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소득공제 강력추천 정가인하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조선 천재 1000명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의 재구성
신정일
다산초당 2007.10.08.
베스트
역사 top20 1주
가격
15,000 7,500 50% 인하
10 6,750
YES포인트?
370원 (5%)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이 상품의 태그

책소개

목차

발문 - 차령 이남을 넘어 동아시아의 맥으로 / 김지하
프롤로그 - 조선 천재들은 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는가?

제1부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1. 한 통의 비밀 장계 - 눈물을 흘린 이유로 죽은 자들, 조대중과 김빙
2. 선비들의 시대, 대격돌의 시대 - 승려들의 희생, 서산대사와 사명당
3. 천재 중의 천재, 정여립 - 그를 천거한 두 사람의 비극, 노수신과 백유양
4. 돌이킬 수 없는 배신 - 그가 배신한 두 스승, 이이와 성혼
5. 선조의 두 얼굴 - 선조의 왼팔과 오른팔, 유성룡과 이항복
6. 상소 공방전과 대동계의 비밀 - 죽이는 자와 죽는 자, 정철과 최영경
7. 얼굴 없는 주인공 - 얼음과 불의 엇갈린 운명, 송익필과 이발
8. 죽음의 고발자 - 최대의 피해자들, 정언신과 정언지
9. 선조가 지시를 내리다 - 당의 운명을 걸고 맞서다, 이산해와 조헌
10. 정철의 몰락 - 사제 간의 비참한 말로, 박순과 정개청

제2부 비망록 - 기축옥사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서
1. 실패한 혁명인가 억울한 옥사인가
2. 논쟁의 불꽃이 튀다
3. 반역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들
4. 아름다운 꿈, 대동

저자 소개1

辛正一

문화사학자이자 도보여행가.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으로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가져온 도보답사의 선구자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쳤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 10대 강 도보답사를 기획하여 금강·한강·낙동강·섬진강·영산강 5대 강과 압록강·두만강·대동강 기슭을 걸었고, 우리나라 옛길인 영남대로·삼남대로·관동대로 등을 도보로 답사했으며, 400여 곳의 산을 올랐다.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길을 걸은 후 문화체
문화사학자이자 도보여행가.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으로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가져온 도보답사의 선구자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쳤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 10대 강 도보답사를 기획하여 금강·한강·낙동강·섬진강·영산강 5대 강과 압록강·두만강·대동강 기슭을 걸었고, 우리나라 옛길인 영남대로·삼남대로·관동대로 등을 도보로 답사했으며, 400여 곳의 산을 올랐다.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길을 걸은 후 문화체육관광부에 최장 거리 도보답사 길을 제안하여 ‘해파랑길’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었다. 2010년 9월에는 관광의 날을 맞아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을 만든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독학으로 문학·고전·역사·철학 등을 섭렵한 독서광이기도 한 그는 수십여 년간 우리 땅 구석구석을 걸어온 이력과 방대한 독서량을 무기로 《길 위에서 배운 것들》, 《길에서 만나는 인문학》, 《홀로 서서 길게 통곡하니》,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곳 33》, 《섬진강 따라 걷기》,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전3권), 《낙동강》,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등 60여 권의 책을 펴냈다.

신정일의 다른 상품

품목정보

발행일
2007년 10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385쪽 | 684g | 153*224*30mm
ISBN13
9788992555517

책 속으로

무릇 여립과 평소에 친밀하게 지내어 편지를 주고받은 자는 다 연루를 면치 못하게 돼 선비들 중 죄를 얻게 된 자가 많았다. 그 중에 고문을 받고 죽은 자는 전 대사간 이발, 이발의 아우 응교, 이길, 이발의 형 이급, 병조참지, 백유양, 유양의 아들 생원 백진민, 전 전라도사 조대중, 전 남원부사 유몽정, 전 찰방 이황종, 전 감역 최여경, 선비 윤기신, 정여립의 생질 이진길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이발과 백유양의 집안이 가장 혹독한 화를 입었다. 그리고 연루돼 귀양 간 자는 우의정 정언신, 안동부사 김우옹, 직제학 홍종록, 지평 신식과 정숙남, 선비 정개청이요, 옥에 갇혀 병이 나서 죽은 자는 처사 최영경이었다. 옥사는 덩굴처럼 얽히고 뻗어나서 3년을 지내도 끝장이 나지 않아 죽은 자가 몇 천 명이었다.---기축옥사의 피해 상황에 대한 유성룡의 발언

