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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불완전한 과거’-무대의 복원과 지리적 배경
1장 사치와 향락의 도시-그 번영과 소멸의 드라마-정복과 통일의 차이점, 극명하다 전성기 신라 전체와 왕경의 호수 전성기 신라 왕경의 구조와 전체 호수 왕경과 지방 사이의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차별 사치와 향략, 그리고 쇠퇴 2장 6촌 설화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다-신라 건국의 모태, 6촌의 경계와 영역을 찾기 위한 여행 신라에서 ‘6’이라는 숫자의 비밀에 주목한다 왜 ‘여섯’ 개의 촌인가? 경주 시내는 사람이 살기 어려웠다 6촌의 경계와 영역은 복원될 수 있다 3장 신라는 정복국가였다-왕경에 숨겨진 건국과 대외팽창의 역사 신라의 건국신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건국초기 지배층의 사회적·공간적 세력 재편 5~6세기 신라에서 보이는 정복 국가의 흔적 1~3세기 신라는 정복 국가의 길을 걸었다 4장 신라 왕경의 형성과 변화-6세기 초의 왕경은 보수와 혁신의 최대 격전장이었다 1~5세기 왕경의 형성과 지방의 관계· 1~5세기 왕경 내 도시의 형성과 6세기 초의 신라 비문 5세기 신라 왕경 내 도시의 공간적 이미지 6세기 초 이후 왕경 내 도시의 혁신 주석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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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근대 이전에 통일신라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진 통일 제국은 별로 많지 않았다. 잘해야 로마제국이나 아테네 주도의 그리스, 알렉산더제국 정도가 아닐까 한다. 프랑크왕국이나 신성로마제국 등의 영향력이 미쳤던 범위는 분명 신라보다 많은 인구를 가진 영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처럼 철저하게 지방관을 파견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신라보다 더 큰 나라였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신라가 큰 나라였다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을 사실로서 보기 위해서이다.
--- p.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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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왕경에 있었던 그 어떤 집에도 온돌은 존재하지 않았다. 온돌은 취사를 위해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땔감을 보온을 위해 사용하게 한다. 온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제 초기 경주 주변의 산은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신라 왕경의 땔감 문제를 검토하는 데 온돌이 없는 다른 나라의 예가 참조된다. 최근까지도 연료용으로 땔감을 사용했던 항주杭州를 가보고서 놀란 적이 있다. 숲이 너무나 잘 가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항주 사람들이 온돌을 사용했더라면 그처럼 울창한 숲이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p.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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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정복사업, 신라에의 항복, 반란과 이탈에 관한 기록을 표로 정리해보았다. 이를 두 시기로 나누고 해당 지역을 지도에 표시해놓고 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1차 팽창기에는 태백산맥의 동쪽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즉, 경주 남쪽과 북쪽 방향으로 영토의 확장이 이뤄졌다. 남쪽과 북쪽 방면으로의 진출은 그 지형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합리적이다. 2차 팽창기에는 현재의 태백산맥을 넘어 동북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팽창 방향은 동심원적인 전염확산傳染擴散의 형태이다.
--- p.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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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왕국, 신성로마제국보다 더 컸던 나라, 신라
유럽에서 근대 이전에 통일신라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진 통일 제국은 기껏해야 로마제국, 그리스, 알렉산더제국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반도의 한 구석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신라의 ‘스케일’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대륙의 지배자 고구려도 아니고 신라의 규모가 ‘장난이 아니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대체 어떤 사료를 근거로 했기에 이렇게 당당하기까지 한 것일까. 특급 사료를 발굴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삼국유사>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신라 전성기에 경중京中에 17만 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 <삼국유사> 진한辰韓 조 -본문 23p- 저자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경중, 즉 신라의 수도 경주에 17만 8,936호가 있었다는 구절. 호의 구성원을 약 5명으로 잡는다면 당시 경주에만 약 90만 명이 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도의 인구가 이 정도였다면 신라 전체의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저자의 계산대로라면 114만 호, 약 570만 명이다. -본문 35p- 물론 인구수가 국가 규모를 전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라의 인구가 이 정도 규모였다면 그동안 우리가 생각한 신라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이런 의도로 책의 서두에서 신라의 인구수를 구체적으로 규명했는데, 이는 ‘신라는 작은 나라였다’는 암묵적인 인식을 털어버리고 신라의 위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함이라고 강조한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저자 이기봉은 역사학자가 아닌 지리학자이다. 그는 역사는 역사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오히려 시각을 좀 달리 해서 보면 그동안 역사학 방법으로는 찾을 수 없었던 신라사의 이면을 밝혀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11p). 그래서인지 저자가 신라사에 접근하는 방법은 역사학계에서 보면 매우 이색적이다. 일단 역사학자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경주의 호수를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기誤記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그런 주장이야말로 그동안 신라사의 베일을 벗기는 데 큰 장애가 되어 왔다고 반박하면서 고대부터 현재까지, 서양에서 동양에 이르기까지 인구 변천 과정을 예로 들면서 신라의 실제 인구수 파악에 나선다. 그런데 왜 저자에게는 신라 경주의 인구가 중요한가. 