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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1부 알피니즘, 근대 등반의 시작 1. 등산의 여명기 2. 등반의 황금시대 개막 3. 알프스의 은시대 4. 북벽에 문을 연 철시대 2부 등산 무대의 광역화와 히말라야 도전 5. 등산 무대의 광역화와 거봉 도전 6. 8000미터를 향한 지난한 도전 7. 거봉 도전의 뒷이야기 3부 8000미터 거봉 도전의 시대 8. 히말라야 등반의 황금시대 9. 8000미터 거봉 초등정 시대의 개막 10. 히말라야 8000미터의 무대 11. 새로운 변화, 히말라야 등로주의 4부 새로운 한계에 도전하는 알피니즘 12.알파인 스타링? 새 시대를 열다 13.거봉에서 이루어진 단독 등반과 무산소 등정 14.슈퍼 알피니즘 시대의 서막이 열리다 15.진정한 알피니즘 정신을 찾아서 5부 알피니즘을 빛낸 선구자들 세계 등산사 연대표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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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산에 오르는 한 계속 읽어야 할 책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가파른 암벽을 선등하는 산악인이 있다. 여전히 30대 같은 날렵한 몸매로 성큼성큼 산을 오르는 그가 이 책의 저자 이용대 교장이다. 그는 ‘한국 등산 교육의 선구자’, ‘공부하는 산악인의 표상’, ‘진정한 생애 현역’ 등의 수식어로 불리며 존경받는 한국 산악계의 산증인이며 대표적 산악 칼럼니스트이다. 오랫동안 직접 취재하고 자료를 모아 이 책을 완성했다.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는 1930년대 한국 최초의 산악 단체인 ‘백령회’의 결성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통틀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되는 세계 등산사이다. 이 책은 알피니즘 초기 태동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200여 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인간 한계에 맞서며 알피니즘의 변천을 이끈 위대한 알피니스트들의 목숨 건 도전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근대 등반 초기의 도판들을 포함하여 200여 개의 진귀한 도판들을 싣고 있다. 오늘날 최첨단 소재와 제작 기술을 통해 발전한 등산 장비들의 변천사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여러 표기로 적혀 온 숱한 등산 용어와 인명, 지명을 국립국어원의 대대적인 감수를 거쳐 올바로 적었다. 지구상의 수많은 산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해 온 사람들이 이룩한 주요 등정 기록과 흥미로운 일화, 그리고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간 승리의 여정이 이 책의 일관된 주제이다. 이 책은, 인문적 교양을 만끽할 수 있는 역사서이자 극한의 상황에서 불굴의 의지를 불태운 알피니스트들의 열전이다.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에서 저자는 몽블랑 초등을 통해 시작된 알피니즘을 근대 등산의 개막으로 평가한다. 알피니즘은 그 후 용감하고 야심찬, 그리고 산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극복하며 그 경험을 전수하면서 오늘날까지 빠른 속도로 변천해왔다. 과거의 경험과 실험의 축적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발전된 등산은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등산의 역사와 전통의 실체를 읽는 의미가 있다. 이 책에는 등산의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등반가들이 등장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그들의 주요 등반 기록과 업적을 포함한 일화들을 실었으며, 일반인들이라면 평생을 살아도 체험하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진 이야기들을 조명했다. 각종 등반 기록들로 봤을 때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세계적인 산악 강국에 꼽혔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자부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른바 산악 문화가 너무나 척박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에게는 우리말로 쓰인 세계 등산사가 한 권도 없었다.