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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단절의 시대를 극복하는 관계의 철학
―‘헤르메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가 말하는 소통의 윤리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서양 근대 철학은 『성경』의 이 첫 구절(「창세기」)에 주목하며 세계와 인식을 분리해 사고했다. 그 결과, 오늘날 담론들은 다양하게 분화되어 총체적인 지식을 이루기 힘들 정도로 분열되어 버렸다. 말씀이 산산이 부서지는 가운데 지식뿐 아니라 우리의 세계가 온통 파괴되는 동안, 사람들 사이엔 증오와 경쟁이, 오직 시체 더미만이 쌓여 간다. 이대로 종말이 오고 말까? 헤르메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Michel Serre)는 “태초엔 (그 말씀을 전달하는!) 천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소통과 창조의 희망을 찾자고 주장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왜 천사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까? 세르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가 메시지 전달체계를 중심으로 조직”되기 때문이다. 소식을 전달하고―천사(ange;angel)라는 말은 메신저를 뜻하는 그리스어 앙겔로스(angelos)에서 나왔다―관계들을 맺어 주는 천사들은 무수한 형태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들에 관한 철학, 즉 관계의 철학은 결여되어 있다. 근대의 학문은 나누기에 급급했지, 실제로는 연결되어 있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체로서 볼 줄 몰랐다. 세르는 힘주어 주장한다. “그러니 사물이나 생물의 망을 엮는 대신에, 뒤얽혀 있는 길들의 지도를 작성합시다.” 『천사들의 전설』은 그 지도 읽는 법을 알려 주는 책이다. 분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합적 지식 한국의 독자들에게 세르는 유럽의 독특한 철학자로서 명성은 높았으나 그 철학의 내용은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헤르메스 5부작’을 통해 담론들 사이의 소통, 번역, 개입, 분배 등의 논리를 제시해 온 그는 흐름과 소통으로 지식의 총체화를 시도해 왔다. 그러나 백과전서파의 후예 세르가 주장하는 총체성은 헤겔의 총체성과는 다르다. 개별 분야에서 논의를 시작하되, 분과를 나누는 벽을 천사처럼 투과하고, 흔들며 조금씩 총체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이 책은 난해한 철학 소설이 아니다. 그보다는 소설의 형식을 띤 백과전서에 가깝다. 형이상학·인식론·가치론·윤리학(개념과 배제에 갇힌 논리학을 제외하고) 등 분과 철학이 합쳐져 근대 이전 통합 철학의 위상을 되찾고, 음악·미술·문학·교육학·신학·자연과학(지구과학, 물리학) 등이 교차하며 분과의 경계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을 넘나드는 충돌 사이에 새로운 지식이 창조됨을 보여준다. ‘지식의 음유시인’이라 불릴 만큼 시적인 문체가 이 규정하기 힘든 천재의 종합적 사유를 한층 감동적으로 느끼게 한다. 세르의 다른 책들처럼 『천사들의 전설』 또한 해박한 자연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이미지와 함께 어우러진다. 현대 도시의 심연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사진, 사물들의 심연을 확장해 드러낸 과학 사진 그리고 중세부터 현대를 아우르는 종교·미술 작품 등과 책장을 넘기노라면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 바티칸 궁의 미술관, 랭스 대성당, 로마의 노숙자 앞으로… 천사들의 순간이동을 연상시키는 이들의 대화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소통을 위한 특별한 상징들: 팡토프, 피아, 공항 그리고 천사들 『천사들의 전설』에는 세계의 혼돈과 창조에 관한 흥미로운 상징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두 주인공, 항공사의 보안 책임자로서 끊임없이 여행하는 팡토프는 현실적인 객관주의자이고, 공항 의료센터의 의사인 피아는 감성적인 신비주의자다. 