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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18
남북조 진 시대 양장
삼화 200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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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동양문화 top100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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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권167 진기 1 진의 건국과 제의 폐정
서위의 공제를 죽인 북주
권력을 장악하고 천왕에 오른 우문호
선양으로 왕조가 바뀐 남조
소장을 남양(南梁) 황제로 세운 북제
술주정을 못 고치는 북제의 고양
같은 해에 죽는 북제·북주·진의 황제

권168 진기2 내분에 휩싸인 북제의 황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고연
똑똑해서 죽은 태자와 황제
고연으로 황제를 바꾼 제
북조에서의 경쟁
폐제를 죽이고 자신도 죽은 제의 황제
반역을 꾀하다가 죽은 제의 평진왕

권169 진기 3 대치하는 북주·북제·진
진보웅에게 직언한 우기
삼로를 임명한 주와 후안도를 죽인 진
화사개에게 농락되다 공격을 받은 제
북제와 북주의 경쟁
실패한 북제의 북주 공격
말재주로 황제를 바꾼 제의 조정
후사를 걱정하며 죽은 황제
만족을 소탕한 북주와 음모가 날뛰는 북제

권170 진기 4 북제 화사개의 권력전횡
북제의 정권을 장악한 진욱
화교의 모반과 양로의 귀부
상황 고담에게 도전하는 북제
진욱이 황제로 등극한 진
화사개와 다투다 죽은 고예
아양으로 군군(郡君)이 된 궁녀
구양흘의 반란 속에서 권력을 장악한 화사개
개선하는 북제의 곡률광

권171 진기 5 기행을 거듭하는 북제(北齊)의 황제
권력자 우문호를 제거한 북주 황제
충신 곡률광을 죽인 북제
비녀 출신을 황후로 삼은 북제
북제를 공격하는 진의 군대
북제에 계속 승리하는 진의 군대
장강 이북을 회복한 진(陳)
전갈 속에 사람을 넣고 즐긴 고위(高緯)의 파행

권172 진기 6 북주를 못 막는 못난 북제의 황제
북제를 치려고 계책을 세운 북주
북제를 공격한 북주, 북주의 못난 태자
애첩을 데리고 전장에 나온 제의 황제
패배한 고연종과 물건을 아까워한 제의 황제

권173 진기 7 북제(北齊)를 멸망시킨 북주
북제 왕조의 멸망
멸망한 북제(北齊)의 사람들
북제(北齊) 멸망 후 북주의 정책
북주 무제의 죽음과 삼촌을 죽인 선제
전임황제의 신하를 죽이는 주의 선제
제사에 열심인 주(周) 천원(天元)황제

권174 진기 8 양견의 정권장악과 승승장구
주(周) 천원(天元)의 횡포와 권력을 장악해가는 양견
울지형 등으로부터 견제 받는 양견
울지형을 토벌하고 권력을 잡아가는 양견
북주의 왕위에 오른 양견

권175 진기 9 수를 건국하는 양견
북주로부터 선양을 받은 양견
수의 이목, 소위 그리고 고경
법률의 정비와 독고황후
돌궐의 침략과 장손성
반란 속에 휩싸인 진과 기초를 잡아가는 수
돌궐과의 다툼 속에서 도읍을 준비하는 수
돌궐을 공격한 수
수 문제의 화상(畵像)을 보고 놀란 진 황제

권176 진기 10 멸망해 가는 남조(南朝)
통일을 준비하는 수(隋)의 양견
돌궐과 남량을 아우르는 수 문제
천하통일을 위해 진 정벌을 준비하는 수
수의 정벌 속에서 자리다툼을 하는 진(陳)

저자 소개 2

司馬光 ,우부, 우수

중국 북송시대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은 산서성 출신으로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도 하며,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스무 살에 진사가 된 뒤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신종이 왕안석을 발탁하여 신법을 단행하자, 이에 반대하여 추밀부사 직을 사퇴하고 지방으로 나갔다. 특히 사마광은 유가에서 혁명적 이론을 포함하고 있는 맹자와 달리 맹자 이전의 공자로 돌아가 점진적 개혁을 주장한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사마광은 편년체 역사서『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는데, 신종은 이 책의 완성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084년 마침내
중국 북송시대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은 산서성 출신으로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도 하며,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스무 살에 진사가 된 뒤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신종이 왕안석을 발탁하여 신법을 단행하자, 이에 반대하여 추밀부사 직을 사퇴하고 지방으로 나갔다. 특히 사마광은 유가에서 혁명적 이론을 포함하고 있는 맹자와 달리 맹자 이전의 공자로 돌아가 점진적 개혁을 주장한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사마광은 편년체 역사서『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쓰고 있었는데, 신종은 이 책의 완성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084년 마침내 『자치통감』을 완성하고 신종이 이어 등극한 철종 때 중앙에 복귀한다. 재상으로서 왕안석의 신법을 폐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폈으나 몇 달 안 되어 죽었다.
저술로는 『자치통감』 외에 『속수기문(涑水紀聞)』, 『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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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重達

