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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56 양기 12 동·서위로 분열되는 북조
고환과 북위의 황제 그리고 하발악의 대립 하발악의 죽음과 우문태의 등장 우문태와 고환 그리고 고환에 쫓기는 효무제 황제를 세운 고환과 종매從妹를 범한 무제 권157 양기 13 서위와 동위의 제1차 대전 동위 고환과 서위 우문태의 대결 인재를 구하려는 동위의 고환 동위와 서위의 접전 동·서위의 제1차 대전 권158 양기 14 위와 동위의 계속적인 전투 살아난 우문태와 죽은 고오조 위기에서 탈출한 위 주군州郡을 정비한 양과 황후를 자살케 한 위 안정을 찾아가는 동·서위 그리고 전쟁 전야 끝까지 싸운 우문태와 고환, 그리고 탄핵의 회오리 권159 양기 15 동·서위의 다툼과 양무제의 정치 유연의 딸을 억지로 맞이한 고환 불교를 굳게 믿은 양 무제의 정치 문란해지는 화폐제도 위효관과 소작 그리고 고환 권160 양기 16 동위를 떠난 후경의 좌충우돌 고환의 죽음과 양으로 간 후경 후경의 속임수에 안 넘어가는 사람들 황제를 개다리라고 한 고징 양을 압박하는 두필, 후경과 모용소종의 전투 권161 양기 17 후경의 반란과 건강성의 공방 동위에 패배한 후경侯景 양과 동위의 화친 회복과 후경의 위기 후경의 반란을 대책 없이 맞는 남조 양 후경을 돕고 황제가 된 소정덕 권162 양기 18 양을 뒤흔드는 후경과 남하하는 동위 물러가겠다고 가장하는 후경 건강성建康城을 장악한 후경 꿀도 못 얻어먹고 죽은 양 무제 후경의 지배 아래 있는 소씨들 수하에게 죽은 고징과 동생 고양의 등장 진패선의 등장 권163 양기 19 북제(北齊)의 출현 황족간의 내분 동위로부터 선양을 받은 북제北齊의 고양 용병에 능한 풍보의 처 선씨 소륜을 공격하는 소역 황제를 연금시킨 후경侯景 권164 양기 20 후경(侯景)반란이 가져온 상황 후경군侯景軍의 진격을 막은 왕승변 황제를 갈아치운 후경 자기 조상도 모른 채 황제에 즉위한 후경 왕승변에게 쫓기는 후경 시체마저 갈기갈기 찢겨 죽은 후경 황제에 오른 상동왕 소역 권165 양기 21 뜨는 서위와 기우는 양 물러설 수 없게 된 무릉왕武陵王 소기蕭紀 소기蕭紀의 죽음과 강릉 천도 주군을 바꾼 서위의 우문태 유연과 다투는 북제 불타는 건강과 서위의 팽창 권166 양기 22 진패선의 부상과 서위의 몰락 북제가 세운 양의 황제 왕승변을 죽이고 황제를 바꾼 진패선 서사휘의 번항을 진압한 진패선 북제와 격돌한 진패선 건강까지 내려온 북제의 군사 술주정뱅이 황제 밑에서 고생하는 청백리 우문태의 죽음과 서위의 멸망 |
司馬光 ,우부,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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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이 명저인 이유
첫째, 간략하지만 빠뜨림 없이 과거 역사 서적을 정리하여 새로운 역사서술 방향을 제시했다. 둘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마치 하나의 역서 소설처럼 기술했다. 셋째,‘영원한 인생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많은 이에게 교훈을 전해준다. “상감께서 경회루에 직접 나가시어 합격자 네 명을 불러오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계몽(啓蒙)』과『중용(中庸)』을 강론하게 하였는데, 최자빈(崔自賓)과 이맹현(李孟賢)은 이 두 책을 두루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이『자치통감』을 강론하게 하고서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나라시대에 고조(高祖)와 항우(項羽) 가운데 누가 더 올바르고 위대하였는가? 하니 최자빈은 항우가 정대(正大)하다고 하였고, 이맹현은 한 고조가 더 정대하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세종은 이맹현을 으뜸으로 정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나오는 기록 중에서 자치통감은 어떤 책인가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송나라 때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쓴 편년체(編年體) 통사(通史)이다.『자치통감』이라는 말을 해석한다면‘정치에 자료가 되는 통시대적(通時代的)으로 거울이 될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이름은 송(宋)의 영종(英宗)이 붙여주었다. 처음에 사마광이『통지(通志)』라는 이름으로 8권 분량의 역사저술을 지어서 영종에게 바쳤는데, 영종이『자치통감』이라는 서명을 하사(下賜)하였던 것이다. 이 책은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년)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위열왕이 즉위하는 해부터 쓰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 중간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데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사마광은 송대에 제왕 노릇을 한 일이 없으면서도 문선왕(文宣王)으로까지 존경되었던 공자의 뒤를 잇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자치통감』은 공자가 써서 경전(經典)이 된『춘추(春秋)』가 끝나는 시기를 이어 받아서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 책에서는『춘추』에서 다루고 있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역사는 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다음 시대인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다. 공자의『춘추』가 나온 이후 한나라 때의 사마천(司馬遷)이『사기(史記)』를 썼다. 