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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증
2. 선물 3. 꿈 4. 정 5. 불청객 6. 밤순례 7. 눈물 8. 설운 설 9. 사투 10. 빛 |
孔善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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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도 가고 남편도 가고 남은 건 아이들 뿐이다. 아이들이 있어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리고 떠나지 못해서 안 떠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제 곁에 있는 건 아이들뿐이라는 사실, 그것 하나뿐이다. 저희들 목숨 의탁할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강필순이라는 사람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그 아이들 보호해줄 어른이 이 세상에서 자기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 필순을 서럽게도 하고 기쁘게도 한다.
--- p.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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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보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보름 지나면 이제 바람 속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봄기운이 묻어나리라. 바람끝은 차지만 분명히 맡아지는 봄냄새. 그 봄냄새 날 날만 필순은 기다렸다. 그 봄봄냄새에 대한 기대마저 없다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그 봄냄새가 필순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조차 필순은 상관없었다. 그냥 기다리는 것. 무엇을 기다리느냐 누가 묻는다면, 필순은 세월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해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물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물어주는 사람 없어도 필순은 기다렸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겨울 되면 봄을 기다리고 봄 되면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 되면 가을을 기다리고…… 그렇게 한 세상을 산 어머니같이.
--- p.352: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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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끈거리는 고급 승용차에 올라앉은 이섭이 마치 뒷자리 여자들의 말 잘 듣은 운전수처럼 보인다. 시골 사람들 속에서는 단연 매끈한 도시내기임이 드러나지만 서울 차에 서울 사람들 속에 있으니 이섭에게서도 어느덧 시골 사람 티가 묻어나긴 한다. 그리고 이섭이 제 식구들 속에 있으니 또 어쩔 수 없이 필순이 제 남편이라기보다는 저 집 식구들 아들이요, 도련님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산이 났을 때 산바라지 끝내고 돌아가는 어머니가 차로 모셔다주는 걸 사양했다손 치더라도 한 번 더 권해볼 생각도 없이 어머니 혼자 버스를 타고 가게 한 이섭이었다. 그랬던 이섭이 제 어머니와 형수한테는 말 잘 듣은 머슴같이 구는 것이 필순은 서럽다. 여태껏 부부싸움 한 번 안 하고 살아온 것이 자신이 결코 착하거나 속이 없어서가 아니었음을 필순은 되새긴다. 어머니의 신신당부를 따르자는 뜻에서도 아니었다. 싸움 뒤에 올 어떤 형태의 파국도 필순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싸움이 파국으로 치닫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p.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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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이따금 혼자서 한수 벌어 먹이느라 미싱발을 밟는 어느 순간에 잊어버릴 만하면 찔끔찔끔 솟아나오곤 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눈물 마저도 나오지 않게 된 지가 오래 됐다. 그런데 은자가 남자 말을 하고 간 이 깊은 밤에 필순은 오래 잊었던 눈물이 다시 질금질금 샘솟는 것이었다. 꼭히 누군가가 그리운 것도 아닌데 그리운 사람이 어딘가에 있는듯이도 여겨지는 밤이었다. 눈물이 나는 건 자신의 청춘이 너무 아까워서 제 청춘이 속절없이 지나고 있는것이 서러워서 인지도 모르겠다.
--- p.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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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서 말했듯이 그녀가 보는 세상은 온통 상처투성이이다. 그래서 소설에는 주로 남편으로부터 상처받은 여성,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이 나오고 그들은 한결같이 가난하다. 생존의 절박함 앞에 놓여 있는 모성은 때론 거추장스럽다. 희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보이는 생의 벼랑 끝에서 삶에 내미는 화해의 몸짓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가. 주어진 삶의 조건들과의 화해, 그것은 작품에서 모성이기도 하고, 원초적인 생명력이기도 하다.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여자 강필순은 첫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그녀를 '불쌍하게 봐주는' 의사남편을 만나서 인생이 좀 피려는 것 같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로부터 자꾸 멀어진다. 아니, 어째해볼 수 없는 벽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만 살아왔던 필순과 가난하고 무지한 여자와 소박하게 살기로 선택한 심이섭은 부부였지만 조화하기 어려운 두 세계이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 지식인 전병순과 그의 남편 김영후도 친절하지만 왠지 마음이 기대지지가 않는다. 그들 역시 시골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지만 언제든지 떠날 곳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결국 떠난다. 대신 그녀와 함께 웃고 울어주는 사람은 못나고 힘없는 오은자나 한생 같은 이웃이다. 남편이 떠나고 남은 건 아이들뿐이다. 친구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두 아이, 여동생과 동거했던 남자가 일방적으로 맡겨놓고 가버린 아이, 전남편이 두고간 자식, 그리고 이섭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까지. 자신이 상처받은 존재이면서, 다른 상처받은 사람을 보듬어 안는 사람이 바로 강필순이며, 작가는 이를 '어미마음'이라고 말한다. 강필순과 주변의 인물들은 매우 대조적이다. 우선 남편부터가 그렇다. 지식인 남편은 결혼 후 매우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생태를 걱정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고 살지만 정작 아내의 등을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하는 남편이다. 한 가정 안에서조차, 삶에 뿌리를 두지 않고 이념을 얘기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과 또 하나의 계층분화를 보는 듯하다. 남편은 생태주의니, 대안적 삶이니 하면서 결코 아내가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한다. 그러나 필순의 삶은 철저하게 하루하루의 생활에 근거한다. 그악스럽고 바보같기만 한 강필순에게서 사람의 냄새가 느껴지고, 그녀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삶에 대한 강인한 애착과 생명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내면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계층간의 화해, 자식과의 화해, 고단한 삶과의 화해, 강필순은 신선한 삶의 경험들을 통해서 그렇게 세상과의 화해 속으로 나아가는 인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