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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낮거리·11 봄, 색(色)·12 봄에 봄에 봄날에·14 옛날 생각·16 숙취·18 알리바이와 쓰리썸·20 거리의 여자·22 딜레마와 아이러니 사이·24 늙은 자석·26 인조인간·28 봉순이 언니·30 우물·32 시 팔이·34 예술·36 제2부 유년의 민들레·39 겨울 비둘기·40 변태·42 만인의 연인·44 당신은·47 세 개의 섬과 한 번의 섬·48 기억의 기억·50 삐삐는 우울하다·52 안부·54 공원에 벤치가 없다면·56 달의 바코드·58 불꽃·60 무료한 햇살·62 제3부 심장으로 가는 길·67 내가 버린 시간들·68 빨강 버리기·70 퍼스널 컬러·73 남창(男娼)이 필요할 때·74 발병·76 슬픔주의보·78 줄·80 페티시·82 내 가슴은 아직도 지독하게 탐스럽다·84 홍시, 떨어지다·85 우리의 마지막 플라타너스·86 나의 뮤즈에게·88 한 배·90 파란 토마토·93 제4부 신은 신·97 콤플렉스·98 쾌락은 떠났네·100 바깥·102 목련을 보내며·103 불씨·104 사랑, 가·106 부재·108 중력의 끝으로·110 희주(喜酒)·113 마지막 연서·116 천년의 이야기·118 끝없는 사랑·119 해설│김옥경·121 시인의 말·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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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물이 빠져나간 듯 텅 빈 낮거리를 걷다 나를 채워줄 낮거리를 찾다 문득 졸고 있는 멀건 해를 바라보다 어제의 밤거리를 떠올리다 피식 웃음이 나다 현란한 원색의 네온 불빛에 빛을 잃은 달그림자에 몸을 숨겨 관음하던 그 해다 알코올을 뒤집어쓴 마네킹에 헐떡이다 절정하다 질식하던 그 해가 이 해다 여전히 멀건 해 옆에 낮달이 창백하다 어이없는 그 해와 그 달을 바라보다 지금이 낮거린지 밤거린지 의문이 들다 돌아서다 다시 돌아서는 내가 마네킹이다 낮거리와 낮거리하다 졸고 있는 마네킹이 나다
-「낮거리」 전문 내 시를 팔아 시의 간을 사야지 피가 뚝뚝 흐르는 신선한 간을 먹고 싶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시 팔이가 되어 시 팔아요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시 팝니다 외쳐도 시팔 나의 시는 한 음 한 행도 팔리지 않고 목구멍에서는 영원히 뱉을 수 없는 가래처럼 욕이 끊이지 않고 끓어오르는데 시 팔아요 제목부터 시가 많이 낡았네요 오늘 나온 시 맞나요? 의심은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어느새 곰팡이가 피었어요 언제 적 시팔이야 시의 간이 없는 듯 시시하네요 사실, 시의 간을 직접 빼먹고 싶지만 벼룩의 간조차 빼먹을 능력이 없는 나는 그래도 벼룩은 낯짝이라도 있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데 몹쓸 간도 쓸개도 어디다 팔아먹고 이제와 어물전 꼴뚜기만도 못한 신세가 되었나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었는지 배는 이미 오래전 떠나고 나를 들키고 싶지 않은 누추한 밤이 돌아오면 불을 켜지 마시오 굶주린 어둠이 들개처럼 달려드니까 -「시 팔이」 전문 달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나의 굽은 등을 생각했다 수십억 만 년 전이라 하자 어쩌면 샴쌍둥이처럼 둘이면서 하나였을 우리 불안한 태생은 종족의 생존을 위해 나는 인간으로 지구에 버려졌다 인간은 누구나 정해진 바코드를 가지고 태어나고 각인된 운명에 너무도 쉽게 순응하며 살아나간다 나 또한 평범한 인간일 뿐 그러나 나에겐 달이 몰래 새겨 논 바코드가 있다 차마 심장에는 새길 수 없어 오랜 시간 척추에 길을 내었다 달도 나의 바코드를 가지고 있어 등이 유난히 시려운 날은 달이 울고 있기 때문일 게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조금씩 등을 굽혀 가는 일 나의 반쪽이여 적어도 그렇게 믿어왔던 나날 무심한 달의 초상 나의 등은 한층 더 인간적으로 굽어가고 달의 바코드는 이제 말 못 할 전설이 되어 사라지고 없다 -「달의 바코드 」 전문 언젠가 한 번은 뒤돌아봐 주겠죠 당신 등 뒤 먼발치에서 번호표 뽑아 긴 줄서기 해 봅니다 당신과 나 사이 담쟁이 아슬한 줄타기야 없겠지만 당신 얼굴 하나 보려 여름 한낮 햇살에 맨몸 여는 해바라기를 기억해 주세요 오늘 밤은 달빛 아래 처량한 달맞이꽃이 되려 합니다 그러나 무정한 당신 여기까지가 줄의 끝이라며 내 마음에 빨간 밑줄을 긋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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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저러니 해도 술은 멋지고 고마운 친구예요
