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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말
[프롤로그] 베이징에서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 라오서 - 베이징을 사랑한 작가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 새로운 역사는 없다 차이위안페이 - 근대 교육의 선구자 리다자오 -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루쉰과 저우쭤런 - 베이징에서의 세월들 에드거 스노 - 서행만리(西行萬里) 신채호 - 울분 속에 살다 간 우국지사 주요섭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작자가 본 베이징 [에필로그] 낡은 베이징, 새로운 베이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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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그 유구한 역사로 많은 문화 유적이 남아 있는 유명한 관광 도시이다. 베이징 정중앙에는 흔히 ‘구궁(故宮)’이라 부르는 쯔진청(紫禁城)이 있고, 그 앞에 중국인이 넓이로는 세계 최대라 일컫는 톈안먼 광장이 있다. 톈안먼 광장의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한 관광객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쯔진청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베이징의 명동’이라는 왕푸징다졔(王府井大街)를 활보하게 마련이다.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왕푸징 보행가(步行街)의 규모 역시 만만치 않으니, 외국인 관광객뿐 아니라 중국의 내국인 관광객 역시 이에 압도당할 정도다.
한 상하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유명한 왕푸징에 가 보았는데, 10분가량을 걸었는데도 거리가 끝나버릴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베이징에는 왕푸징이 여러 군데 있는 건가요?’ 하고 물었을 정도였다.” 왕푸징 거리는 흔히 우리나라 명동에 비유된다. 실제로 이곳에는 관광객의 시선을 빼앗는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사시사철 넘쳐 난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관광객 중 바로 이곳에 중국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문호의 옛집이 기념관으로 만들어져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아니, 중국에 그런 작가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그는 바로 베이징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자라 베이징에서 죽은, 베이징이 낳은 최고의 소설가 라오서(老舍, 1899∼1966)이다. 그는 젊은 시절 학생들을 가르치고자 산둥 지방과 영국 런던에서 살았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생애 대부분을 베이징에서 보냈다. 그가 만년에 살았던 집이 바로 이곳 왕푸징 일대에 속하는 베이징 시 둥청구(東城區) 덩스커우시졔(?市口西街) 펑푸후퉁(?富胡同) 19호이다. 현재는 라오서 기념관으로 개조되어 사람들을 맞고 있다. ---「라오서 - 베이징을 사랑한 작가」중에서 중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유명 인사들 역시 고향이나 근거지를 떠나 베이징에 오면 으레 회관에 자리를 잡았다. 1912년 신해혁명 이후 쑨원(孫文, 1866∼1925)이 베이징에 올라왔을 때도 동향인들이 세운 후광 회관(湖廣會館)에서 그를 위한 환영식이 열렸다. 이곳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가장 많은데, 명나라 명재상인 장쥐정(張居正)과 청 대의 학자 지윈(紀?), 쩡궈판(曾國藩), 장타이옌(章太炎) 등을 꼽을 수 있다. 루쉰과 저우쭤런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밝히겠지만, 루쉰은 자신의 고향인 사오싱 회관에서 무려 8년이나 머물면서 수많은 작품들을 써 냈다. 그리고 1920년 2월 마오쩌둥이 잠시 베이징에 올라왔을 때는 자신의 출신지를 따라 후난 회관(湖南會館)에서 잠시 기거했다. 난하이 회관은 광둥성 난하이 출신 경관(京官)들이 구매해 동향인들이 베이징에 올라왔을 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곳이다. 캉유웨이는 1882년 과거시험을 보려고 처음 베이징에 올라왔을 때부터 1898년 무술정변으로 망명길을 떠날 때까지 16년간 이곳에서 살았다. 난하이 회관은 모두 13개의 독립된 가옥에 190여 칸의 방을 갖춘 대회관으로, 캉유웨이는 그 가운데 일곱 그루의 오래된 홰나무가 심어져 있어 ‘치수탕(七樹堂)’이라 불렸던 곳에 살았다. 캉유웨이는 난하이 회관을 바다에 비유하고, 자신이 머물던 방은 그 바다에서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떠다니는 한 척의 배로 여겨 ‘한만팡(汗漫舫)’이라 불렀다. 이곳이야말로 무술변법의 주인공인 유신파 인사들이 무람없이 오가며 구국의 방책을 숙의하던 근거지였던 것이다. 캉유웨이는 이곳에서 [만국공보]를 창간하고 변법유신을 선전하는 글과 황제에게 올릴 상소문 등을 집필했다. 나중에 그는 이 가운데 일부를 모아 《한만팡 시집》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냈다. 현재 난하이 회관은 원래 모습은 간 데 없고 100호가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잡원(大雜院)이 되었다. 본래 베이징의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인 사합원(四合院)은 한 가족이나 하나의 호구가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1949년 신중국 수립 이후, 특히 문혁 이후 하나의 사합원을 개조해 새로 방을 들이거나 해서 직업이나 신분, 나아가 경제적인 조건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본래의 면모를 잃게 되었는데, 이것을 대잡원이라 부른다. 이것은 말 그대로 ‘크고 잡다하며 어지러운 정원(大而雜亂的院子)’이라는 의미이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 새로운 역사는 없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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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통에 살았던 사람들
1900년대의 중국은 제국이 해체되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는 혼란의 시기였다. 《후통, 베이징 뒷골목을 걷다》는 베이징 뒷골목에서 당시를 살아간 인물들을 통해 혼란기의 중국 베이징을 소개한다. 이들은 후통의 어느 한구석에서 나라를 위해, 미래를 위해, 또 가족을 위해 노력하고 투쟁했다. 그들을 기념하는 후통들은 때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고, 혹은 기념관으로 변하기도 했으며, 어떤 것은 아예 사라지기도 했다. 베이징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베이징에서 보낸 중국 최고의 소설가 라오서의 흔적은 샤오양쟈후통과 팡쟈후통에 남아 있다. 그가 살던 집은 기념관이 되어 그 자리에 존재하며, 그가 일했던 곳은 학교로 변신해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이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던 회관과 옛집은 사합원으로 개조되어 이제는 일반인이 살아가는 곳으로 베이거우옌후통에 남아 있다. 중국 근대 교육의 기틀을 다진 차이위안페이가 살았던 둥탕쯔후통과 옛 베이징 대학의 자리도 오늘날 관관객의 발걸음을 이끈다. 루쉰이 나라의 참담한 현실에 고뇌했던 곳은 시쌴타오후통과 바다오완후통이고, 리다자오가 체포된 곳은 베이징에서 가장 긴 후통인 둥쟈오민샹이다. 후통에는 또한 이방인들도 많이 머물렀다. 우리나라의 신채호와 주요섭 등이 머물며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했던 자리도 베이징 후통의 그 어느 곳이고, 미국인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는 쿠이쟈후통에서 마오쩌둥과 홍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집필했다. 이렇듯 베이징 후통에는 시대를 고민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를 위해 저자 조관희는 수없이 베이징을 방문하며, 역사의 현장과 그 인물들을 사진으로 추억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저자가 그동안 찍어 온 4만여 장의 사진 중에서 선별한 베이징 후통에 대한 도판과 중국 역사에 대한 풍부한 이해로 재구성한 이들의 발자취는 당시 분위기, 현재 후통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 책은 베이징 곳곳의 사라져 가는 후통을 찾아감으로써 역사를 만들고 혁명의 시대를 보낸 사람들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