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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 Nikolayevich Tolstoy,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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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생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년 8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60여 킬로미터 떨어진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에서 유서 깊은 백작 집안의 아버지와 명문가인 브로콘스키 공작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니콜라이, 세르게이, 드미트리 등 세 형이 있었고, 그가 두 살 때 여동생 마리야가 태어났다. 그러나 마리야의 분만 중 난산 끝에 어머니가 숨을 거두었고, 그가 아홉 살 때엔 아버지마저 사업 관계로 여행을 떠났다가 객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5남매는 숙모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그녀 또한 3년 후에 사망하자, 카잔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1844년 톨스토이는 형들이 다니고 있던 카잔 대학 동양어학과에 입학했으나 성적이 부진하고 수업 불참도 잦아, 결국 맏형인 니콜라이가 졸업할 때 그는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시골에 돌아온 그는, 농민의 계몽 등 농업경영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게으르고 무지한 농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그의 이상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 같은 실패와 이에 다른 자기혐오는 그를 자포자기에 빠뜨려 1848년부터 3년 동안은 주색과 도박 등 방탕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위기에서 그를 구해 준 사람은 맏형 니콜라이였다. 카프카스 포병대에 근무하고 있던 형이 휴가차 고향에 왔다가 그를 데리고 가서 사관후보생으로 입대시켜 준 것이다. 카프카스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의 조용한 생활은 그로 하여금 <습격>, <산림도벌> 등의 여러 작품을 낳게 했으며, 1852년 처녀작 <유년시절>을 익명으로 잡지 <현대인>에 발표하여 재능을 인정받았다. 1853년 <크리스마스의 밤>, <소년시절>을 집필하였고, 그해에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톨스토이는 곧바로 참전하여 이듬해 장교로 승진했는데,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세바스토폴 이야기 (1855년)>를 발표함으로써 그의 이름이 문단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전령 장교로서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을 때에는 <현대인>의 동인들 - 주간 네크라소프를 비롯하여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오스트로프스키 등의 선배 작가들은 이 젊은 신진 작가를 따뜻이 환영해 주었다. 제대한 이듬해인 1857년, 톨스토이는 유럽 여행길에 올라 파리, 취리히, 제네바,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등지를 돌아보고 귀국하여 <류체른>, <청년시절>, <가정의 행복> 등의 작품을 쓰는 한편, 다시 농민 계몽과 교육을 위해 농민학교를 개설했다. 그 무렵, 결핵으로 독일 소덴에서 요양 중이던 맏형의 문병을 위해 현지로 갔다가 형의 임종을 맞아 그는 죽음에 대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때까지 자신의 인생에 관해 명확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그는, 혼미에 빠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신부는 오랜 친지인 궁중의사의 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였는데, 1862년 당시 톨스토이는 34세, 소피야는 18세였다. 신혼생활은 달콤하고 행복했으며, 결혼을 계기로 그는 예술적으로도 원숙한 경지에 접어들었다. 그의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 (1864~69년)>도 감미로운 행복 속에서 쓰기 시작하여 5년 만에 완성되었다. 또한 그는 두 번째 장편인 <안나 카레니나 (1873~77년)>를 통하여 종교적 사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즉, “모든 인간은 신의 의지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사명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의 의지를 존중하며 살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선 모든 인생의 쾌락을 거부하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화평하게 살고, 인내하며 자비심이 깊은 인간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소박한 ‘민중론’을 주창했다. 그는 또 기성 종교와 결별하고 자신의 종교를 창출했다. 이것은 <복음서>에 기술된 ‘산상수훈’의 다섯 가지 계율에 입각한,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원시 기독교로서, 이른바 ‘톨스토이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스승으로 추앙받던 톨스토이도 끝내 가정을 지키지는 못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아내 소피야의 신경질적인 언성을 날마다 듣게 되었다. 그가 <참회 (1882년)>를 발표한 이후, 재산과 많은 책의 저작권을 포기하면서 거의 종교적인 저술에만 몰두하는 게 소피야로선 불만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로서는 그것을 참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1910년 10월 28일 새벽, 그는 ‘생애의 마지막 며칠을 고독과 정적 속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다.’ 는 뜻의 글을 남겨 놓고 집을 떠났다. 그러나 이 가출은 그에게 ‘조용한 며칠’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도중에 그는 급성폐렴에 걸려 랴잔-우랄 철도의 간이역 아스타포보의 역장 관사로 옮겨졌다, 기별을 듣고 가족과 친지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위중 상태였고, 11월 7일 새벽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