나약한 우리에게 용기도 주고 틈틈이 불필요한 기억을 삭제시켜 주는 블랙아웃도 여러 번 선물로 주었죠 술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해요 내게는 아직도 술이 스쳐 간 증거가 뇌혈관에 남아 있어요 그러니깐 술에게 물어보세요 우리에겐 죄가 없어요 -「알리바이와 쓰리썸」 부분 위의 시를 비롯해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솔직하고 과감한 표현과 언어를 다루는 감각이다. 시인은 사랑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낭만적인 환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욕망과 허위, 상처와 후회가 뒤엉킨 현실을 직시하며, 그 안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목에 담긴 ‘알리바이’와 ‘쓰리썸’이라는 낯설고 도발적인 조합 역시 감춰진 진실과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양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날은 뭔가 이상했어 어른들은 어딜 가고 언니 오빠는 어디에 있었을까 빈집에서 혼자 놀다 낯선 담벼락을 따라간 건 내 잘못이었을까 그래 그 집, 옆 동네 골목길 맨 끝 두 번째 집에서 어린이를 잃었어 백 원짜리 몇 개와 함께 그날의 기억도 잃어버렸어 -「옛날 생각」 부분 시집에는 지나간 시간과 유년의 기억, 사랑의 흔적, 늙어가는 몸과 마음, 삶의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상실감이 다양한 결로 펼쳐진다. 기억 속에 남은 시간의 흔적을 더듬는가 하면, “그래도 온몸 가득했던 라일락과/오늘 밤과 새벽 사이 함께였던 당신/그 시공간의 향을 내내 기억하며 살겠”다는 「마지막 연서」와 「사랑, 가」는 사랑의 시작과 끝에 놓인 마음을 비춘다. “몸도 기억도 시간의 중력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중력의 끝을 향해 뒷짐 지고/불어오는 바람 맞으며 눈 감고”(「중력의 끝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처럼 삶을 끌어당기는 힘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서봉순 시인의 시는 감정을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의미를 하나로 고정하지 않는다. 날것의 언어와 비틀린 시선, 뜻밖의 말장난과 날카로운 이미지가 어우러지면서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타인의 삶을 향하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향한다. 감추고 싶었던 욕망과 외면해 온 상처, 끝내 놓지 못한 사랑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김옥경 시인은 해설에서 서봉순 시인의 시는 “은유나 상징보다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아무렇지 않게 나열한 듯하나, 자신이 체득한 감정을 구별 없이 담아내”고 “독자적인 자기만의 충족을 획득한 감수성이 서술되어” 있다고 한다. 『알리바이와 쓰리썸』은 삶을 아름답게 포장하기보다 그 이면을 정면으로 바라보려는 시집이다.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고 때로는 서늘한 여운을 남기는 시편들은 인간이란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지, 그럼에도 상처와 결핍을 넘어서며 자신의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지를 묻는다. [작가의 말] 내가 시집을 내다니! 철 가면을 여러 겹 쓰고도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20년이 훨씬 넘은 묵은 시와 가장 최근에 쓴 시들의 간극이 위태롭고 불안하다 이 졸시들을 세상에 내놓아도 될지 몇 년을 회피하고 망설였다 털어버리기 위해,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한 권의 시집으로 엮는다는 데 그 의의를 둔다 2026년 가을 서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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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에 묻히지 않고 오직 ‘관능’에 펄떡이는 ‘심장’을 쥐었기에 시인은 메마른 이성의 옷을 벗고 피의 온도로 세상 한복판에 나선다. 몸속 깊은 곳의 불씨는 비겁한 상처의 불똥으로 식지 않고 끝끝내 불꽃을 이룬다. 위선도 분칠도 없이 날것의 맨살을 드러낼 때 시인은 사랑의 신 카마데바와 기꺼이 맞짱을 뜨며 술의 알리바이 따위는 단호히 거부한다. 마음이 움직이는 쪽이 당당한 줄 알기에 시인은 윤리의 역린을 거스른 채 아슬아슬한 벼랑 끝을 간당간당 걸어간다. 광막한 우주 앞 유한함의 슬픔을 응시하면서 성애의 뜨거운 ‘자성(磁性)’을 잃지 않기 위해 기꺼이 붉디붉은 ‘빨간 구두’를 신는다. 살갗에 새겨진 ‘달의 바코드’를 어루만지며 모든 색을 품어 빛나는 ‘블랙’으로 “시간의 중력”을 사뿐히 배반한다. 우주의 모든 일상이 차가운 AI의 연산 앞에 무릎 꿇더라도 우리의 얇은 살갗 아래 깃든 이 애욕의 도가니는 영원히 연산할 수 없는 고유의 밀실이다. 에로티시즘이여, 영원한 시여! - 권용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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