중앙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 유학하여 「『자치통감』이 한국과 중국의 학술에 끼친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부터 중앙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지냈고, 2006년에 정년퇴임하여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권중달 교수는 역사지식의 대중화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97년부터 『자치통감』번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005년 말에 200자 원고지 8만매 분량인 『자치통감』 전294권을 완역하였다. 그리고 2007년 1월부터 2010년 5월까지 3년 6개월 동안 『권중달 역주 자치통감』 31권과 해설서 『자치통감전』 1권, 전32권을 출간하였다
중앙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 유학하여 「『자치통감』이 한국과 중국의 학술에 끼친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부터 중앙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지냈고, 2006년에 정년퇴임하여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권중달 교수는 역사지식의 대중화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97년부터 『자치통감』번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005년 말에 200자 원고지 8만매 분량인 『자치통감』 전294권을 완역하였다. 그리고 2007년 1월부터 2010년 5월까지 3년 6개월 동안 『권중달 역주 자치통감』 31권과 해설서 『자치통감전』 1권, 전32권을 출간하였다. 일반 독자를 위하여 펴낸 『자치통감산책』은 『자치통감』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015년 6월에 대만의 중화문화총회는 ‘자치통감을 번역하고, 중국역사학 연구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서 문화공로상을 수여하였다. 저서로 『중국근대사상사』『자치통감전』,『자치통감산책』,『자치통감사론강의(전2권)『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황제뽑기』『자치통감 3번 태어나다』외가 있고, 역서로 『역사학연구방법론』, 『중국사의 새로운 이해』, 『문화대혁명 전후의 중국역사인식』,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역서 『가사』 외 공역과 공저가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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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6월 27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639쪽 | 932g | 153*223*35mm
ISBN13
9788992490184

출판사 리뷰

자치통감이 명저인 이유

첫째, 간략하지만 빠뜨림 없이 과거 역사 서적을 정리하여 새로운 역사서술 방향을 제시했다.
둘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마치 하나의 역서 소설처럼 기술했다.
셋째,‘영원한 인생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많은 이에게 교훈을 전해준다.
“상감께서 경회루에 직접 나가시어 합격자 네 명을 불러오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계몽(啓蒙)』과『중용(中庸)』을 강론하게 하였는데, 최자빈(崔自賓)과 이맹현(李孟賢)은 이 두 책을 두루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이『자치통감』을 강론하게 하고서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나라시대에 고조(高祖)와 항우(項羽) 가운데 누가 더 올바르고 위대하였는가? 하니 최자빈은 항우가 정대(正大)하다고 하였고, 이맹현은 한 고조가 더 정대하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세종은 이맹현을 으뜸으로 정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나오는 기록 중에서

