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백선희의 다른 상품
|
많은 사랑과 약간의 관심을 구걸하느라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에게, 주머니에 돈이라곤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십자가처럼 지고서 고통받은 사람에게,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을 잃은 사람에게 유산 상속자라는 자격은 유죄판결이나 다름없다.
나는 혹자들이 이렇게 말하리라는 걸 안다. "할아버지가 엄청난 유산을 남겨줘서 돈이 많대. 그런데 무슨 불평이람?" 나는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기억을 열어 내가 겪었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할 뿐이다. 처음으로 유산 상속의 자리에 불려갔을 때 나는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걸 알지 못했다. 내게는 단 한가지 갈망밖에 없었다.피카소 씨족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달아나기 위해 나는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남긴 몫을 포기했고, 정상적이라면 나와 나의 이복형제 베르나르에게 돌아가야 할 파블리토의 몫도 거부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지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멍들어 있었다. --- pp.187 |
|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절망에 빠뜨릴 권리가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있는가? 절대를 추구하는 그들의 행보에는 무자비한 권력 의지가 불가피한 것일까? 그들의 작품이 제아무리 찬란할지언정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단 말인가?
나의 가족은 저 천재가 쳐놓은 덫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를 완성해나가는 데 타인의 피를 필요로 했다. 나의 아버지, 오빠, 어머니, 할머니의 피와 나의 피, 그리고 한 인간을 사랑한다고 여기며 피카소를 사랑한 모든 이들의 피를. 나의 아버지는 그의 폭정의 굴레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그에게 속고 실망하고 비천해지고 망가진 채 그로 인해 죽었다. 냉혹하게도. 그의 가학 취미와 무심함의 노리개가 되었던 오빠 파블리토는 스물넷의 나이에 락스를 마시고 자살했다. 식도와 후두가 타버리고, 위가 파괴되고,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는 모습으로 피범벅 속에 누운 오빠를 발견한 건 나였다. (중략) 락스를 마심으로써 오빠는 고통을 끝장내고, 자신을 기다리는 암초들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 암초들은 나 또한 노리고 있었다. 피카소 이름을 가진 우리는 우롱당하는 희망의 소용돌이라는 덫에 걸린 사산아들이었다. ---p.13 |
|
“너희들한테 깜짝 선물을 하나 주지.”
그가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는 수첩 한 장을 찢더니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걸 접고 또 접는다. 그의 강력한 손가락 사이에서 마치 마술처럼 종이 강아지가, 종이꽃이, 종이 암탉이 탄생한다. “마음에 드느냐?” 특유의 쉰 목소리로 그가 묻는다. 파블리토는 말이 없고, 나는 더듬거리며 말한다. “네... 예뻐요.” 우리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피카소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종이나 마분지, 또는 성냥을 잘라 만든 그 형상들이, 그가 마술사처럼 만들어내던 그 모든 눈속임들이 오늘날 내가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그의 야심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은 모든 걸 할 수 있으며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걸 무의식중에 인지시키려는 야심 말이다. ---p. 18 |
|
“주인님께서 방해받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우리는 머리를 떨구고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것이었다. 우리를 위한 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찬미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문전에서 거절하는 사람을 어떻게 찬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다고들 말했다. 그들은 그가 친구들을 라 캘리포니아의 대문까지 배웅하는 것을 보았고, 친구들을 위해 정원의 레몬을 따는 것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미용사 외젠 아리아스에게 크로키 몇 장을, 니스의 재봉사 미셀 사폰에게는 데생 몇 점을 주었다. 하물며 자신의 개한테도 접시 하나를 헌정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그가 피카소였다. ---p. 85 |
|
<손녀의 눈에 비친 할아버지 피카소의 냉혹한 초상―가까운 이들을 절망에 빠뜨릴 권리가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있는가.>
- 나의 가족은 저 천재가 쳐놓은 덫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를 완성해나가는 데 타인의 피를 필요로 했다. 나의 아버지, 오빠, 어머니, 할머니의 피와 나의 피, 그리고 한 인간을 사랑한다고 여기며 피카소를 사랑한 모든 이들의 피를. -
이 책은 한 세기를 풍미한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손녀 마리나의 눈으로 본 할아버지 이야기이자 ‘나 자신’이 아닌 ‘피카소’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한 가족의 고통스런 세월에 대한 기록이다. 무능력한 아버지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야 했던 마리나는 다른 할아버지와는 달리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기만 할 뿐 좀처럼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할아버지가 두렵기만 했다. 생활비를 얻기 위해 아버지 손에 이끌려 할아버지의 저택을 방문하지만 거절당한 채 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고, 이혼한 부모가 자신과 오빠의 양육비를 놓고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보아야 했으며, 끼니를 거른 채 멀리 있는 학교에까지 걸어다녀야 했던 마리나에게 천재이자 억만장자 화가인 할아버지는 아무 상관없는 존재였다. 사람들이 붙여준 ‘피카소의 손녀’라는 훈장은 마리나를 옭아매는 굴레이자 덫일 뿐이었다. 마리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비굴함과 피해망상증을 지닌 채 피카소에게 의존하지 않고 평범한 부모의 모습으로 자신들을 돌보아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소용없었다. - 나는…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매일 바다로 나를 데려가는 어부 아버지를 상상했다. 피카소에게 더 이상 의존하지 않기 위해 가정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를 상상했다. 