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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5
1부 원어로 복음서 읽기 7 1장 예수님의 첫마디 8 2장 기름 낀 마음, 깨끗한 마음 12 3장 다 받아 가셨는데요 17 4장 평안은 툭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21 5장 부자 청년의 고민 25 6장 오후 다섯 시를 위한 변명 30 7장 눈 착하게 뜨고 다니자 36 8장 거룩한 수리공 42 9장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47 10장 예수님께서 돌아보실 때 53 11장 같은 단어, 다른 번역 58 12장 당신의 아들 63 13장 쓸모없는 우리 68 14장 다 같은 불쌍함이 아닙니다 73 15장 같은 동네 사람 84 16장 땅에 쓰신 글씨 89 17장 좋은 목자, 훌륭한 목자 97 18장 보혜사 101 19장 친구 105 20장 도마처럼 112 21장 밥은 먹고 다니냐? 117 22장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대화 124 2부 원어로 사도행전 읽기 131 23장 사도행전 제목 132 24장 내 생각과 다르신 주님 136 25장 성공한 설교 140 26장 집사님들은 어디서 오셨나요? 145 27장 천사의 얼굴 151 28장 나도 사람이라 156 29장 주인들 161 30장 얘들아, 기술 배워라 165 31장 아볼로의 진짜 실력 171 32장 유두고를 위한 변명 177 3부 원어로 바울서신 읽기 183 33장 내 마음속에서 진짜로 원하는 것 184 34장 마음 188 35장 정신 차린 예배 200 36장 남의 식구 비판하는 넌 누구냐? 205 37장 뭐라도 할 수 있다면 209 38장 덕(德)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공사 현장 213 39장 예수님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 219 40장 성찬의 자리 225 41장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230 42장 유익 236 43 장 사랑은 240 44 장 망했어요 245 45 장 아빠, 아버지 250 46장 아빠라고 크게 외치세요 255 47장 그래도 나보다는 낫다 259 48장 일은 하지 않는데 바쁘다 2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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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부자 청년' 이야기는, 사실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 모두의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거울과도 같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을 찾아와 선한 일과 영생에 관하여 묻는,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더욱이 어지간한 율법도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꽤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요구,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라는 말씀에 결국 근심하며 조용히 떠나갑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너무 쉽게 "아, 돈이 너무 많아서 그랬구나"라고 결론짓곤 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그가 가진 재산의 '양'(amount)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류'(kind)에 있습니다. 그가 근심한 이유에 대해, 마태복음은 "재물" 곧 크테마(κτῆμα)가 많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바로 이 크테마가 핵심입니다. 헬라어 크테마는 단순한 현금이나 소비재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토지나 집이나 밭처럼, 획득하여 소유한 '부동산' 중심의 핵심 자산, 즉 한 사람의 삶의 기반이자 사회적 신분, 심지어 가문의 명예를 의미했습니다. 더욱이, 1세기 유대 사회에서 땅을 판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아파트 한 채를 파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행위와도 같았습니다.
---p.25~26 “오후 다섯 시쯤에 주인이 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하고 물었다.”(마 20:6, 새번역) "왜 … 빈둥거리고 [놀고 있었냐]"라는 표현은 헬라어 아르고스(ἀργός)를 옮긴 것인데, 실은 여기에 아주 교묘한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습니다. 영어성경들을 보면 lazy('게으른')같이 대놓고 인격을 모독하는 표현을 잘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idle('가만히 서 있는', '일이 없는')처럼 원어의 가치 중립성을 살리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idle은 그저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중립적인 idle 상태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빈둥거리고", "놀고 [있다]"라고 번역하는 순간, 아르고스의 본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도덕적 평가'가 슬그머니 끼어듭니다. '놀고 있다'라는 표현은 '일이 없는' 중립적 상태를 순식간에 '일할 생각이 없는' 태만의 문제로 바꿔버립니다. '일이 없어서' 멈춰 서 있던 것인데, 순식간에 '놀고 싶어서' 멈춰 있던 사람들로 되어버립니다. 아르고스의 어원은 아주 명쾌합니다. '없다'라는 뜻의 아(a-)와 '일'을 뜻하는 에르곤(ergon)의 합성어입니다. 문자 그대로 '일-없음'(no-work)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작동하지 않는' 혹은 '기능이 멈춘' 상태를 의미합니다. --- p.32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목수" 예수님의 작업실 풍경은 꽤나 낭만적입니다.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고요한 공방에서 대패질 소리가 사각사각 들리고, 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장면처럼요. 하지만 역사라는 렌즈를 끼고 보면 그 낭만에는 흙먼지가 훨씬 더 많이 묻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텍톤(τέκτων)입니다. 