두 사람이 깊이 있는 철학적 대화를 나누면서 서먹한 타인에서 친밀한 연인으로 변해 가는 것이 이 책의 줄거리지만, 이 대화에는 특별한 무대가 제공된다. 파리의 샤를―드―골 공항, 현대의 역참. 메시지 전달체계 자체가 되는 이 건물은 투명한 튜브형 무빙워크가 중앙의 원형 광장을 가로지르는 건축 양식 자체로 메시지가 전달되고 순환하는 방식을 반영한다. 이 이야기 전체의 얼개를 보여주는 축소 모형인 셈이다. 두 등장인물의 이름조차 범상치 않다. 팡토프와 피아는 어디에나 있는 곳―즉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Utopia)의 반대인―판토피아(Pantopia, 프랑스어 발음은 팡토피아)가 둘로 나뉜 분신인 셈이다. 피아에 따르면, 단어와 단어들을 연결해 주는 전치사, 사람들 사이에 소식을 전해 주는 우편집배원, 공간과 공간을 연결해 주는 비행기, 정보를 변환해서 옮겨 주는 컴퓨터와 인터넷, 지구의 열기와 냉기를 배분해 주는 바람과 대류… 이 모든 것이 천사다. 천사들은 무수한 형태로 존재하고, 우리는 날마다 수없이 많은 새 천사들을 창조한다. 이름조차 없는 작은 천사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소란스러운 소음에서 태초의 카오스가 순환적으로 찾아온다. 소음은 곧 음악과 춤, 노래가 되어 예술과 종교 전례의 배경이 되고, 이 창조의 사다리 위쪽에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천사들이 자리한다. 이렇듯 어디에나 존재하는 천사들은 부재(不在)의 형식으로 온 세상에 편재(遍在)하는 신의 현존(現存)을 증거한다. 현대 도시의 삶, 메마른 불사의 생명 일이란 곧 힘겨운 육체노동을 의미했던 산업사회는 우리에게 이미 과거일까? 탈산업사회는 커뮤니케이션과 교육 등 메시지 전달로 노동이 구성된다. 일의 형태가 고정되지 않고 전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1세계만의 이야기다. 부유한 사람들은 제트기를 몰고 다니고, 날씬한 몸매를 위해 식이요법과 함께 체지방 분해제를 삼키고, 불로장생을 위해 온갖 의학을 동원한다. 그 대신 출산율은 점점 떨어져 간다. 사람들은 불사(不死)의 삶을 원할 뿐 새 생명을 원하지 않는다. 오직 위쪽만을 바라보고, 수직 상승한다. 낮에는 생산성―경제성의 논리에 시달리는 우리는 옛 사람들이 다신교 신상을 섬기듯 말없이 TV를 숭배한다. 극빈층과 제3·4세계는 죽음·살인·대량학살·전쟁 등의 참혹한 현장이 될 때만 이 신상의 제물로 바쳐진다. 지구상엔 더 이상 미개척의 공간이 없다. 점점이 흩어져 있던 도시들은 점점 거대한 빛의 사슬로 변해 간다. 죽음이 제거된 삶처럼 어둠이 제거된 빛의 도시, 세계 전체가 하나의 신―도시로, 하나의 구경거리로 되어 간다. 이 천사들의 도시는 하나의 기준, 일종의 근본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배제와 상승의 논리만을 추구하는 이곳엔 텅 빈 공허함, 모방된 ‘가짜 창조성’만이 자리한다. 진짜 창조성은 소통에서 나온다 백과전서를 사람으로 치면 천재에 가깝다 할까? 수학의 천재, 암기의 천재 같은 특정 분야의 천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천재란 모든 가능성을 품은 존재, 막혀 있는 국면을 열어젖히는 사람이다. 꽉 막힌 규율과 현실적인 이익을 넘어서는 사람, 오직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이기고자 하는 거짓말쟁이 노름꾼이다. 하지만 천재는 신이 아니다. 오히려 천사다. 그래서 천재는 한 이름이 아니라 어떤 상태다. 전환자다. 어느 특정한 틀에 갇히지 않는 존재, 즉 보편인(普遍人)이다. 세르는 또한 커뮤니케이션 사회를 넘어 페다고지 사회가 도래하고 있음을 갈파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혜의 천사, 즉 지품천사(cherubim)의 역할을 강조한다. 