그리고 피카소를 다른 모습의 할아버지로 상상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부모를 지어냈다. - 정상적인 피카소 집안의 일원이 되고 싶고 사랑받기를 원했던 마리나와 오빠 파블리토는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할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는 마지막 부인 자클린이 찢어버린 편지들, 할아버지가 뜯어보지 않은 편지들,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다. - “우리는 할아버지의 손자들이니 할아버지가 필요해요. 우리는 할아버지가 무시하시는 아버지 뒤에 숨은 채 찾아뵙는 어린 원숭이가 이제는 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없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고, 할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 싶어요. 말라가에서 보내신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듣고 싶어요. … 할아버지, 우리에게 과거를 주세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과거를 주세요, 할아버지!” - 아무런 대답이 없는 할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마리나는 유일한 동반자인 오빠 파블리토와 함께 스스로 꾸려나가는 삶을 시도한다. 일자리를 구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새로운 삶의 의욕과 자유를 맛본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같은 ‘파블로’라는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그 이름을 감히 쓰지 못했던 오빠는 자신만의 삶의 뿌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 와중에 그들은 할아버지 피카소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그것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할아버지는 죽어서도 그들을 거부한다. 할아버지의 권력을 그대로 행사하게 된 자클린은 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오빠는 절망한다. 그는 할아버지를 사랑했고, 그를 가족으로 느끼고 싶어했으며, 그에게서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철저히 거부당한 채 결국 자살을 기도하게 된다. - “왜 그랬어?” “희망이 없잖아. 다른 해결책이 없었어. … 이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버지는 자클린 밑에 종속될 거야. 비겁하고 천박해. 피카소 제국은 네가 의학 공부하는 걸 거부했어. 피카소 제국은 네가 그 비참한 일을 하도록 만들었어. 피카소 제국은 네게 모든 문을 닫았어. 그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돼. 그래서 있잖아 마리나…. 난 마지막 가출을 했어. 너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 가출을 한 거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어. 난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안으로부터 폭발시키고 싶었어. 이제 그들은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이제부터 그들은 너를 돌볼 거야. 적어도 여론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야.” - 오빠의 장례식에서 몰래 숨어 울던 아버지는 2년 뒤 암으로 죽는다. 피카소를 추종하던 여인들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리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 가혹하다. 피카소의 손녀이기에 받게 된 막대한 유산도 그녀를 짓누를 뿐이다. 이 모든 비극의 유일한 책임자는 할아버지였다. 마리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
|
<원망을 뛰어넘어 한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고통의 세월을 녹여낸 가슴뭉클한 이야기>
14년간의 정신 상담을 받으며 마리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에게 한 폭의 그림은 파괴들의 총합이다”라고 말한 할아버지 피카소에게 자신을 비롯한 가족은 그의 창작을 위해 파괴되어야 했던 존재들임을. 그의 작품은 그의 유일한 언어요, 세상에 대한 유일한 비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 갇힌 채 현실과의 모든 관계를 잃었으며, 그 누구도 헤치고 들어갈 수 없는 내면 세계에 틀어박혔던 것이다.
그가 즐겨보던 투우는 바로 그의 삶이었다. 그는 칼 대신 붓을 휘두르고 붉은 천 대신 화폭을 흔들며 죽음과 싸우는 투우사였다. 가족 누구도 그가 싸웠던 고독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그의 투우장에 다가갈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클린은 무책임하게도 피카소라는 퍼즐의 한 조각으로만 머물며 투우장의 벽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저택에 틀어박힌 채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홀로 죽었다. 늘 바라던 것처럼 혼자서. 마리나는 말한다.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 - 우리가 누구이기에 그가 싸움을 벌이는 투우장에 들어갔노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예술에 전념하기 위해 그가 버린 모든 것을 그에게 다시 요구하려 든다는 건 얼마나 파렴치한 행위인가? 돈, 가족, 애정, 존중―전통적 가정의 일상을 이루는 그 수천 가지 하잘 것 없는 것들을 말이다. - 마리나는 비로소 할아버지를 이해한다. 자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세계에 있다고 해서, 평범한 할아버지가 되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원망했던 자신의 이기심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비로소 ‘피카소의 손녀’라는 원망과 미련의 굴레를 벗고 ‘마리나 피카소’로서의 온전한 자기 모습을 되찾게 된다. 현재 마리나는 자선단체 ‘마리나 피카소 재단’의 대표로서 베트남 등지에서 왕성하게 사회복지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베트남에서 세 아이를 입양하여 자신이 낳은 두 아이와 함께 키우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이 자아를 확립하도록,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절망에 빠뜨릴 권리가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는 있는가?’―이 책의 처음부분에서 저자가 제기한 의문이다. 그는 이제 답할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그의 삶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삶이 있다. 삶이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라는 제목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한 가운데 단숨에 읽히는 묘미가 있다. 프랑스에서 출간 당시 피카소의 혈육이 쓴 최초의 피카소 이야기라는 이유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이 책은 마리나 피카소라는 한 여성의 고통의 세월을 녹여낸 가슴뭉클한 이야기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읽는 이를 끌어들인다. 작품뿐 아니라 수많은 매체와 상품들을 통해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피카소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방식과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