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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돌멩이를 던졌다.
“지금은 내가 미울 거다. 그렇다고 야단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을 사과하지는 않겠다. 진작 네가 알았어야 할 일들이다. 네 목숨을 구하는 게 그 길뿐이라면, 나는 다시 채찍을 들어서 두 배 더 세게 때릴 거야.” “목숨을 구해서 뭐하게요? 백인들이나 내 형제 앞에서 굽실거리며 춤추라고요?” “필요하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나는 으르렁거렸다. “네 눈에는 그렇게 말하는 내가 마음이 편해 보이나 보다.” “아닌가요?” “유색인이 되면 어떤 기분일지 나야 모른다. 그래도 유색인의 아버지로 사는 사람의 심정은 정확히 알고 있다. 너에게 속내를 털어놓자면 절대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때릴 때는 아주 편해 보이시던데요.” “그렇게 생각했니? 그렇지 않았다.” 숨을 깊이 들이 마시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저 네 목숨을 지키고 싶었다. 그걸 모르겠니? 로버트나 조지나 하몬드를 보호하듯 해서는 너를 지킬 수는 없다. 백인이 유색인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백인이 유색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다. 백인들이 다 나처럼 너를 대하지 않는다는 걸 일찍 알려주지 못한 것은 내 불찰이다.” “이젠 확실히 알 것 같은데요.” “어쩌면 알았겠지. 나는 늘 널 지켜주고 싶었다. 너와 캐시를 키우는 방법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네가 잘못할 때는 매를 들었다. 매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주지. 다시는 그렇지 않게끔 기억시켜 주지. 오늘은 다르다. 매를 맞은 고통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좀 전에 맞은 채찍이 아무리 고통스러웠다 해도 앞으로 네가 형제든 친구든 백인을 때리면 오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혹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라. 아들아! 백인을 때리면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편하게 죽지도 못한다. 맞아서 죽는 사람을 보았다. 사지가 찢겨 죽는 사람도 보았다. 불에 타 죽는 사람도 보았다.”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일이 너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날마다 매를 들겠다. 그래서 네 평생 아버지인 나를 미워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사이에 다시 정적이 감돌았지만 둘 다 선뜻 깨트리지 못했다. 내가 조용히 내뱉었다. “로버트가 잘못했어요.”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 “걔가 잘못했어요.”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걸 모르겠니? 잘못이든 아니든, 걔는 백인이야. 현실이 그렇다. 로버트는 이제 어른이고 이젠 그게 아주 중요하다.” “나는 전에도 로버트와 싸웠다고요.” “그야 어릴 적이지. 어릴 때는 피부색이 달라도, 티격태격하는 것쯤은 괜찮다. 그냥 넘어가지. 이제는 로버트가 성인이 되었으니 네 마음대로 때려서는 안 된다. 네가 진즉에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유색인 아버지라면 그런 사실을 아들의 뼛속 깊숙이 벌써 새겨 놓았을 거야. 네가 꼭 알았어야 할 일을…… 내가 너무 미뤘나 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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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여 꿈을 노래하라!
