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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에 쓸려 가듯이 그들이 모두 떠난 후 여수리는 천민의 아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호사를 누렸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며 얼마나 먼 길을 걸었는지 모른다. 여수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길을 걸어 본 바로는 길 끝에 또 길이 있었고, 산이든 들이든 어느 곳 하나 길이 없는 곳이 없었다. 어느 길로 다니든지 길은 말없이 길손을 받아 주었고, 그가 지나가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초연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그 많은 길 중에 어느 길은 다녀도 되고 어느 길은 다니지 말라고 막아 둔다면 길이 막혀 버린 곳은 폐허가 되거나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의 몸을 자라게 하는 건 밥과 잠이지만 영혼을 자라게 하는 것은 용기와 관심이었다. 여수리가 경한을 만나자마자 그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로 한 것은 그때껏 자신이 받은 충분한 자양분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였다. “들판의 풀씨를 생각해 보게. 풀이 뽑아 버린다고 없어지는 것인가? 한 번 생겨 버린 풀은 아무리 열심히 뽑아내도 또 싹이 올라오거든. 신유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 두 번 다시 천주학을 하는 사람이 없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도 감옥에서 굶어 죽은 동정 부부가 생기지 않았는가. 어디 그들뿐이겠나?” 낙타초에 아침 햇살이 비쳐 푸르고 싱싱해 보였다. 수분이 마르며 줄기가 온통 날카로운 가시로 변하는 낙타초. 그 가시 끝엔 신경을 마비시키는 물질이 들어 있어서인지 낙타는 가시투성이의 낙타초 때문에 입안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는데도 그냥 풀을 뜯어먹었다.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는 순간에 낙타는 낙타초를 먹으며 피를 흘리고, 제 피로 입을 축이며 갈증을 식힌다던가. 낙타에게도 갈증은 괴로운 것이었다. 하상은 여수리가 고통을 수레처럼 끌고 다니는 사람 같다는 말을 꿀꺽 삼켰다. 하상이 자기만의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을 오르듯이 여수리 역시 태연한 척 아닌 척하면서도 자기만의 십자가를 무겁게 지고 간다는 사실을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여수리는 그들 부자와의 만남이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그대들이 우리를 이겼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오. 백서가 살아 있는 한 나는 불멸의 혼인 듯 살아 있을 것이고, 그대들의 죄악 또한 영원할 것이오. 나라를 먼저 생각지 않은 나를 사악하다고 욕을 해도 좋고, 내게 돌을 던져도 좋소. 나는 다만 한 포기의 풀이나 다름없는 인생인지라 나라보다 민초들을 먼저 챙겼고 그 사람들의 입이 되어 주었을 따름이오. 풀이 바람에 눕는다고 죽은 것이 아니란 걸 명심해야 할 것이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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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종소리’는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를 역사적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황사영이 ‘백서’를 쓰게 된 배경과 그의 아들 경한, 그리고 정하상의 이야기가 담담히 ‘여수리’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황사영의 뜻이 이어진 정하상, 그리고 육신을 이어받은 황경한의 이야기는 두 줄기의 강물이 되어 때로는 격하게, 때때로 잠잠히 여울져 흐르다 멈추어 여수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넘나든다. 그 질곡의 회오리에 갇혀있는 여수리와 경한의 상처를 낫게 한 것은 거친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이었다. 그러나 차고 시린 사막의 밤은 모래 폭풍 속으로 사라져 조용히 잠들어 있는 누란왕국의 아름다운 공주의 이야기만큼 슬픈 바람의 노래를 지금도 부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한 반역자’라고 단죄한 ‘황사영’인가? 작가는 2014년 8월의 124위 시복시성에서 황사영이 빠진 사실에 공허해 하며 작정하고 ‘고요한 종소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양날의 검처럼 찬반론이 대립하는 백서의 정체성은 종교의 자유와 생명의 존엄성에 있다. 소설은 대박청래를 골자로 한 편지의 내용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권력을 정치적 보복에 악용한 지배계층의 명분 없는 환란을 먼저 꼬집고, 생명의 존귀함을 망각한 저들이 선량한 백성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조선 교구에서 보관하고 있던 백서는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에서 뮈텔 주교가 직접 교황 비오 11세에게 전달되었다. 황사영이 살아서 전하지 못한 백서는 그의 사후 125년 만에야 비로소 교황의 손에 쥐어졌다. 그렇지만 황사영은 그 편지로 인하여 21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반역자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복자품(福者品)에도 오르지 못 하고 있다. 황사영은 단지 일어난 일을 일어났다 말했고, 종교의 자유를 달라고 외쳤고, 힘이 약한 신자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황사영에게 돌을 던지려면 탐욕과 권위로 백성 위에 군림했던 조선 말기의 파행적이고 일그러진 정치 상황을 먼저 돌아보고, 저들의 편협하고 잔혹한 의식을 먼저 심판해야 한다. 백성을 저버린 저들이 권력을 업고 제 아무리 위풍당당한 명리를 내세운다 해도, 억울하게 죽어간 민초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 자격이 없다. 백성을 먼저 저버린 것도 저들이고, 도덕과 윤리를 빙자하며 인간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살상한 것도 저들이다. 어떠한 정치적 명분도 생명의식을 저버리고서는 고귀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사람이 있어야 정치도 있고, 세상도 존재한다. 사람이 바로 세상 그것이니. 정말 황사영이 역적일까? 황사영은 백서와 함께 존재하며, 여전히 신앙의 자유를 외치고 있다. 그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복자로 추대되지 않았다고 그의 순교가 왜곡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진정한 화해가 요구되는 시점에서 잘못된 역사를 두고 여태 황사영만 단죄하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은 무엇인지. 진실이 왜곡되는 것보다 큰 오해가 없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