그런데 이『사기』는 공자가 썼던 춘추시대를 다시 썼다. 사마천이 겉으로 공자를 존중한다고 말하였고 일정 범위 안에서는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역사를 쓰는 방법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공자가 쓴 시대도 자신이 다시 썼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공자가『춘추』를 편년체, 즉 연도순으로 기록하였던 것에 비하여, 그는 사람 중심의 기전체(紀傳體)로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당시 역사책이란 모름지기『사기』처럼 써야하는 것으로 인식 되게 한다. 그래서 역사책으로 인정받던 공자의『춘추』가 사마천의『사기』가 나타난 이후부터는 한층 더 높은 지위라고 볼 수 있는‘경서(經書)’가 되었는데, 역사책이라는 범주에서 본다면, 이는 사마천이 공자를 역사가의 대열에서 쫓아낸 셈이었다. 이처럼 사마천의『사기』는 막강하였다. 그 후로는 하나의 왕조가‘올바른 역사책’이라고 정식으로 인정한 역사책인 정사(正史)는 반드시『사기』처럼‘기전체’로 된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송대(宋代)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마광은 역사책을 쓰면서 사마천 이후 거의 1100년간이나 지속되어온 기전체의 역사책을 쓰지 않고, 공자가 채용한 편년체로 이『자치통감』을 썼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이 공자를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공자가 썼던 부분을 다시 썼던 것처럼, 사마광도 사마천 이후에 많은 역사가들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썼던 기전체의 정사(正史)에서 다룬 부분을 이『자치통감』에서 다시 썼다. 그러한 점에서 사마광은 공자의『춘추』를 잇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쓴 것이 분명하다. 또 다른 의미를 찾는다면, 사마광은 이『자치통감』을 통하여 그가 살고 있던 당시에 불고 있던 이른 바‘개혁’바람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사마광이 살고 있던 시기는 송나라가 서기 960년에 건국된 이후 근 100년쯤 지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북방에 있는 요(遼)나라, 서방에 있던 서하(西夏)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으므로 국가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이때 전쟁지역으로부터 떨어져있던 양자강 유역은 점차 개발되었고, 그 경제력에 의하여 이 지역 사람들이 점차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송나라를 이끌어온 서북지방 사람들의 보수성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되었으니‘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왕안석(王安石)이었고, 그가 이른바‘신법(新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그동안 정권을 잡고 송나라를 이끌어온 서북지역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마광은 그 개혁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참으로 좋고 시원하게도 느껴지지만,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는 실제에 있어서는 모두 실패한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는 점진적으로 고쳐 나가는 것이 혼란을 막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기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역사에서 찾아서 대고 싶었다. 결국 사마광은 이『자치통감』을 통하여 이를 웅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사마광은 신종이 죽은 후 노구(老軀)를 이끌고 잠깐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가 1086년에 죽는다. 이 해에 신법을 주창하였던 왕안석도 죽었지만, 그 후 북송의 정치적 실권은 개혁을 내세우는 신법당(新法黨)에게로 돌아가고, 그들에 의하여 정권은 농락되었다. 개혁적 주장을 하는 신법당 인물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송나라가 부강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금(金)나라에게 황하유역을 내주었고, 황제도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그리고 강남지방에서 서기 1126년에 겨우 송 왕조를 재건하는 나약한 왕조가 되고 말았다. 불과 사마광과 왕안석이 죽은 지 4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은 신법당의 급진적 개혁조치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점진적 개선을 주장한 사마광이 쓴 이『자치통감』의 내용은 현실적으로는 많은 귀감(龜鑑)이 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이 책은 널리 보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자『자치통감』을 절록한 보급형의 저서가 나오게 된다. 『자치통감』294권을 50권으로 줄여서 만든 강지(江贄)의『소미통감절요(少微通鑑節要)』와 59권으로 만든 주희(朱熹)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이 그것권이다. 이러한 축약본들은 비교적 널리 읽혀질 수 있었다. 