이 책은 수난을 받은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이 어떤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케 해 학교도서관의 서가에 꽂힐 때마다 몰래 치워졌고, 학교의 추천도서 최종목록에서 슬그머니 제외되었다. 이 책은 그런 불순한 사람들의 시도로 한때 금서가 되었지만, 꿋꿋이 견뎌 현재 수십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여전히 수많은 청소년 독자의 눈과 머리를 사로잡고, 가슴을 후벼 파고 있다. 이 책은 한국에 와서도 수난이라면 수난이랄 수 있는 수난을 받는다. 이 책의 원제는 《The Land》다. 우리말로 간단히 생각해보면 '토지'나 '대지' 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고인이 되신 우리 문학의 거목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있어 피했다. 그럼 '대지'가 어떨까 싶었는데 펄 벅 선생의 《대지》가 있고, 펄 벅 선생한테도 민폐를 끼칠 수 없었다. 그래서 제목이《대지여 꿈을 노래하라》가 되었다. 이 책은 먼 한국땅에서도 자기 제목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럼 이 책이 위에서 언급한 책과 필적할 만한 하냐고 묻는다면 편집자 입장에서는 아무 말을 할 수 없다. 수긍한다면 출판사에서 과대홍보하는 것 같고, 아니라고 하면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로 뉴베리상을 수상하고, 여러 차례 코레타 스콧 킹 상을 수상한 밀드레드 테일러 작가한테 미안하기 때문이다. 또 다음(Daum)의 카페기자에 연재하여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바도 있어 그 독자들의 만만치 않은 반응에도 왠지 미안하기 때문이다. 그냥 독자들이 읽어보고 정확하게 판단하기를 바랄 뿐이다.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이면 가슴이 먹먹해져 자신도 어쩔 줄 몰라 뻥 쪄 있는 모습이다. 이 책은 백인 아버지와 인디언 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흰 피부를 지닌 한 유색인의 이야기다. 때는 노예제도가 철폐된 뒤인 1880년대이지만, 여전히 미국에는 인종차별주의가 사람들의 일상을 깊숙이 지배하던 때다. 인디언 계 어머니도 한때는 백인 아버지의 소유물 중의 하나였다니! 말 다했다! 이런 닫힌 사회이다 보니 유색인에게 그 사회가 어떻겠는가? 백인 아버지는 유색인 아들을 백인 아들과 같이 키우고 공부를 시킨다. 딴에는 합리적인 백인 아버지가 작은 용기를 내 금기를 깨뜨렸지만, 어차피 백인 아버지의 개인적인 사랑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회적 조건이 그 개인적인 사랑도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귀여워할 뿐, 유색인 아들에게는 아무것도 물려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백인 아버지가 범법자가 될 각오를 한다면 가능하다. 백인 아버지가 유색인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잘 나가는 지주이다 보니 폴 에드워드는 다른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이 꿈도 꿀 수 없는, 참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버지가 누구이냐 보다는 피부색이 어떠한가가 더 중요한 잣대였다. 그러다보니, 어린 폴 에드워드에게는 항상 자신의 정체성이 고민일 수밖에 없다. 폴 에드워드는 겉으로는 희게 보이다 보니, 흑인 사회에도 온전히 편입할 수도 없다. 인디언 계 어머니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폴 에드워드에게 유색인으로서의 인생을 찾으라고 한다. 하지만 폴 에드워드는 항상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듣는다. 백인 아버지의 보호막 아래는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달콤함에 주저않기에 왠지 불안하다. 그 달콤함이 영원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아버지의 작은 보호막은 폴 에드워드가 자라면서 샅샅이 찢겨진다. 어릴 때는 백인소년과 유색인의 소년의 싸움은 장난으로 여겨지지만, 어른이 되어 유색인이 백인을 손만 대도 목을 매다는 형벌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폴 에드워드에게도 그 경우는 예외일 수 없다. 서로가 절대 헤어지지 말자면 맹세했던 동갑내기 백인 형제인 로버트 로건과의 우애는 로버트가 백인 친구를 위해서 배신을 하게 되고, 그들은 주먹싸움을 한다. 그러나 쓰라린 채찍 맛은 온전히 유색인인 폴 에드워드의 것이 된다. 남들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아버지에게 맞는 그 쓰라린 채찍 맛은 차라리 달다. 그 채찍을 맞지 않으면 폴 에드워드에게 돌아갈 것은 죽음뿐이었으니까. 그제야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깨달은 폴 에드워드는 마침내 백인 아버지의 집을 박차고 나와 가출을 감행하게 된다. 하지만 때는 1880년대다. 백인과 정당하게 계약을 맺고 계약서를 쓰더라도 백인은 계약이행의 의무가 없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가 아버지처럼 위대한 땅을 갖겠다는 유색인의 꿈을 수용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사회조건의 폴 에드워드에게도 인생이 있었다. 백인 동갑내기 형제인 로버트 로건의 얄팍한 우애보다 훨씬 질기고 끈끈한 미첼과의 우정이 있었고, 우정 때문에 포기한 멋진 사랑도 있었다. 그리고 그 멋진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완성'한 사랑도 있다.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의 작가인 밀드레드 테일러의 글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테일러는 결코 유색인의 증오나 분개 혹은 비탄을 글의 힘으로 사용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인간의 이성 그리고 인류에 대한 존엄을 글의 힘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억압과 모순에 짓눌린 폴 에드워드가 예수로 읽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