바빌론의 신전 입구를 지키던 날개 달린 황소 케룹(Keroub)에서 유래한 이 천사는 고속도로의 입체교차로에 비유된다. 변압기, 모뎀 같은 변환기뿐 아니라, 선생, 산악 안내인, 통역자 등이 모두 지품천사로서, 이 양서(兩棲)의 존재자들은 분리된 영역을 연결한다. 세르는 지품천사, 즉 입체교차로가 늘어날수록 메시지 전달체계는 보편성을 띠고 평등화, 균등할당, 동질적이면서 또한 극단적인 다양성을 포함하는 사회적 공평성을 낳으리라―혹은 낳아야 하리라고―낙관한다. 사랑, 여기―어디에나 있는 참된 메시지 대량생산, 대량소비―지구를 변형해서 소비하는 옛 방식의 노동/재앙이 21세기엔 미디어 산업이란 새 옷을 입고 세계화란 이름의 절대주의로 군림하려 한다. 미디어가 주는 환상 속에 최고만을 추구하는 진화론이 득세하고 하느님인 체하는 천사들이 나타난다. 권력과 지위를 차지한 지배의 천사들이다. 이 천사들의 타락은 사이비 신들을 만들어 내는 기계를 생산하고, 이 기계는 곧이어 더 악랄한 증오, 더 짓누르는 권력과 지배, 모방에 불과한 공허한 창조성, 이전의 모든 불의보다 훨씬 더 사악한 불의로 나아간다. 증오는 창조를 낫지 못한다. 오직 모든 것을 불태울 뿐이다. 이 증오 앞에 아들을 잃고 비통에 잠긴 어머니가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굽어보는 마리아. 그러나 인류를 위해 자식을 잃은 이 여인을 사람들은 어머니라 부른다. 스스로 선택한 가족관계, 입양이다. 배타적 혈연에 얽매이지 않는 보편적 사랑의 기적. 세르에게 최고위의 천사, 치품천사(seraphim)는 사랑과 자비의 상징이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사랑이다. 정의는 자비만큼 필요하다. 그러나 “포괄적 자비가 없다면 배타적 정의도 없다.” 치품천사의 절대적인 사랑 속에 타인들은 용해되고, 융합된다. 이야기의 처음, 두 사람 앞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노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숨을 거둔다. 다가오는 미래 세계의 근원에 서 있는 극심한 가난과 배제의 징후다. 그리고 자정, 천사들이 떠날 때가 되었다. 성탄절 밤 공항에서 예기치 않게 갓난아이가 탄생한다. 고통과 죽음을 목도하고 인간다움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주인공들 앞에 나타난 뜻밖의 탄생. 수태고지, 즉 육신의 부여다. 저 낮은 밑바닥에서,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타난 평등으로 가는 통로다. 구원은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여기―어디에나 있는 곳’에 있다. 메신저가 투명해져야 메시지가 힘을 얻는다 1993년 프랑스에서 탄생한 이 책이 우리 앞에 도착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그 사이 한국은 OECD 가입국이 되었고, 세계 최고의 인터넷 강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지표상으론 부유해졌지만, 낮에는 실직의 불안에, 밤에는 꺼지지 않는 모니터 앞에서 잠 못 드는 삶 역시 얻었다. 어느 때보다 많은 소통의 경로가 생겼지만, 정작 진정한 소통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메시지가 늘어갈수록 그 메시지를 지우고, 경로를 차지하고, 이익을 취하는 메신저들만 늘어 간다. 세르는 “메신저가 투명해져야 메시지가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메시지의 발신, 전달, 차단, 해독으로 유지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메시지에 길을 내주고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메신저의 윤리라는 냉철한 지적이다. 배움의 영성은 사라지고, 스타 학자를 추종하고 모방하기만 하는 텅 빈 교육 현장, 선거철마다 교수, 아나운서, 기자, 작가 같은 메시지 전달자들이 정치가로 변신하는 우리의 정치 현실 앞에서 깊은 함의를 띠는 대목이다. ‘우리’를 재창조하는 데 필요한 것은 비움과 나눔, 침묵일까? 진정한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