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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 에세이 ── 음식과 문인文人
『한漢 무제武帝』 제1부 웅재대략 제2부 중국의 판도를 넓혀라 제3부 흉노와의 싸움 제4부 서역 경영의 야망 제5부 재정 개혁 제6부 신비술의 횡행과 무고의 재난 【한 무제의 연보】 『당唐 태종太宗』 제1부 성덕천자의 등장 제2부 수나라 말기의 군웅 경쟁 제3부 장안 진격 제4부 천책상장 제5부 현무문의 정변 제6부 정관성세 제7부 소릉춘몽 【당 태종의 연보】 『칭기스칸』 제1부 고난의 성장 과정 제2부 제1차 즉위 제3부 옛 친구와의 결별 제4부 두 영웅의 대결 제5부 대몽골국의 성립 제6부 서하ㆍ금과 대결하다 제7부 서역 정벌 제8부 큰 별 지다 【칭기스칸의 연보】 『명明 주원장朱元璋』 제1부 원나라 말기의 반란 제2부 주원장의 등장 제3부 대장군으로의 길 제4부 집경 공략 제5부 파양호에서의 결전 제6부 장사성의 최후 제7부 수도 함락 제8부 대명 제국의 건국 제9부 군주 독재 체제 제10부 호람의 옥 제11부 스파이 제12부 문자의 옥 제13부 황제의 슬픈 말로 【명 주원장의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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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여는 원삭 원년(기원전 128) 위황후가 낳은 아들로서 무제에게는 첫아들이엇다. 일곱 살 때 황태자 유거로 봉해졌으며 아버지의권유에 의하여『공양춘추』와『곡량춘추』등을 공부한, 학문을 좋아한 황태자였다. 그러나 무제의 재위 기간이 길어지자 자연히 황태자의 지위는 미묘한 것이 되어, 그의주변에는 정국에 비판적인 야심가들이 모여드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무제 자신도 신비술을 좋아하며 점점 주술에 빠져들면서 주위 사람들이 '무고(巫蠱)'를 하여 저주를 퍼붓지는 않을까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무고는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형상을 나무 인형으로 만들어 흙 속에 묻어 상대방의 수명을 단축하도록 주문을 외우는 것인데, 그 동안에도 황족이나 고관들 중의 몇 명이 이 혐의로 처형되기도 했다.
혹리인 강충은 태자 여르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감천궁에서 병상에 누워 있던 무제에게 병의 원인이 무고의 주술때문이라고 부추겼다. 직지수의사자(검찰관)였던 강충은 이전에 태자 여의 불법을 적발한 적이 있어서 그의 미움을 받고 잇었는데, 이미 고령으로 병상에 눕는 일이 많아진 무제가 만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면 태자 여게게 주살당할 것이 뻔하다고 걱정하였던 것이다. 무제는 이 밀고에 귀가 솔깃해져 궁중을 수색하도록 지시했는데 공교롭게도 태자가 거처하는 궁전의 땅속에서 오동나무로 만든 인형 여섯 개가 발견되었다. 궁지에 몰린 태자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강충을 잡아 처형시키는 한편 죄수들을 석방하고 시민을 집합시켜 무기고를 열어 자위력을 갖추고 대비하였다. 감천궁에서 병상에 누워 있던 무제는 이것을 반란으로 착각하고 장안성 서쪽의 건장궁으로 급히 이동하여 승상인 유굴리를 장군에 입명한 다음 부근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조달하여 진압군을 출동시켰다. 5일 동안 전투가 계속된 끝에 태자 여의 군대는 진압되었는데, 태자는 장안을 탈출하여 호현 교외의 가난한 구두공 집에 피신하였다가 결국 발각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정화 2년(기원전 91)의 일이었다. 이때 무제의 나이는66세, 태자는 38세였다. 이로 인하여 태자의 어머니인 위황후도 황후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자살을 권유받았고 태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태자 여가 사형당한 후 그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상소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무제는 자신의 경솔함을 깊이 뉘우치면서 호현에 자사궁(자식의 넋을 기리는 궁전)을 세우고 귀래망사대를 쌓아 태자의 넋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무고 사건 직후, 태자의 억울함을 깨닫게 된 무제는 강충 일족을 멸족시키고 태자 여를 제거하고자 했던 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무고 사건의 파장은 오래도록 지속되어 정화 3년(기원전 90)에는 승상 유굴리와 이사장군 이광리 일족이 창읍왕 박을 태자에 옹립하려고 무고를 했다는 혐의로 주살당했다. 후원 2년(기원전 87) 2월 정묘, 무제는 오작궁에서 70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뒤를 계승한 것은 막내아들인 불릉으로 소제이다. 