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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세계
해설 : 문명 개화와 민족적 허무주의의 경계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
李人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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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평 아씨, 본평 아씨, 불한당이 들어와서 천쇠를 때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하는 소리에 본평 부인이 베틀 위에서 베를 짜다가 북을 탁 던지고 일어나려 하나, 허리에 찬 베틀 끈이 걸려서 빨리 내려오지 못하고 겁결에 잠든 딸을 부른다. “옥순아, 옥순아, 어서 일어나거라. 불한당이 들어온다.” 하며 일변으로 허리에 매인 베틀 끈을 끄르더니 방문을 열고 나가니, 자다가 깨인 옥순이는 어머니를 부르며 우나, 부인이 대답도 아니 하고 버선 바닥으로 뛰어나가서 사랑문을 두드리며 남편을 부르는데, 본평 부인이 어렸을 때에 그 친정에서 듣고 보고 자라나던 말투라. “옥순 아버지, 옥순 아버지. 불한당이 들어온다 하니 이를 어찌한단 말이오?” _본문 중에서 대체 영문 비관을 가지고, 사람 잡으러 다니는 놈의 욕심은, 남의 묘를 파서 해골 감추고 돈 달라는 도적놈보다 몇 층 더 극악한 사람들이라. 가령 남의 묘를 파러 다니는 도적놈은 겁이 많지마는 영문 장차들은 겁 없는 불한당이라. 더구나 그때 강원 감영 장차들은 불한당 괴수 같은 감사를 만나서 장교와 차사들은 좋은 세월을 만나 신이 나는 판이라. 말끝마다 순사도를 내세우고 말끝마다 죄인 잡으러 온 자세를 하며 장차의 신발값을 달라고 하는데, 말이 신발값이지 남의 재물을 있는 대로 다 빼앗아 먹으려 드는 욕심이라. 열 냥을 주마 하여도 코웃음이요, 백 냥을 주마 하여도 코웃음이요, 2백 냥 3백 냥을 주마 하여도 코웃음인데, 그때는 엽전 시절이라, 새끼 밴 큰 암소 한 필을 팔아도 70냥을 받기가 어렵고 좋은 봇돌논 한 마지기를 팔아도 30, 40냥이 넘지 아니할 때라. _본문 중에서 (김) “이 애, 이 동네 백성들 들어 보아라. 나는 오늘 민요 장두로 나서서 원주 감영 장차 몇 놈을 때려죽일 터이니, 너희들이 내 말을 들을 터이냐?” 경금 백성들이 신이 나서 대답을 하는데 마당이 와글와글한다. (백성) “네−. 소인들이 내일 감영에 다 잡혀가서 죽더라도 서방님 분부 한마디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하라시는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김) “응, 민요를 꾸미는 놈이 살 생각을 하여서는 못 쓰는 법이라. 누구든지 죽기를 겁내는 사람이었거든 여기 있지 말고 나가고, 나와 같이 강원 감영에 잡혀가서 죽을 작정 하는 사람만 나서서 몽둥이 하나씩 가지고 장차들을 막 패 죽여라.” 그 소리 뚝 떨어지며 동네 백성들이 몽둥이는 들었든지 아니 들었든지 아우성 소리를 지르며 장차에게로 달려드는데, 장차의 목숨은 당장 뭇발길에 떨어질 모양이라. _본문 중에서 워−허 워−허 이 길이 무슨 길인고, 북망 가는 길이로다. 워−허 워−허 이 죽음이 무슨 죽음인고, 학정(虐政) 밑에 생주검일세. 워−허 워−허 생떼 같은 젊음 목숨, 불연목에 맞아 죽었네. 워−허 워−허 이 양반이 죽을 때에, 눈을 감고 죽었을까. 워−허 워−허 처자의 손목 쥐고, 유언할 제 어떨손가. 워−허 워−허 고향을 바라보고, 낙루가 마지막일네. 워−허 워−허 한을 품고 죽은 사람, 썩지도 못한다네. 워−허 워−허 대관령에서 운명할 때, 불여귀가 슬피 울데. _본문 중에서 옥순이와 옥남이가 자라나는 새 정신에 날마다 듣느니 국가를 위하는 말뿐인 고로, 옥순이와 옥남이는 나라라 하는 말이 뇌(腦)에 박히고 정신에 젖었더라. 그 후에는 다시 시엑기 아니스의 교육을 받더니 마음이 한층 더 넓어지고, 목적 범위가 한층 더 커져서, 천하를 한집같이 알고 사해를 형제같이 여겨서, 몸은 덕의상(德義上)에 두고 마음은 인애적(仁愛的)으로 가져서 구구한 생각이 없고 활발한 마음이 생기더니, 학문에 낙을 붙여서 고향 생각을 잊어버린다. _본문 중에서 (무뢰) “네가 웬 사람이며, 머리는 왜 깎았으며, 여기 내려오기는 무슨 정탐을 하러 왔느냐? 우리는 강원도 의병이라. 너 같은 수상한 놈은 포살하겠다.” 하며 기세가 당당한지라. 옥남이가 천연히 나서더니 일장 연설을 한다. “여보시오 우리 동포, 들어 보시오. 나는 동포를 위하여 공변되게 하는 말이니, 여러분이 평심서기하고 자세히 들으시오. 의병도 우리나라 백성이요, 나도 우리나라 백성이라. 피차에 나라 위하고 싶은 마음은 일반이나, 지식이 다르면 하는 일이 다른 법이라. 이제 여러분 동포께서 의병을 일으켜서 죽기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하시는 일이 나라에 이롭고자 하여 하시는 일이오, 나라에 해를 끼치려는 일이오? 말씀 좀 하여 주시오. (…) 우리나라 수십 년래 학정(虐政)을 생각하면 이 백성의 생명이 이만치 남은 것이 뜻밖이요, 이 나라가 멸망의 화를 면한 것이 그런 다행한 일이 없소. (… )그렇게 결딴난 나라를 황제 폐하께서 등극하시면서 덕을 헤아리시고 힘을 헤아리셔서 나라 힘에 미쳐 갈 만한 일은 일신 개혁하시니, 중앙 정부에는 매관매직하던 악습이 없어지고, 지방에는 잔학생령 하던 관리가 낱낱이 면관이 되니, 융희 원년 이후로 황제 폐하께서 백성에게 학정하신 일이 무엇이오? 여보 동포들, 들어 보시오.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할 생각이 있거든 황제 폐하 통치하(統治下)에서 부지런히 벌어먹고 자식이나 잘 가르쳐서 국민의 지식이 진보될 도리만 하시오. 지금 우리나라에 국리민복(國利民福) 될 일은 그만한 일이 다시 없소. 나는 오늘 개혁하신 황제 폐하의 만세나 부르고 국민 동포의 만세나 부르고 죽겠소.” _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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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새겨진 장르