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의 출간은 실로 한국 산악계 전체가 경하해야 할 쾌거라 할 수 있다. 극한에서의 좌절과 희열… 정상에 그들이 있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기어오르는 것은 어린아이의 본능이다. 그 본능에 가장 충실한 이들이 산에 오른다. 알피니스트들은 결코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환경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때로 목숨까지 위태로운 위험한 등반을 계속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1923년, 젊고 촉망받는 에베레스트 원정 대원이었던 조지 맬로리는 어느 날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한다. 강연회가 끝날 때쯤 한 부인이 맬로리가 방금 전까지 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은 듯 엉뚱한 질문을 한다. “도대체 그 위험한 에베레스트에는 왜 오르려는 거예요?” 순간 짜증이 난 맬로리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말이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 “그것이 거기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였다. 맬로리의 이 말은 때때로 목숨이 위험한 상황을 겪으면서도 험준한 산에 도전하는 알피니스트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대변해주었다. 알피니스트들은 단순하게도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고 말한다.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는 어찌 보면 무구한 욕망의 소유자인 그들이 벌이는 좌절과 피눈물과 사투를 조명한다. 그리고 그들의 정상 등정의 장면을 담았다. 여기서 그 몇 가지 일화들을 소개한다. 아이거의 ‘살인 벽’ 꼭대기에 서다 알프스의 북벽 등반기로 일컬어지는 1930~40년대에는 알프스의 거의 모든 봉우리의 암벽들이 초등된다. 그러나 마터호른, 아이거, 그랑드 조라스의 북벽만은 미등인 채로 남아 비상한 관심 속에서 전위적인 산악인들의 도전을 받는다. 이때가 등로주의의 절정기였다. 1931년 마터호른이 독일의 슈미트 형제에 의해 초등된다. 그러자 아이거와 그랑드 조라스의 북벽은 더욱더 줄기찬 도전을 받는다. 아이거 북벽은 독일어 철자인 Eiger Nord Wand를 Eiger Mord Wand로 바꿔 ‘아이거 살인 벽’이라 부를 정도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1938년 아이거 북벽의 등반 과정은 험난했다. 헤히마이어와 푀르크가 ‘하얀 거미’라 불리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쫓아오는 카스파레크와 하러를 기다리는 중에 눈사태가 덮친다. 헤히마이어는 재빨리 피켈을 얼음에 박아 몸을 버티며 한 손으로 푀르크의 목덜미를 잡아 그의 추락을 막는다. 아래쪽에 있던 카스파레크도 얼음에 피켈을 박고 로프에 연결된 하러를 당겨 추락을 막았으나 맨손으로 피켈 날을 누르고 있다가 낙석에 맞아 손등이 찢어진다. 이튿날에도 험난한 행군이 계속되었다. 오버행을 넘던 헤히마이어가 미끄러져 추락하는 것을 푀르크가 손으로 붙잡으려다 크램폰의 날카로운 발톱에 손가락을 찔리면서 함께 추락한다. 그러나 헤히마이어가 크램폰을 얼음에 박으며 제동을 한 뒤 푀르크를 붙잡아 추락을 정지시킨다. 이들은 폭풍설 속에서 마지막 난코스를 넘어 드디어 아이거 북벽 초등을 이룩한다. 이날은 알프스 등반 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날이었다. 1930년대는 등산에서도 국가 간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작용하던 때였다. 올림픽에 출전한 운동선수가 자국의 국위선양을 표방하고 그라운드에서 뛰듯이 산악인들은 자국 민족의 우월성을 앞세워 초등 경쟁을 벌였다. 마터호른과 아이거 북벽이 독일인들에 의해 등정되자 이탈리아의 리카르도 카신은 프랑스 사람들이 노리고 있던 그랑드 조라스를 기습적으로 등정하여 자국의 자존심을 높이기도 한다. 극한의 마터호른을 ‘보다 어렵게’ 오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는 알프스 북벽에서의 동계 단독 등반이라는 마지막 게임이 시도된다. 이 도전의 주역은 발터 보나티였다. 1955년 드뤼의 남서벽이 발터 보나티에 의해 5일 만에 단독으로 초등된다. 그는 이 등반에서 단 1개의 볼트도 사용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는 단독 등반을 감행하기 위해 일주일 분량의 식량과 장비를 큰 자루에 담아 끌어 올리며 운반한다. 