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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삼남대로, 그 옛길을 찾아서
프롤로그. 제주 관덕정에서 해남 이진항까지 - 봄바람처럼, 미소처럼 가자 첫날. 이진항에서 강진 성전까지 - 혼자서 먹는 밥, 혼자서 자는 잠 이틀째. 성전에서 영산포까지 - 백 리를 걷는 사람은 구십 리를 반으로 삼는다 사흘째. 영산포에서 장성까지 - 찔레꽃 아름답게 피는 길 나흘째. 장성에서 정읍 태인까지 - 산수가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 닷새째. 태인에서 완주 이서까지 -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지만 엿새째. 이서에서 논산 연무대까지 - 동학농민군이 걸어간 길 이레째. 연무대에서 공주 장깃대나루까지 - 금강의 봄물이 이끼보다 푸른데 여드레째. 공주대교에서 차령고개까지 - 길 위에 새겨진 도시의 흥망성쇠 아흐레째. 차령고개에서 안성천까지 - 천안이 태평하면 천하가 평안하고 열흘째. 안성천에서 수원 화성까지 - 옛 역사를 읽고 싶지 않다네 열하루째. 수원에서 서울 사당역까지 - 언제까지나 걷고 싶은 옛길 열이틀째. 사당역에서 남대문까지 - 모든 길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공존하는 서울 |
辛正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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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왼으로 신북면의 북서 끝 지점에 위치한 양계리 금동 마을로 가는 길이 갈라져 나간다. 그 금동 마을 서에는 ‘똥배미’라는 논이 있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연산군 때 몸집이 크고 정력이 센 여자를 찾으라는 왕명을 받은 채홍사(採紅使)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논가에 매우 큰 똥덩이가 있는 것을 보고 똥 눈 사람을 찾다가 마침내 대갑에 사는 최부리의 딸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를 데려가서 연산군에게 바쳤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 재미있는 지명이 금동 마을 동에 위치한 학동리의 ‘생애바우’다. 이 바위는 상여처럼 생겼는데, 그 때문에 마을에서 청상과부가 많이 난다고 하여 바위 앞에 담을 쌓거나 나무를 심어서 가린다는 것이다. ---p.78∼79, "이틀째. 성전에서 영산포까지│백 리를 걷는 사람은 구십 리를 반으로 삼는다" 중에서 조선시대 말엽 갈재 동 지역에 민족종교 또는 신흥종교들이 이처럼 성세를 이루었던 것은 무슨 연유일까? 생각해보면 백제 멸망 이후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후백제를 열었던 견훤과의 악연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겨서 호남 지역 사람들이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다행히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관향이 전주라서 조선시대 전기에는 호남 지역에서도 벼슬길에 많이 올랐으나,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의 난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축옥사(己丑獄死) 이후 호남 지역은 다시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참고 참았던 이 지역의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가 실패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었으며 그 뒤를 이어 증산교, 대종교(大倧敎), 보천교, 원불교(圓佛敎) 등이 실의에 빠진 민중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었을 것이다. ---p.136, "나흘째. 장성에서 정읍 태인까지│산수가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 중에서 연지동에서 동북으로 조금 떨어져 있고 북면으로 가는 길옆에 있는 수성동은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최후를 장식한 곳이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태어난 송시열은 인조 11년(1633)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나중에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봉림대군이 임금으로 즉위한 1649년부터 그는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에 이어 현종이 죽고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 향리에 은거해 있던 그는 장희빈이 낳은 왕자 ― 훗날의 경종 ― 에게 원자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제주도에 유배 갔다가 돌아오던 송시열은 수성동의 은행나무 거리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숙종은 “그의 죄악은 국문하지 않아도 여지없이 나타났으니 도사가 약을 가지고 가다가 그를 만나는 대로 사사하라”는 영을 내렸던 것이다. 송시열이 국문을 받으러 올라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을 때 거적 한 장만이 깔려 있었다. 제자들이 자리가 추하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자 송시열은 “우리 선인(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 이만한 자리도 못 까셨네” 하고 거절한 뒤 사약을 마셨다고 한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p.142~143, "나흘째. 장성에서 정읍 태인까지│산수가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 중에서 1894년 조선 조정은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었으나 그 약조를 지키지 않아 그해 9월 농민군은 삼례에서 재기포(再起包)를 하였다. 논산을 거쳐 북상한 농민군은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여 싸움을 벌였는데, 그것이 유명한 우금치(牛金峙) 전투다. 공주시 금학동에 있는 우금치는 나라 어느 곳에나 있음직한 야트막한 산이다. 소 크기만 한 금이 묻혔다고 하거나, 소를 몰고서는 넘지 못하는 고개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이 고개에 포장도로가 뚫려 공주와 부여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끊일 날이 없다. 1894년 조정에서 펴낸『갑오관보(甲午官報)』에는 “일군과 관군이 산 능선에 둘러서서 일시에 총탄을 퍼붓고 다시 안으로 몸을 숨기고 적이 고개를 넘고자 하면 또 산능선에 올라 총탄을 퍼붓는다. 