《은세계》 초판(동문사, 1908) 표지에서, ‘은(銀)’은 ‘신(新)’ 자를, ‘세(世)’는 ‘연(演)’ 자를, ‘계(界)’는 ‘극(劇)’ 자를 모아 만든 집자였다. 제목 자체가 이 작품의 장르, 즉 ‘신연극’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 간행되기 일주일 전인 1908년 11월 13일부터 원각사 무대에 먼저 올랐고, 판소리 명창 김창환을 비롯한 광대들이 무대를 채웠다. 훗날 명창 이동백은 이 공연을 〈최병두타령〉이라 불렀다. 소설 《은세계》는 그 무대의 흥분을 옮겨 적은 기록이기도 하다. 《은세계》의 전반부를 채우는 탐관오리 정 감사는 실제 모델이 있다. 1886년 전후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정태호로, 공금 횡령과 여색으로 이미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인물이었다. 아무 죄 없이 정 감사에게 끌려가 고문 끝에 죽는 최병도, 그리고 그를 구하려 몰려들었다가 흩어지는 농민들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 사건에 뿌리를 둔 서사인 것이다. ■ 상권, 그리고 쓰이지 않은 하권 초판 표지에는 분명히 ‘상권(上卷)’이라 적혀 있다. 그러나 하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 소설이 쓰인 1908년은 의병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이인직은 어째서 하권을 쓰지 않았을까. 이 물음에 명쾌한 답은 없다. 다만 그 실마리는 이 소설의 후반부, 정확히는 옥남과 의병이 마주치는 마지막 장면에 있는지도 모른다. ■ 갈라지는 평가, 갈라지는 절반 《은세계》를 둘러싼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려 왔다. 한때는 개화기 최대의 정치소설로 꼽혔고, 이후에는 매국적 논리를 합리화한 작품으로 비판받았다. 이 엇갈림은 작품 자체가 반으로 쪼개져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최병도가 정 감사에 맞서고 농민들이 민요를 일으키는 전반부는, 봉건 질서의 붕괴를 생생하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 소설이 도달한 하나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최원식, 〈《銀世界》 硏究〉, 《창작과 비평》, 1978년 여름호). 그러나 유복자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옥남이 등장하는 후반부에 이르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게 된다. 옥남이 강원도 의병 앞에서 늘어놓는 연설은 이 소설에서 가장 문제적인 대목이다. 옥남은 의병을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로 몰아세우고, 황제의 통치 아래 실력을 기르는 것만이 살길이라 강변한다. 이는 정 감사와 대결하던 민중의 서사가 도달한 결론과는 정반대의 자리다. 봉건 지배층에 맞서 싸우던 민중은 후반부에서 국권을 위협하는 무뢰배로 뒤바뀌고, 저항이 아니라 순응이 살길이라는 논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 반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인직이 하편을 잇지 못한 채 붓을 놓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인직이 그려 낸 민중은 어느새 자신의 논리로는 봉합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은세계》의 전반부가 이 시기 소설이 도달한 성취라면, 후반부는 그 성취가 어떤 방식으로 파탄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 정본 《은세계》 이 책은 1908년 동문사에서 간행된 초판을 저본으로 삼았다. 다만 동문사본은 34~36면과 59~60면이 결락된 채 전하는데, 이 부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신택영 필사본 《은세계》와 대조해 복원했다. 전북대학교 이만영 교수(고려대학교 문학박사)가 편집을 책임졌다. ■ 함께 읽을 신소설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혈의 누》,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 발행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귀의 성》,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이인직·김교제 지음, 이만영 옮김, 《치악산》,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모란봉/빈선랑의 일미인》,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