“간악한 정철을 남몰래 사주해 어진 최영경을 죽였으며, 나라의 명맥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욕되게 했으니 일본의 히데요시와 같은 인물입니다. 안에 선비 도적들이 있은 후에야 밖에 힘으로 침략하는 외적이 있는 것입니다. 임진왜란도 실은 안의 도적들이 부른 것입니다.”
-기축옥사가 미친 영향에 대한 정인홍의 발언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귀천의 씨가 없다. 천하는 백성들의 것이지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는 없다. 누구든 섬기면 임금이 아니겠는가?”---대동세상에 대한 정여립의 발언

“나는 최영경과 한 번 만나본 교분도 없는데 누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측량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네. 일이 번져 가면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천금같은 몸을 소중히 하게.”
---최영경 구명에 대한 이항복과 유성룡의 대화

“정철은 성질이 강퍅하고 시기심이 많아 질투를 일삼고 사소한 사감에도 반드시 모함으로 보복했고, 뱀과 빈대 같은 성질로 귀신과 불여우 같은 음모를 품었으니 독기가 모여서 태어난 것이며 이에 오직 사람을 상하게 하고 해치는 것을 일삼았습니다. 또한 정철은 진짜 소인 또는 옹색한 소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을 분하게 여겨 최영경을 길삼봉으로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고, 저의 당이 아닌 사람은 사소한 감정에도 쳐서 없애려고 했으므로 그 해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정철에 대한 사헌부의 간언

“그대는 바를 정(正 )자를 아는가?”
“죽고 사는 것을 이미 잊은 것이 30년이 지났네.”---자신의 죽음에 대한 최영경의 발언

“정여립은 전주 사람으로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나 세상을 뒤덮었다. 그는 조정에서 물러나와 집에 있으면서 고매하고 자중해 관직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불러도 가지 않았다. 선비들은 달려가서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정여립의 인품에 대한 조경남의 발언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아직도 명예 회복되지 못한 혁명가, 정여립!
의혹의 이름 정여립, 그 비극적 생애를 만난다!

조선 역사상 신원되지 못한 천재가 두 명 있다. 허균, 그리고 정여립. 당대에 문사철을 고루 갖춘 아름다운 선비라 불렸으면서도 족보에서조차 지워져야 했던 비극적 인물. 역사는 어떻게 그를 왜곡해 왔던가? 이제 그 진실을 만날 때가 됐다.

정여립은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첨정(僉正)을 지낸 희증(希曾)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했으며,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했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됐다. 처음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에 속했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에 가담하여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했다. 이로 인하여 왕의 미움을 사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인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진안군의 죽도에 서실을 세워 활쏘기 모임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죽도선생이라고 불렸다. 1587년(선조 20)에는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세력을 끌어 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했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도망했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했다.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것은 정철 등의 서인이었으며, 동인인 이발, 정언신, 백유양 등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는 등 동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이라 불리게 됐고,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됐다. 정여립에 대하여는 어릴 때부터 잔인하고 포악했으며, '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는 《정감록》의 참설을 퍼뜨려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반면에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로 보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서인과 동인 사이에 벌어진 당쟁의 희생자로서 그가 주도했다는 역모는 조작됐다는 설도 있다.

리뷰/한줄평55

리뷰

8.0 리뷰 총점

한줄평

10.0 한줄평 총점

클린봇이 부적절한 글을 감지 중입니다.

설정
6,750
1 6,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