이렇게 하기가 40~50차례가 되니 시체 쌓인 것이 산에 가득하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결국 적게는 30만, 많게는 5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낸 후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왕조 또한 급격하게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p.230~231, "여드레째. 공주대교에서 차령고개까지│길 위에 새겨진 도시의 흥망성쇠" 중에서 광덕면 대평리 피덕 마을에서 동북으로 조금 떨어져 위치한 곳에 ‘울바위’가 있는데 굴이 깊어서 소리를 지르면 되울려 나와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한자로는 ‘명암(鳴岩)’이라 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장수 발자국’, ‘장수 오줌 눈 자국’, ‘수레 끈 자리’ 등의 묘한 지명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모두 역사 기록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조선 명종 때 차령고개에서 활동했다고 하는 안수(安壽)라는 의적과 관련이 있다. ‘울바위’ 옆에 있는 ‘장수 발자국’은 도적 안수가 발로 밟은 발자국이라고 하고, 또 그 옆의 ‘장수 오줌 눈 자국’은 바위가 오줌 자국처럼 파인 모양으로서 안수가 오줌을 눈 자국이라는 것이다. 또한 ‘수레 끈 자리’는 ‘장수 오줌 눈 자국’ 옆에 나 있는 길을 일컫는 것인데 산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푹 패어 있어서 마치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같이 생겼다. 그래서 안수가 관곡(官穀)을 털어 수레에 실어 그의 소굴로 가지고 들어간 자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화들을 종합해보면 안수가 얼마나 기골이 장대하고 거리낌이 없는 신화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p.245∼248, "아흐레째. 차령고개에서 안성천까지│천안이 태평하면 천하가 평안하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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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와 혁명의 길, 삼남대로 - 이 책의 특징 1
여정의 출발지 해남 이진항은 제주를 비롯한 남도의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유배기간이 끝나 뭍으로 돌아오던 길목이다. 조선시대 제주로 유배를 간 사람들이 줄잡아 300여 명에 이른다 하니 말 그대로 눈물과 회한의 장소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유배기간 동안 방 안에서 한숨만 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송시열, 김상헌 등은 제주에서 유교 교육을 진작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정약용은 해남의 다산초당에서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여러 저작을 남겼다. 이렇듯 어려움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제 몫을 해낸 옛 사람들의 모습이 삼남대로 위에 남아 있다. 삼남대로는 녹두 장군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이 혁명을 꿈꾸던 길이다. 정읍시 태인면은 동학혁명의 계기가 되었던 동진강의 만석보가 있던 곳이고, 전봉준이 마지막 싸움을 벌인 후 동학군들을 해산시키고 도피의 길로 접어들었던 동학의 처음과 마지막을 지켜본 곳이다. 조금 위로 올라와, 삼례는 2차 동학 봉기가 일어난 곳이고, ‘동학혁명위렵탑’이 세워져 있는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의 최후 결전장이었다. 어느 곳보다 풍부한 산물이 있었던 곡창지대였지만, 늘 수탈에 힘겨워하던 민초들의 억울함이 지금도 길 위에 흐르고 있다. 땅이름에 남겨진 작은 역사 - 이 책의 특징 2 사람만큼 이름 짓는 것을 좋아하고, 이름에 큰 의미를 두는 존재가 있을까? 하긴 이런 인간의 취미는 아담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니 그럴 만도 하다. 길을 걷다보면 조그만 바위에도 나름의 이름이 있고 작은 개천에도 전해져오는 내력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유치하기도 하고 앞뒤가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바꿔보면 우리가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잊고 지나가기 쉬운 살아 있는 작은 이야기들일 것이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서울 숭례문까지 연결되는 삼남대로에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와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만큼이나 재미난 지명들이 많다. 우리가 보아서는 한 마을에 있는 똑같은 들판인데도 ‘구진자리들’, ‘간뎃들’, ‘망개들’, ‘수분멀들’, ‘우뎃들’, ‘장승들’, ‘지경터들’ 등 재미난 이름들이 각자 자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또 강진 신천 마을에는 ‘맵생이자리’라는 논이 있는데, 토질이 척박하여 벼가 잘 자라지 못하는 데다 크기도 아주 작아서 “맵새가 누워서 먹을 정도라 뒤꼭지가 벗어질 만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란다. 이렇듯 땅이름에는 현실의 어려움을 웃음과 해학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민초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여정의 주요 장면을 보여주는 실제 지도 - 이 책의 특징 3 답사기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저자가 길을 걸으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과 글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그곳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직접 가보지 못한 곳이라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빈약할 수밖에 없다. 주요한 길을 중심으로 구성한 간략한 지도로는 독자를 답사의 현장으로 불러오기에 부족하다. 『삼남대로』는 5만 분의 1 실측지도를 활용하여 답사 경로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총 24컷의 지도로 강과 산을 휘감고 도시를 지나는 옛길 삼남대로의 흐름을 보여주고, 본문에서 언급하는 마을의 이름과 문화유적, 주요 건물들을 알아보기 쉽게 따로 표시하여 본문과 지도를 함께 읽어 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열이틀 간의 여정을 손으로 짚어가며 함께 느낄 수 있는 재미나는 읽기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