자치통감은 어떤 책인가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송나라 때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쓴 편년체(編年體) 통사(通史)이다.『자치통감』이라는 말을 해석한다면‘정치에 자료가 되는 통시대적(通時代的)으로 거울이 될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이름은 송(宋)의 영종(英宗)이 붙여주었다. 처음에 사마광이『통지(通志)』라는 이름으로 8권 분량의 역사저술을 지어서 영종에게 바쳤는데, 영종이『자치통감』이라는 서명을 하사(下賜)하였던 것이다.
이 책은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년)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위열왕이 즉위하는 해부터 쓰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 중간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데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사마광은 송대에 제왕 노릇을 한 일이 없으면서도 문선왕(文宣王)으로까지 존경되었던 공자의 뒤를 잇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자치통감』은 공자가 써서 경전(經典)이 된『춘추(春秋)』가 끝나는 시기를 이어 받아서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 책에서는『춘추』에서 다루고 있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역사는 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다음 시대인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다.
공자의『춘추』가 나온 이후 한나라 때의 사마천(司馬遷)이『사기(史記)』를 썼다. 그런데 이『사기』는 공자가 썼던 춘추시대를 다시 썼다. 사마천이 겉으로 공자를 존중한다고 말하였고 일정 범위 안에서는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역사를 쓰는 방법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공자가 쓴 시대도 자신이 다시 썼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공자가『춘추』를 편년체, 즉 연도순으로 기록하였던 것에 비하여, 그는 사람 중심의 기전체(紀傳體)로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당시 역사책이란 모름지기『사기』처럼 써야하는 것으로 인식 되게 한다. 그래서 역사책으로 인정받던 공자의『춘추』가 사마천의『사기』가 나타난 이후부터는 한층 더 높은 지위라고 볼 수 있는‘경서(經書)’가 되었는데, 역사책이라는 범주에서 본다면, 이는 사마천이 공자를 역사가의 대열에서 쫓아낸 셈이었다. 이처럼 사마천의『사기』는 막강하였다. 그 후로는 하나의 왕조가‘올바른 역사책’이라고 정식으로 인정한 역사책인 정사(正史)는 반드시『사기』처럼‘기전체’로 된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송대(宋代)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마광은 역사책을 쓰면서 사마천 이후 거의 1100년간이나 지속되어온 기전체의 역사책을 쓰지 않고, 공자가 채용한 편년체로 이『자치통감』을 썼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이 공자를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공자가 썼던 부분을 다시 썼던 것처럼, 사마광도 사마천 이후에 많은 역사가들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썼던 기전체의 정사(正史)에서 다룬 부분을 이『자치통감』에서 다시 썼다. 그러한 점에서 사마광은 공자의『춘추』를 잇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쓴 것이 분명하다.
또 다른 의미를 찾는다면, 사마광은 이『자치통감』을 통하여 그가 살고 있던 당시에 불고 있던 이른 바‘개혁’바람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사마광이 살고 있던 시기는 송나라가 서기 960년에 건국된 이후 근 100년쯤 지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북방에 있는 요(遼)나라, 서방에 있던 서하(西夏)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으므로 국가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이때 전쟁지역으로부터 떨어져있던 양자강 유역은 점차 개발되었고, 그 경제력에 의하여 이 지역 사람들이 점차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송나라를 이끌어온 서북지방 사람들의 보수성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되었으니‘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왕안석(王安石)이었고, 그가 이른바‘신법(新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그동안 정권을 잡고 송나라를 이끌어온 서북지역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마광은 그 개혁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참으로 좋고 시원하게도 느껴지지만,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는 실제에 있어서는 모두 실패한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는 점진적으로 고쳐 나가는 것이 혼란을 막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기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역사에서 찾아서 대고 싶었다. 결국 사마광은 이『자치통감』을 통하여 이를 웅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사마광은 신종이 죽은 후 노구(老軀)를 이끌고 잠깐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가 1086년에 죽는다. 이 해에 신법을 주창하였던 왕안석도 죽었지만, 그 후 북송의 정치적 실권은 개혁을 내세우는 신법당(新法黨)에게로 돌아가고, 그들에 의하여 정권은 농락되었다. 개혁적 주장을 하는 신법당 인물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송나라가 부강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금(金)나라에게 황하유역을 내주었고, 황제도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그리고 강남지방에서 서기 1126년에 겨우 송 왕조를 재건하는 나약한 왕조가 되고 말았다. 불과 사마광과 왕안석이 죽은 지 4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은 신법당의 급진적 개혁조치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점진적 개선을 주장한 사마광이 쓴 이『자치통감』의 내용은 현실적으로는 많은 귀감(龜鑑)이 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이 책은 널리 보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자『자치통감』을 절록한 보급형의 저서가 나오게 된다.
『자치통감』294권을 50권으로 줄여서 만든 강지(江贄)의『소미통감절요(少微通鑑節要)』와 59권으로 만든 주희(朱熹)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이 그것권이다. 이러한 축약본들은 비교적 널리 읽혀질 수 있었다. 그러고 남송조차도 150년쯤 지난 1279년에 몽골족의 원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마는데, 이때의 호삼성(胡三省)이 스스로 송(宋)나라의 유민(遺民)을 자처하면서『자치통감』에 자세한 주를 달아 보다 정확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한 주석서를 서술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사마광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비록 보수파라고 하여 공격을 받았고, 개혁파인 왕안석의 신법당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계속되는 중국 민족의 수모의 역사 속에서 살던 선각자들 예컨대 강지와 주희 같은 사람들은 이 책의 보급에 노력을 경주하였고, 몽골족에게 중국 전체를 내준 원대에는 호삼성이 망해버린 송 왕조를 슬퍼하면서 이 책에 주를 달았을 만큼 이 책은 정말로 가치 있는‘정치교과서’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자치통감』이 갖는 정치교과서적 의미는 잘 인식되었다. 『자치통감』은 중국에서 출간하자 곧 고려로 전해져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이 책을 참고로 하였다. 고려 말에는 『통감』을 직접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왕들은 경연(經筵)을 통하여 읽게 하였다. 다시 세종대에는 『자치통감』을 보다 잘 읽을 수 있도록 훈의(訓義)를 달아서『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라는 책이 저작되었고 또한 국력을 기울여 간행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하였던 일이 있다.