그러고 남송조차도 150년쯤 지난 1279년에 몽골족의 원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마는데, 이때의 호삼성(胡三省)이 스스로 송(宋)나라의 유민(遺民)을 자처하면서『자치통감』에 자세한 주를 달아 보다 정확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한 주석서를 서술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사마광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비록 보수파라고 하여 공격을 받았고, 개혁파인 왕안석의 신법당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계속되는 중국 민족의 수모의 역사 속에서 살던 선각자들 예컨대 강지와 주희 같은 사람들은 이 책의 보급에 노력을 경주하였고, 몽골족에게 중국 전체를 내준 원대에는 호삼성이 망해버린 송 왕조를 슬퍼하면서 이 책에 주를 달았을 만큼 이 책은 정말로 가치 있는‘정치교과서’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자치통감』이 갖는 정치교과서적 의미는 잘 인식되었다. 『자치통감』은 중국에서 출간하자 곧 고려로 전해져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이 책을 참고로 하였다. 고려 말에는 『통감』을 직접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왕들은 경연(經筵)을 통하여 읽게 하였다. 다시 세종대에는 『자치통감』을 보다 잘 읽을 수 있도록 훈의(訓義)를 달아서『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라는 책이 저작되었고 또한 국력을 기울여 간행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하였던 일이 있다. 어떻게 번역했나 번역에는 여러 기법이 있겠지만, 원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는 문제가 중요하다. 일반 독자들이 쉽게 알지 못할 용어인 경우에 비슷한 현대어로 바꾼다면 원전의 맛이 살지 않고, 그 용어를 그대로 쓰면 독자들이 생경하게 느끼는 두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이냐가 관건이다. 『자치통감』의 번역에서는 송대 고문부흥운동기의 저작이기 때문에 원전에서 보인 우아한 문장의 멋을 최대한 살리려고 하였다. 그리고 좀 낯선 단어는 역사용어의 교육이라는 점에서 살려 두고 대신 각주로 자세히 설명하였으며, 방대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에 중국지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명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여 이를 현재 지명으로 괄호 속에 처리하여 지도 한 장만 가지고 보면 생동감 있게 사건의 전개와 그 지리적 환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위에 간지로 날짜를 표시하였지만 우리가 익히 쓰는 아라비아 숫자로 괄호 속에 밝혀놓았으며, 때로는 간지로 보아 날짜로 계산하기 불가능한 부분에 대하여서는 간지의 오자(誤字)가 없는지를 살펴서 필사과정에서 생길 수 있었던 오자, 예컨대 을(乙)과 기(己), 술(戌)과 진(辰), 오(午)와 자(子)를 면밀히 검토하여 고쳐서 날짜를 밝히고 각주로 설명하였다. 또 우리나라에서 잘못 읽히고 있는 한자음, 예컨대‘견(甄)’이나‘제(祭)’를 사람의 성인 경우에 호삼성의 음주를 참고로 하여‘진’과‘채’로 읽도록 하였다. 또한 성(城)을 공격하여 승리한 경우에도 원문에서는 상황에 따라‘하(下)’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극(克)’,‘입(入)’,‘첩(捷)’,‘함(陷)’,‘도(屠)’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투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번역서의 특성상 우리말로 옮길 때 간결한 단?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그 함의를 길게 설명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두 우리 귀에 익숙한 낱말인‘승리하다’라고만 표현한다면 원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뉘앙스를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이 책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가 한참 활동하던 시기의 저작이어서 문장은 우아했고, 한 글자 한 글자에 그 나름의 깊은 의미를 지니며, 헛되이 쓰인 글자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우리말을 찾는 작업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그래도 끝까지 원문의‘맛’을 살려 보려는 욕심을 놓지 않으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번에 나온 책「 장기 분열 시대 마감하다! 고구려, 백제까지 가세한 국제질서 재편의 긴박한 상황 연출 이번 출간된 남북조 양(梁)시대 편은 자치통감의 원문으로는 권145부터 권166까지 22권 분량을 2책에, 남북조 진(陳)시대 편은 권167부터 권176까지 10권을 1책에 담았다. 그리고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건립된 수(隋)시대는 권177에서 권184까지 8권을 1책에 담았다. 이번에 출간된 남북조 양시대Ⅰ·Ⅱ, 남북조 진시대, 수시대는 중국의 내부적인 남북 또는 동서 갈등과 대립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를 통일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중원지역의 내부 통일은 바로 다른 남북대결, 즉 농경지역과 유목지역의 대결을 불러 오고, 이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전쟁을 촉발하고 있다. 