우리는 이걸 편의상 "목수"로 번역하지만, 사실 나무만 다루는 우아한 장인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전문적인 목수나 석수를 지칭하는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특히 나무가 귀하고 돌이 흔했던 팔레스타인 지형을 고려하면, 예수님은 나무를 깎기보다 돌을 나르고 흙을 이기며 집을 짓는 일을 더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목수와 석수와 미장이를 겸한 '만능수리공'에 훨씬 더 가까웠을 것입니다. --- p.42 그동안 우리가 친구를 단순히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정서적 위로의 대상으로만 여겼다면, 이제는 그 관점을 '의지적 결단'과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한 차원으로 확장해야 합니다. 성경의 필로스(φίλος)와 우리가 쓰는 한국어 '친구' 사이에는, 바로 그 지향점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이제부터는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선언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부터는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 ”(요 15:15, 개역개정). 이는 "이제 우리 편하게 친구처럼 지내자"라는 사적 제안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시키려는 거룩한 초청이었습니다. 마치 로마 시대에 '가이사의 친구'라고 하면 황제의 권력을 위임받은 '충신'을 뜻했던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가리켜 "친구"라 부르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공유하는 깊은 신뢰 관계로 우리를 격상시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말의 친구보다는, 오히려 뜻을 공유하는 동지(同志)나 운명을 같이하는 전우의 뉘앙스가 문맥상 더 적절해 보입니다. ---p.106~108 예수님은 첫 질문에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보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플레온 투톤(πλέον τούτων)입니다. 보통 투톤을 남성 복수 속격으로 읽어 "이 사람들보다"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형태상 투톤은 남성 복수 속격일 수도 있고 중성 복수 속격일 수도 있습니다. 형태가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보다"로만 번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보다"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먹고사는 생업이나 익숙한 삶의 방식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이 가능성은 가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물고기를 잡는 현장 한가운데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요 21:3, 10-11). 그렇기에 중성으로 읽는 해석은 적어도 문법적으로 무리한 억지가 아니며, 문맥상으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옛 일로 돌아간 듯한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정말로 현재의 익숙한 삶을 뒤로하고 다시 주님을 전심으로 따를 것인지, 정말로 먹고사는 문제에 함몰된 세속의 세계를 뛰어넘어 다시 주님을 온전히 따를 것인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제 우리를 향합니다. “네가 이런 일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p.128~129 성경을 읽으면서 빠지기 쉬운 유혹 중 하나는 정작 주님은 가만히 계시는데, 내가 심판자가 되어 칼을 휘두르고 싶은 유혹입니다. 내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당장 이해하기 쉬운 율법적 교훈을 꺼내들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20장의 유두고 사건은 흔히 '설교 시간에 졸면 벌 받는다'라는 식의 교훈으로 활용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죄를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본문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먼저 유두고 사건의 현장, 곧 위층 다락방에 "등불을 많이"(λαμπάδες ἱκαναὶ) 켜고 있었다고 말합니다(행 20:8). 그곳은 많은 등불 때문에 덥고 산소 또한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두고의 졸음은 영적인 해이함이 아니라, 피곤한 육체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좋은 자리에서 말씀 듣는 사람과 달리, 멀리서 잘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데, 공기까지 안 좋다고 생각해 보세요. 또한 9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유두고라는 청년(νεανίας)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행 20:9, 새번역) 유두고는 여기서 "청년" 곧 네아니아스(νεανίας)라고 불리는데, 이 단어는 힘든 일을 하는 젊은이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이것을 감안하면 그가 창가에 걸터앉은 것도 신분이 낮아 뒤쪽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되살아난 그를 부를 때 사도행전은 '아이' 또는 '하인'을 뜻하는 파이스(παῖς)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요. 이 단어는 사실 아이보다, 하인이나 종이라는 의미로 훨씬 더 많이 사용됩니다. ---p.178~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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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 성경 원어 전문가, 김한원 목사가 전하는 신약성경과 헬라어 이야기! · 헬라어 원어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실제적인 적용점을 보여준다. · 각 장의 끝마다 헬라어를 정리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