그는 드뤼 남서벽을 오르고 나서 뒤에 ‘새로운 세대의 산악인이란 사전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지워 버릴 수 있도록 등반 기량을 연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1965년에는 마터호른 북벽을 동계에 단독 직등으로 오르는 위업을 달성한다. 극한의 환경에 극도로 어려운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단독 등반을 위해 로프 길이 40미터를 오른 후 피톤을 박아 로프를 고정하고 다시 출발 지점까지 40미터를 하강하여 배낭을 짊어지고 피톤을 회수하면서 다시 40미터를 오르는 식으로, 엄청난 체력이 필요한 등반을 감행한다. 그는 두 번째 날 밤에 좁은 바위 턱에서 비바크 색을 뒤집어쓰고 고독과 불안과 싸우며 비바크를 한다. 그는 얼음이 깔린 가파른 슬래브 지대를 어렵게 횡단한 후 저녁 무렵 세 번째 비바크에 들어간다. 그는 어려운 오버행 구간을 돌파하기 위해 상당량의 식량과 연료를 버린다. 오버행 구간을 지난 후 혹한을 견디며 네 번째 고독한 비바크를 한다. 다음 날 다시 장비와 식량을 버려 짐 무게를 줄이고 암질이 푸석한 오버행 구간을 넘어 선다. 오르고 또 오른 끝에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곳이 나타났다. 마터호른의 정상이었다. 영광스러운 승리 뒤에는 목숨 건 하산 ‘등산은 무사히 집에 돌아올 때 완성된다’는 말이 있다. 안전한 하산 또한 정상 등정만큼이나 중요한 도전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1950년 당대 최고의 산악인들로 구성된 프랑스 원정대가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한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승리 뒤에는 예기치 못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산 중에 폭풍설에 갇힌 이들은 최악의 비바크를 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다. 베테랑인 모리스 에르조그는 산소 결핍으로 환각 상태에 빠진다. 그는 손에서 장갑이 벗겨져 나갔지만 배낭 속에 여벌의 장갑이 있는 것도 까먹고 맨손으로 하산하다가 양손에 동상을 입는다. 에르조그보다 먼저 내려오던 루이 라슈날은 중간에 100여 미터를 추락하면서 피켈과 한쪽 크램폰, 방한모자, 장갑 등을 잃어버리고 발에 동상을 입는다. 두 사람은 5캠프에서 리오넬 테레이와 가스통 레뷔파를 만나 응급 치료를 받는다. 이들은 5캠프에서 하룻밤을 지새운다. 라슈날의 발이 부어올라 등산화를 신을 수 없게 되자 테레이가 자신의 큰 신발을 벗어 주고 대신 라슈날의 등산화를 칼로 찢어 신는다. 설상가상으로 테레이와 레뷔파는 전날 고글을 잠시 쓰지 않은 탓에 설맹에 걸려 시력을 잃고 만다. 장님 두 사람과 손발을 못 쓰는 두 사람의 하산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행 길이었다. 급기야 고통을 못 이긴 에르조그가 동료들에게 자신을 버리고 갈 것을 청한다. 하지만 끈끈한 동료들은 그를 혼자 남게 하지 않았다. 온종일 걸었지만 4캠프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크레바스 속에서 악몽 같은 비바크를 감행한다. 밤새 추위에 떨며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 지새운 그날 밤, 라슈날은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였다. 이들은 다음 날 그들을 구조하러 온 다른 대원에 의해 구출되어 기적적으로 생환한다. 안나푸르나를 초등하고 살아남은 이 승리의 대가로 라슈날은 두 발을 에르조그는 손과 발을 진상해야 했다. 29세 청년의 얼굴이 80세 노인의 얼굴로 난공불락의 봉우리 낭가 파르바트는 1953년에서야 독일 원정대에 의해 비로소 초등된다. 이 원정대에 29세의 헤르만 불이 속해 있었다. 그는 강한 의지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심신을 단련한 세계적인 등반가다. 그는 힘든 조건만을 골라 겨울철과 야간에 단독 등반을 하면서 스스로 냉혹한 채찍질을 하였다. 독일 원정대가 낭가 파르바트 정상 공격을 시작할 때는 몬순이 불어 닥쳤다. 기상이 험악해지자 대장은 퇴각 명령을 내렸으나 헤르만 불은 혼자서 최종 캠프를 떠나 정상으로 출발한다. 정상으로 향하던 중 방풍의, 피켈, 카메라만 남기고 나머지 장비는 크레바스에 넣어 둔다. 그는 7820미터 지점에서 흥분제 두 알을 먹고 드디어 오후 2시 낭가 파르바트 정상에 선다. 