신라의 수도 경주의 인구가 약 120만 명이라고 한다면 그만한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가 신라의 ‘스케일’을 강조한 것은 신라의 외적 규모를 단순히 강조해서 우리 민족이 이렇게 거대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우리가 신라를 너무 작은 나라로 치부한 나머지 신라 사회의 이면에서 작동한 사회구조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 아니냐는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저자는 아주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과연 120만 명의 경주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살았을까? 이 문제를 풀어가는 데 동원되는 저자의 지리학적 시각은 참신함을 넘어 탁월하기까지 하다. 발로 뛰는 지리학자가 아니면 쉽게 내놓을 수 없는 주장이다. 저자는 일단 이 문제가 식량 조달 시스템의 문제이자 조달된 식량을 어떻게 조리해 먹을 수 있었는가의 문제라고 규정한다.(102p) 사실 신라의 운송 시스템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경주 인근에는 동해를 끼고 있는 울산이 위치해 있고, 경주와 울산까지의 지형은 매우 평평하다. 일단 울산까지 배를 이용해 식량을 가져오기만 하면 경주까지 운송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과연 그 식량을 어떻게 조리해 먹는냐이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 “밥을 짓는 데 숯으로 하지 땔감으로 하지 않는다”라는 대목이다. 신라인들은 정말 숯으로 밥을 지어먹었을까. 이 구절은 경주의 규모와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17만 8,936호나 되는 경주인들이 매일 밥을 짓는 데 사용하는 땔감을 인근 산에서 얻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경주의 산이라는 산은 모두 민둥산이 되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추측이다. 농담이 아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시기에 찍은 경주 남산과 소금강산, 명활산의 모습은 모두 민둥산이었다. 일제가 산림을 수탈해 가서가 아니라 경주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썼기 때문이다. 당시 경주의 인구는 고작 3,363호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라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저자는 17만여 호가 되는 고대 경주인들이 한정된 자원으로도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숯을 사용해 취사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숯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만큼 경주의 인구가 많았다는 반증이 되지 않을까. <삼국유사>의 기록이 단순한 과장이거나 무의미한 내용이 아니라는 말이다. 더군다나 경주는 당시 북방 지역과 달리 온돌을 이용하지 않았다. 난방을 위해 대량의 나무를 소비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이다. 신라인들이 취사에 숯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더더욱 짙다. 정복국가 신라의 전투 성향 역사학에 지리학을 접목한 저자의 신라사 연구는 신라의 탄생 배경과 신라의 대외 팽창 성격을 분석하기에 이른다. 즉 저자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건국 설화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금성'의 현재적 위치를 찾기 위해 경주 시내의 지리를 샅샅이 분석한다(214p). 저자의 해석은 이러하다. “금성은 대릉원 일대의 남쪽에 있었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곳은 북천이 범람할 경우 경주 시내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지형이 평탄하기 때문에 해자를 두른 소형 성곽을 만들기에도 적합한 곳이다.” 경주 시내의 지리를 꿰뚫고 있지 않으면 내놓을 수 없는 주장이다. 신라의 전투 성향을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도 흥미롭다(249p).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1~3세기 신라의 전투 기록을 꼼꼼히 검토한 저자는 신라의 1차 팽창기가 태백산맥의 동쪽 지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즉 경주의 남쪽과 북쪽 방향으로 영토 확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2차 팽창기는 태백산맥을 넘어 동북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특히 가야와의 전투 기록은 1차 팽창기에만 나타나고 있는 반면, 2차 팽창기에는 백제와의 전투가 잦아지고 규모도 커진다. 이는 2차 팽창기에 신라가 낙동강 중상류 지역을 진출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고 본다. 즉 낙동강 중상류 지역을 놓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는 말이다. 저자는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볼 때 신라의 정복 전쟁 과정, 즉 먼저 태백산맥 안쪽에서 가야와 인접국을 정복하고 다음엔 태백산맥을 넘어 백제와 겨루는 과정은 합리적이었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를 매우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신라의 비밀, 수도 경주에 있다 이처럼 저자는 신라의 지형적 특성, 자연 환경, 지역에 따른 생활방식 등 기존 역사학계에서는 좀처럼 시도되지 않는 방식으로 신라사를 그려내고 있다. 신라의 지리적 배경이 신라사의 본질이 될 수는 없겠지만 신라에 관한 기록을 좀 더 깊이 있게 해석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12p). 그리고 그 중심에는 경주가 자리하고 있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였다. 저자가 경주를 베이스캠프 삼아 신라 탐사에 나선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국사에서 수도의 역할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정도(수도를 정하는 일)는 곧 국가의 운명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고려의 수도이자, 고려 귀족의 아지트인 개성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단재 신채호가 건국 이래 최대 사건이라고 지목한 묘청의 난도 서경천도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에도 한국사에서 천도 문제는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차대한 일이었다. 수도에 모든 기득권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수도는 곧 권력이자 국가였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와 같은 수도의 중차대한 상징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수도는 국가의 정치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최고 중심지로 통한다. 국가의 핵심적 특징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이 수도라는 의미다. 반드시 동일한 과정을 밟는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수도의 역사는 곧 국가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라의 수도 경주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접근할 수 있다. 경주는 신라를 보는 창이다. 따라서 경주의 탄생 과정이나 사회 체제, 6~7세기에 불어닥친 외적 변화를 먼저 파악하는 것은 신라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특히 저자가 시도한 지리학적인 접근 방법을 비롯해 다양한 연구 방법을 역사학과 접목한다면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신라사의 새로운 이면을 발굴해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