소제는 총명하였으나 요절하였고, 그 뒤를 이어 곽광의 결단에 의해 태자 여의 손자인 병이가 보위에 올랐다. 바로 선제이다. --- pp.8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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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칭기즈 칸 동맹의 맹주였던 자무카는 쿠이텐에서 패배한 후 잠시 종적을 감추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케레이트족장인 온 칸을 찾아왔다. 민첩하게 머리가 잘 돌아갔던 자무카는 교묘하게도 온 칸을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칭기즈 칸은 온 칸이 그를 받아들인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부자의 의를 맺은 칸에 대한 충직한 자세를 소흘히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장남인 조치를 위하여 온 칸의 딸을 며느리로 달라는 요청을 단번에 거절당하자 제아무리 관대한 칭기즈 칸도 자존심이 상하였다. 사실 칭기즈 칸은 이 청혼을 하기 전에 온 칸의 외아들인 센군에게 그의 아들인 토하사와 자신의 장녀를 맺어주고 싶다고 너지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온 칸에게 정성을 다하고 공경한 칭기즈 칸의 태도에 대하여 센군의 반응은 대단히 냉담한 것이었다.
“우리 쪽의 사람이 칭기즈 칸의 지역으로 간다면 대문 밖에 선채로 언제가지나 멀리 안쪽에 있는 주인의 자리를 쳐다보고만 있게 될 것이나 칭기즈 칸 쪽의 사람이 우리 쪽에 온다면 제일 안쪽 주인의 자리에 앉아 대문을 쳐다보게 될 것이다.” 센군은 내심 칭기즈 칸의 위력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의향을 알아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칭기즈 칸의 제안을 거절해버린 것이다. 즉, 온 칸 부자는 당시 이미 사막 북부 지역 판도의 3분의 1을 장악한 칭기즈 칸과 동맹 관계를 맺고는 있었지만 그를 대등한 동맹자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1203년 봄의 어느 날, 자무카가 갑자기 센군의 막사로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건넸다. “내 아들과도 같은 칭기즈 칸에 대하여 왜 너희는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느냐? 칭기즈 칸은 그 동안 그렇지 않아도 많은 고생을 겪어왔다. 그러한 아이를 나쁘게 말한다면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않을 게야. 자무카는 원래 입놀림이 교묘한 자이니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꾸며댄 것이다.” 치기즈 칸에게 격렬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던 센군은 기다리다 지쳐서 이번에는 직접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려고 하였다. “아버님이 이토록 칭기즈 칸을 생각해주신다 해도 그 녀석은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말젖에도 체하고 양고기도 제대로 삼킬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신다면 할아버지 부이룩 칸이 모처럼 고생해서 모아준 백성들을 과연 그놈은 나에게 통치하도록 내버려둘까요?” 이렇게 말하여도 온 칸은 그 동안의 칭기즈 칸의 공로에 대해 다시 센군을 설득하고자 하므로 결국 센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늙어서 기운이 빠져버린 온 칸은 결국 자신의 아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어 그를 불러 다시 말했다. “만약 하느님이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해도 하는 수 없구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앞으로 모든 일을 너에게 맡기마.”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온 칸이 갑자기 칭기즈 칸에게 사절을 보내왔다. 청혼을 받아들이고 혼인 축하 연회를 개최하겠으니 방문해달라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고맙게 그 뜻을 받겠다고 말한 후 사잘을 돌려보냈다. 혼약 축하 연회석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 중임을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pp.205~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