어떻게 번역했나
번역에는 여러 기법이 있겠지만, 원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는 문제가 중요하다. 일반 독자들이 쉽게 알지 못할 용어인 경우에 비슷한 현대어로 바꾼다면 원전의 맛이 살지 않고, 그 용어를 그대로 쓰면 독자들이 생경하게 느끼는 두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이냐가 관건이다.
『자치통감』의 번역에서는 송대 고문부흥운동기의 저작이기 때문에 원전에서 보인 우아한 문장의 멋을 최대한 살리려고 하였다. 그리고 좀 낯선 단어는 역사용어의 교육이라는 점에서 살려 두고 대신 각주로 자세히 설명하였으며, 방대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에 중국지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명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여 이를 현재 지명으로 괄호 속에 처리하여 지도 한 장만 가지고 보면 생동감 있게 사건의 전개와 그 지리적 환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위에 간지로 날짜를 표시하였지만 우리가 익히 쓰는 아라비아 숫자로 괄호 속에 밝혀놓았으며, 때로는 간지로 보아 날짜로 계산하기 불가능한 부분에 대하여서는 간지의 오자(誤字)가 없는지를 살펴서 필사과정에서 생길 수 있었던 오자, 예컨대 을(乙)과 기(己), 술(戌)과 진(辰), 오(午)와 자(子)를 면밀히 검토하여 고쳐서 날짜를 밝히고 각주로 설명하였다.
또 우리나라에서 잘못 읽히고 있는 한자음, 예컨대‘견(甄)’이나‘제(祭)’를 사람의 성인 경우에 호삼성의 음주를 참고로 하여‘진’과‘채’로 읽도록 하였다. 또한 성(城)을 공격하여 승리한 경우에도 원문에서는 상황에 따라‘하(下)’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극(克)’,‘입(入)’,‘첩(捷)’,‘함(陷)’,‘도(屠)’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투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번역서의 특성상 우리말로 옮길 때 간결한 단?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그 함의를 길게 설명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두 우리 귀에 익숙한 낱말인‘승리하다’라고만 표현한다면 원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뉘앙스를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이 책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가 한참 활동하던 시기의 저작이어서 문장은 우아했고, 한 글자 한 글자에 그 나름의 깊은 의미를 지니며, 헛되이 쓰인 글자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우리말을 찾는 작업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그래도 끝까지 원문의‘맛’을 살려 보려는 욕심을 놓지 않으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번에 나온 책

장기 분열 시대 마감하다!
고구려, 백제까지 가세한 국제질서 재편의 긴박한 상황 연출

이번 출간된 남북조 양(梁)시대 편은 자치통감의 원문으로는 권145부터 권166까지 22권 분량을 2책에, 남북조 진(陳)시대 편은 권167부터 권176까지 10권을 1책에 담았다. 그리고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건립된 수(隋)시대는 권177에서 권184까지 8권을 1책에 담았다.