또 이번에 출간된 남북조 양시대Ⅰ·Ⅱ, 남북조 진시대, 수시대는 거시적으로 동아시아의 주도세력과 그에 대응하는 주변국의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게 한다. 이 책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사료를 우리말로 처음으로 펴내어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의 역사지평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남북조 양(梁)시대 Ⅰ, Ⅱ 이번에 출간된 자치통감의 16, 17은 자치통감 원문 권145부터 166까지 22권 분량인 양기(梁紀)를 2권으로 묶은 것으로 남북조시대의 양(梁) 왕조 시대를 다루고 있다. 양 왕조는 제(齊) 황제인 동혼후를 축출하고 소연(蕭衍)이 서기 502년에 선양(禪讓)을 받음으로써 출발한다. 소연은 양 무제로 서기 549년까지 재위하였으나, 오랜 기간 황제에 자리에 있다가 그가 죽고 얼마 안 되어서 서기 557년에 진패선(陳覇先)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왕조의 운명을 마감한다. 따라서 남조의 양 왕조는 양무제 소연 한 사람의 역사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에 북방지역을 통일하였던 북위(北魏)는 서기 534년에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다. 이리하여 잠시의 두 왕조가 남북조를 이루는 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세 왕조가 대결하는 시대가 나타난다. 이 기간에는 삼국시대 이래뾔 지배하여 온 은둔사상의 확산과 그 연장선상에서의 불교의 발달은 현실정치와 정신적 이념 사이의 괴리를 채우지 못하는 지배세력들의 자기모순은 왕조 교체의 빈발을 가져왔다. 양 무제는 스스로 불경을 설법하고, 승려처럼 채식을 하였으며, 법질서를 지키기보다는 불교의 자비사상을 실천하듯 범죄자를 관용함으로써 국가질서가 문란하게 되는 것을 방치하였으며, 북조 북위의 호태후는 화려한 불사를 일으켜서 사찰을 짓는데 정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북방의 북위는 동서로 갈라져서 동위와 서위가 대립하는 상황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전국시대의 6국과 진(秦)의 대결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동·서위의 대결은 비록 통일 시대인 한(漢)대라고 하더라도 산동지역에서의 반란은 계속 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동서 대결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 남북조 진(陳)시대 편 이번에 출간된 자치통감18은 자치통감 원문 권167부터 권176까지 모두 10권인 진기(陳紀)를 묶은 것으로 남북조의 진(陳)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 시대는 북쪽에는 동·서위가 명목상으로 북위의 원(元)씨를 황제로 세웠으나, 동쪽에서는 실제 권력자인 고(高)씨의 고양(高洋)이 동위로부터 선양을 받아서 제(齊)를 세웠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북제라고 하고, 서쪽에서는 우문(宇文)씨의 우문각(宇文覺)이 선양을 받아서 주(周)를 세우웠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북주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삼각형 대결구도가 되었지만 곧 서부지역의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켜서 바로 남북대결관계를 형성한다. 이 시대에는 다시 북주의 황실에 후계구도가 확정되지 않은 틈을 타고서 황후의 아버지라는 신분으로 권력을 잡은 양견(楊堅)이 다시 북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 왕조를 건국한다. 그러나 자치통감은 남조를 중심으로 기년(紀年)하였기 때문에 수 왕조가 건국하여 9년간의 기록은 진기 속에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다시 중국이 서기 220년에 삼국으로 분립된 지 589년까지 근 370년간의 남북대결과 동서대결이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분립양상을 보여준 시기라고 할 것이다. ■ 수(隋)시대 편 이번에 출간된 자치통감19는 자치통감쟀 원문 권177부터 권184까지의 8권의 수기(隋紀)를 묶은 것으로 위진·남북조시대를 재통일한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는 수가 건국한 지 9년 이후부터 취급하고 있고, 그 이전은 진기(陳紀)에서 다루고 있다. 수 문제가 통일을 이룩한 다음에 문제와 그를 잇는 양제의 고구려 원정과 이에 따른 통치뼘의 약화는 곧바로 왕조를 당(唐)의 이연에게 내주게 되는데, 그 직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중국의 역사서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고구려 문제를 중국적 시각에서 쓰고 있지만 고구려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자치통감이 많은 자료를 토대로 고증을 거쳤다는 점에서 중원통일국가의 탄생과 주변국인 돌궐과 고구려 그리고 백제까지 가세한 국제질서 재편의 움직임은 긴박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시기 중국이 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은 다시 주변국과의 긴장으로 새로운 수·고구려·돌궐이라는 삼각구도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중원지역의 변화가 동아시아정세의 변화를 먼 안목으로 바라보는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