 그런 짓을 했을 듯하며, 며느리는 당신이 죽이고 왜 나더러 죽였다고 하누? 에그 뻔뻔도 하지. 그래, 며느리 죽인 살인을 당신은 아니 당할 터인가? 에그, 첩년을 얻었은들 심장이 어찌 그리 돌변이 되었나?” _하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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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겹의 가족 갈등
《치악산》 상편은 이인직의 장편 신소설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가족 갈등 구조를 갖는다. 사돈간(개화한 이 판서와 봉건적인 홍 참의), 부자간(홍 참의와 아들 백돌), 그리고 시계모와 며느리 간(김씨 부인과 이씨 부인)−세 겹의 갈등이 동시에 진행되며, 결국 이 모든 갈등은 개화와 봉건의 대립이라는 하나의 구도로 수렴된다. 이인직은 일찍이 “한국 청년으로서 문명을 사모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것에 대한 정부의 불찬성보다는 부모의 반대가 심하다”(〈한국신문창설취지서〉, 《都新聞》, 1903.5.5)라고 말한 바 있다. 《치악산》 상편의 갈등이 철저히 가족 내부로 한정되어 있는 것은, 그의 이러한 인식이 소설로 고스란히 옮겨진 결과라 할 수 있다. ■ 개화를 옹호하는 인물들이 왜 이렇게 무력한가 이상한 것은 개화를 옹호하는 인물들, 즉 이씨 부인과 백돌이 지나치게 수동적이라는 점이다. 이씨 부인은 겁탈의 위기 앞에서 ‘충신과 열녀’를 운운하고, 백돌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근대의 문물을 흡수하면서도 정작 시계모에게 시달리고 있는 아내를 버려두고 유학길에 오른다. 백돌이 택하는 것은 가족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 아니라, 그로부터 도피하듯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인직의 다른 신소설 《혈의 누》의 옥련과 구완서가 ‘집 밖’을 유랑하며 근대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것과 달리, 백돌의 유학은 해결이 아닌 회피에 가깝다. 이것을 인물 형상화의 실패로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이 ‘문명화의 (불)가능성’은 신소설이라는 양식이 지닌 근본적인 양가성을 정직하게 드러낸 결과로 읽을 수도 있다. 신소설은 새로움을 향한 열정 못지않게, 낡은 것에 대한 미련 또한 간직하고 있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개화를 긍정하는 서사 속에서 인물들이 끝내 수동적이고 무력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시대가 처해 있던 이행기의 곤경을 그대로 보여 주는 징후에 가깝다. 《치악산》의 상편이 끝내 봉합하지 못한 이 양가성이야말로, 이 작품을 가장 신소설다운 신소설로 만드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 야만과 문명, 두 개의 공간 “치악산은 야만의 산”이라는 대목처럼, 《치악산》의 세계에서 치악산과 원주는 납치와 살인이 벌어지는 야만의 공간이고, 서울과 일본은 문명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상편이 그 야만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복수극으로 채워진다면, 하편은 그곳에서 내쫓긴 이씨 부인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회귀의 서사로 채워진다. 우물에서 여승 하나를 건져 올린 홍 참의는 그녀가 자신이 내쫓았던 며느리인 줄 알지 못한다. 이 우연한 구조(救助)로부터, 흩어졌던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기 시작한다. ■ 참회하는 악인들 전대 소설의 악인은 대개 납작하다. 서술자가 몇 마디 논평을 얹으면 그것으로 그의 성격은 완성된다. 그러나 《치악산》의 홍 참의와 김씨 부인은 다르다. 홍 참의나 김씨 부인의 참회를 통해 인물에 입체성을 부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술자의 논평적 서술보다는 인물의 행동과 대화를 통해서 그 성격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서술자의 요약이 아니라 인물 스스로의 말과 행동으로 성격을 드러내는 이 방식이야말로, 《치악산》이 전대 소설과 갈라서는 지점이다. ■ 이인직과는 다른 길 1908년 이인직이 상편을 쓴 지 3년 뒤, 하편을 쓴 사람은 상업학교를 나와 헌릉참봉과 효릉령이라는 관직까지 지냈던 김교제였다. 어떤 사정으로 하편의 필자가 바뀌었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있다. 벼슬길에 있던 그가 소설가로 전신한 것이 1910년 국권 피탈 이듬해였다는 것. 관직도 나라도 잃은 자리에서, 그는 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까? 김교제는 이인직, 최찬식과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다른 길을 걸었다. 김태준은 일찍이 그의 작품을 "고대소설과 거리가 멀지 않다"고 낮춰 보았지만(《증보 조선소설사》, 1939), 정작 그의 초기작 《목단화》는 신학문을 배운다는 이유로 시댁에서 쫓겨난 여성 '정숙'을 통해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이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었다. 친일 협력의 길로 나아갔던 이인직의 세계와, 그 세계를 이어받으면서도 다른 결말을 모색했던 김교제의 세계. 《치악산》 상편과 하편을 나란히 읽는 일은, 이 두 갈래의 길을 나란히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 정본 《치악산》 이 책은 1908년 유일서관에서 간행된 《치악산 상편》 초판과 1911년 동양서원에서 간행된 《치악산 하편》을 저본으로 삼았다. 두 책 모두 신문 연재 없이 곧바로 단행본으로 세상에 나온 작품으로, 애초에 따로 출간되었던 상편과 하편을 이번에 한 권으로 묶었다. 전북대학교 국문과 이만영 교수(고려대학교 문학박사)가 편집을 책임졌다. ■ 함께 읽을 신소설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혈의 누》,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귀의 성》,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은세계》,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모란봉/빈선랑의 일미인》,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