이후 하산 과정은 너무도 유명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두 차례의 비바크를 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다량의 혈액순환 촉진제를 복용한 그는 환청과 환각 상태에 시달리면서 하산을 재촉한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이 마비되고, 빈사의 상태로 40여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가까스로 5캠프에 도착한다. 29세 청년이던 그가 사경을 극복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모습은 80세 노인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죽음을 극복하고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그에게 베풀어진 분위기는 너무나 냉랭했다. 퇴각 명령을 어기고 등정한 행위가 대장 측의 비위를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장 자신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동상에 걸린 그의 발가락을 치료해 주지 않았다. 이후 동상 후유증으로 그는 발가락 2개를 절단한다. 불은 냉대와 비난 속에서 자신의 저서를 통해 스스로를 변호한다. 8000미터급의 거봉은 인간으로서 최후의 모험을 단행하지 않고는 등정을 이룰 수 없다. 이 원정을 지휘한 사람들이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신중성과 기상에 대한 오판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모험을 강행했다. 로체 남벽, 소름 돋는 아찔한 모험의 연속 여러 세계적인 알피니스트들이 등정에 도전했으나 패퇴한 로체 남벽을 최초로, 그것도 원정대 없이 단독으로 등정한 토모 체센의 등반 과정은 소름 돋는 아찔한 모험의 연속이었다. 산소가 희박한 8000미터에 가까운 고도에서 로프도 묶지 않고 동료의 확보도 받지 않은 채로 수십 미터 길이의 살얼음이 깔린 가파른 암벽을 크램폰을 신고 횡단하는, 극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짐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침낭과 매트리스까지 버린 채 급변하는 날씨가 다소 누그러들기를 기다리며 수시로 비바크를 해야 했다. 그의 비바크는 누워서 쉬는 것이 아니라 혹한 속에서 그냥 선 채로 원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결국 등정과 하산에 성공한 토모 체센은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신은 간절히 바라던 것을 엄청난 노력을 들여 이룩한 적이 있는가? 바로 그때의 감정이 바로 이 순간의 내 감정이다. 로체는 내 영혼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실행에 옮겨야 하는 그 불확실성과 모험을 종종 느끼고 싶다. 인간은 욕망이라는 돌을 미지의 세계로 던져 놓고 그것을 따른다. 인류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인간이 서다 오늘날 에베레스트는 매년 100명 이상이 오르고 2002년에는 하루에 54명이 등정할 정도로 ‘대중적’인 산이 되었지만, 인간이 그곳에 처음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선구자들의 목숨 건 도전이 필요했다.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한 첫 탐색대가 파견된 것은 1921년이었다. 비로소 첫 등정이 이루어진 것은 1953년이다. 32년간 15명의 목숨이 에베레스트에서 스러졌다. 에베레스트의 초등은 영국의 제9차 원정 만에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에 의해 이루어진다. 둘은 정상을 등정한 후 ‘누가 먼저 에베레스트에 올랐냐’는 질문에 “누가 먼저 올랐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두 사람은 어려운 문제를 함께 해결했을 뿐이다”라고 대답한다. 헬멧을 쓰면 목만 부러지고 죽지 않는다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에서는 알피니스트들의 사투와 함께 등산 발전에 기여한 재밌는 일화들도 곁들이고 있다. 등반 시 헬멧을 착용하는 아이디어는 ‘살인 벽’이라 불리던 아이거 북벽을 초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헤히마이어의 ‘머리’에서 나왔다. 우직하기로 소문난 그가 어느 날 돌로미테에서 버려진 군용 철모를 주워 머리에 쓰고 형을 찾아갔다. 그는 형에게 자신의 머리를 몽둥이로 힘껏 내리쳐 달라고 부탁했다. 형의 몽둥이를 우직하게 받아낸 그는 목 부상으로 일주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진다. 일주일 만에 회복된 그는 “헬멧을 쓰면 목만 부러지고 죽지 않는다”며 산에 다닐 때 꼭 헬멧을 착용한다. 그의 우직한 목이 훗날 많은 생명을 살렸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