이번에 출간된 남북조 양시대Ⅰ·Ⅱ, 남북조 진시대, 수시대는 중국의 내부적인 남북 또는 동서 갈등과 대립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를 통일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중원지역의 내부 통일은 바로 다른 남북대결, 즉 농경지역과 유목지역의 대결을 불러 오고, 이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전쟁을 촉발하고 있다.
또 이번에 출간된 남북조 양시대Ⅰ·Ⅱ, 남북조 진시대, 수시대는 거시적으로 동아시아의 주도세력과 그에 대응하는 주변국의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게 한다. 이 책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사료를 우리말로 처음으로 펴내어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의 역사지평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남북조 양(梁)시대 Ⅰ, Ⅱ

이번에 출간된 자치통감의 16, 17은 자치통감 원문 권145부터 166까지 22권 분량인 양기(梁紀)를 2권으로 묶은 것으로 남북조시대의 양(梁) 왕조 시대를 다루고 있다. 양 왕조는 제(齊) 황제인 동혼후를 축출하고 소연(蕭衍)이 서기 502년에 선양(禪讓)을 받음으로써 출발한다. 소연은 양 무제로 서기 549년까지 재위하였으나, 오랜 기간 황제에 자리에 있다가 그가 죽고 얼마 안 되어서 서기 557년에 진패선(陳覇先)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왕조의 운명을 마감한다.
따라서 남조의 양 왕조는 양무제 소연 한 사람의 역사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에 북방지역을 통일하였던 북위(北魏)는 서기 534년에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다. 이리하여 잠시의 두 왕조가 남북조를 이루는 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세 왕조가 대결하는 시대가 나타난다.
이 기간에는 삼국시대 이래뾔 지배하여 온 은둔사상의 확산과 그 연장선상에서의 불교의 발달은 현실정치와 정신적 이념 사이의 괴리를 채우지 못하는 지배세력들의 자기모순은 왕조 교체의 빈발을 가져왔다.
양 무제는 스스로 불경을 설법하고, 승려처럼 채식을 하였으며, 법질서를 지키기보다는 불교의 자비사상을 실천하듯 범죄자를 관용함으로써 국가질서가 문란하게 되는 것을 방치하였으며, 북조 북위의 호태후는 화려한 불사를 일으켜서 사찰을 짓는데 정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북방의 북위는 동서로 갈라져서 동위와 서위가 대립하는 상황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전국시대의 6국과 진(秦)의 대결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동·서위의 대결은 비록 통일 시대인 한(漢)대라고 하더라도 산동지역에서의 반란은 계속 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동서 대결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 남북조 진(陳)시대 편

이번에 출간된 자치통감18은 자치통감 원문 권167부터 권176까지 모두 10권인 진기(陳紀)를 묶은 것으로 남북조의 진(陳)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 시대는 북쪽에는 동·서위가 명목상으로 북위의 원(元)씨를 황제로 세웠으나, 동쪽에서는 실제 권력자인 고(高)씨의 고양(高洋)이 동위로부터 선양을 받아서 제(齊)를 세웠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북제라고 하고, 서쪽에서는 우문(宇文)씨의 우문각(宇文覺)이 선양을 받아서 주(周)를 세우웠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북주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삼각형 대결구도가 되었지만 곧 서부지역의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켜서 바로 남북대결관계를 형성한다.
이 시대에는 다시 북주의 황실에 후계구도가 확정되지 않은 틈을 타고서 황후의 아버지라는 신분으로 권력을 잡은 양견(楊堅)이 다시 북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 왕조를 건국한다. 그러나 자치통감은 남조를 중심으로 기년(紀年)하였기 때문에 수 왕조가 건국하여 9년간의 기록은 진기 속에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다시 중국이 서기 220년에 삼국으로 분립된 지 589년까지 근 370년간의 남북대결과 동서대결이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분립양상을 보여준 시기라고 할 것이다.

■ 수(隋)시대 편

이번에 출간된 자치통감19는 자치통감쟀 원문 권177부터 권184까지의 8권의 수기(隋紀)를 묶은 것으로 위진·남북조시대를 재통일한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는 수가 건국한 지 9년 이후부터 취급하고 있고, 그 이전은 진기(陳紀)에서 다루고 있다.
수 문제가 통일을 이룩한 다음에 문제와 그를 잇는 양제의 고구려 원정과 이에 따른 통치뼘의 약화는 곧바로 왕조를 당(唐)의 이연에게 내주게 되는데, 그 직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중국의 역사서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고구려 문제를 중국적 시각에서 쓰고 있지만 고구려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자치통감이 많은 자료를 토대로 고증을 거쳤다는 점에서 중원통일국가의 탄생과 주변국인 돌궐과 고구려 그리고 백제까지 가세한 국제질서 재편의 움직임은 긴박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시기 중국이 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은 다시 주변국과의 긴장으로 새로운 수·고구려·돌궐이라는 삼각구도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중원지역의 변화가 동아시아정세의 변화를 먼 안목으로 바라보는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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