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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1. 님에게 먼 후일 풀 따기 바다 산 위에 옛이야기 님의 노래 실제 1 님의 말씀 님에게 마른강 두덕에서 2. 봄 밤 봄 밤 밤 꿈꾼 그 옛날 꿈으로 오는 한 사람 3. 두 사람 눈 오는 저녁 자주 구름 두 사람 닭소리 못 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4. 무주공산 꿈 1 맘 켕기는 날 하늘 끝 개아미 제비 부엉새 만리성 수아 5. 한때 한때 담배 실제 2 어버이 부모 후살이 잊었던 맘 봄비 비단안개 기억 애모 몹쓸 꿈 그를 꿈꾼 밤 여자의 냄새 분 얼굴 아내 몸 서울 밤 6. 반달 가을 아침에 가을 저녁에 반달 7. 귀뚜람이 만나려는 심사 옛 낯 깊이 믿던 심성 꿈 2 님과 벗 지연 오시는 눈 설움의 덩이 낙천 바람과 봄 눈 깊고 깊은 언약 붉은 호수 남의 나라 땅 천리만리 생과 사 어인 귀뚜람이 월색 8. 바다가 변하야 뽕나무밭 된다고 불운에 우는 그대여 바다가 변하야 뽕나무밭 된다고 황촉불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할까 보냐 훗길 부부 나의 집 새벽 구름 9. 여름의 달밤 여름의 달밤 오는 봄 물마름 10. 바리운 몸 우리 집 들돌이 바리운 몸 엄숙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밭고랑 위에서 저녁때 합장 묵념 11. 고독 열락 무덤 비난수하는 맘 찬 저녁 초혼 12. 여수 여수 13. 진달래꽃 개여울의 노래 길 개여울 가는 길 왕십리 원앙침 무심 산 진달래꽃 삭주구성 널 춘향과 이도령 접동새 집 생각 산유화 14. 꽃촉불 켜는 밤 꽃촉불 켜는 밤 부귀공명 추회 무신 꿈길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하다못해 죽어 달려가 올라 희망 전망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15. 금잔디 금잔디 강촌 첫 치마 달맞이 엄마야 누나야 16. 닭은 꼬꾸요 닭은 꼬꾸요 김소월 연보 |
金素月, 김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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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시대와 그 개인사가 탄생시킨 여성적 언어로서의 한(恨)
김소월 작품 세계의 주체가 여성으로 표현되는 것은 그의 어머니와 숙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큰 듯하다. 김소월의 아버지는 처갓집에 선물을 가지고 방문하려던 길에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 김소월에게 기대며 지나친 애착을 가졌고, 이는 소월에게 은연중에 피하고 싶은 부담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소월은 가장 역할은커녕 사람 구실도 하지 못하게 된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품으며 자랐다. 김소월의 내성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은 그 아버지로 인해 집안에 드리워진 어두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숙모 계희영은 신학문에 눈을 뜨고 여러 문학작품을 섭렵한 인물로서 조카 김소월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의 상상력과 문학성을 키우는 자양분을 마련해 주었다. 그렇지만 숙모의 남편이자 김소월의 작은아버지는 결혼 직후부터 외지로 떠돌아 계희영은 홀로 남은 여인처럼 살아가야 했다. 김소월이 마음속으로 삭이는 여인들의 한과 아픔을 마음으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게 된 일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 체화된 마음이 확장되어 김소월의 시를 표현하는 화자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을 것이다. 시대적ㆍ개인적 불우함 앞에 생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김소월 그렇다고 김소월이 나약하거나 비굴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일본인들의 억압에 눌리지 않고 언제나 한복을 입고 다니며 당당한 태도를 취하였고, 일본 관리들에게도 우리말을 사용하며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시인으로서도 5, 6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 동안 154편의 시를 창작하며 천재적 재능을 드러내고, 우리 전통 시조의 율격을 띠면서도 완벽한 현대시를 표현해 냄으로써 신체시 등의 과도기에서 벗어나게 하며 시인으로서도 큰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기억의 근원에서부터 비롯된 허무주의, 미래라곤 없는 듯이 느껴지는 암울한 현실, 연이은 사업의 실패와 경제적 빈곤, 일제의 검열에 따른 창작에 대한 회의, 문우 나도향의 요절과 이장희의 자살 등은 김소월이 현실을 포기하고 비관적 운명론에 빠지게 만들었다. 말년에는 아내에게 술을 가르치고 대작하며 나날을 소진하였고 아내에게 “같이 죽자”고 말하는 등 심한 염세증을 보였음은 물론, 가벼운 정신이상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김소월은 결국 끝없는 회의와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934년 12월 23일 아편을 사 가지고 와 음독자살하고 만다. 기대고 싶지만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는 삶의 의미에 대한 상실이 만사를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김소월의 셋째 아들은 1967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우리가 생각하기보다 훨씬 더 외로움이 깊었고, 그 슬픔은 육친의 정보다 더 깊었던 것 같다”라고 하며 시인으로서의 김소월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김소월은 안타깝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지만 그의 작품은 살아남아 후대의 시작에도 계속해 영향을 미쳐 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