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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명문가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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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도덕적 카리스마로 마음을 얻다 _논산의 명재 윤증 고택
일생 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백의정승’, 윤증|뜻을 이룰 수 없으니 벼슬이 무슨 소용인가|대과급제 47명을 배출한 종학당|文으로 덕을 쌓고, 實로써 양민을 돌보다|민간 구휼사업인 의전과 의창제도를 실행하다|동학과 전쟁도 피해간 적선지가(積善之家)

천문과 지리의 이치를 빌려 인재를 낳다 _경주 양동마을 경주손씨 대종택, 서백당
영남 지역에 고택이 많이 남은 이유|조선시대의 비버리힐즈, 양동마을|지리가 사람의 길을 열다|서백당 산실이 낳을 마지막 인물|한 그루의 나무에 새겨진 깊은 뜻|선대의 품위와 가풍을 대물림하다

나라를 위해 칼을 들고, 민족혼을 위해 붓을 들다 _전남 담양군 창평면 고씨 집안
대한민국 오피니언리더의 산실|근대 한국 우파 정치의 발원지인 상월정|중용의 도로써 격랑의 시간을 헤쳐 나가다|일제의 자본시장 침탈을 막았던 창평상회|가문과 국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다|3부자 불천위를 받은 명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살아 있는 전설 _우당 이회영과 형제의 일가
정승 열 명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전 가족이 마차를 타고 만주로 망명하다|헤이그 특사 사건과 고종 중국 망명 계획|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한국은 우당 집안에 빚을 졌다…

수백 년 내력의 가풍이 만든 인재 _인동장씨의 수재 집안
학벌 좋은 대한민국 신명문가|케임브리지대와 런던대의 두 아들|인재를 만드는 DNA|강골 기질과 아이큐가 결합하여 인재를 낳다|독립운동, 민주투사 그리고 교육투자

풍수도참의 명당에서 기운을 얻고 덕망을 쌓다 _정읍 평사리 강진김씨 고택
음택은 회문산, 양택은 평사낙안|사람이 집 짓고 살기에 가장 좋은 명당 중의 명당|자유로운 사상의 조류 속에서|공동체의 평안을 지상과제로 알았던 집안|기러기가 내려앉은 땅에 자리 잡은 집|전란도 피해간 덕망의 십승지

세속을 벗고 인간의 자존을 지킨 진정한 선비의 가문 _안동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
영남풍류의 전형을 보여주는 고택|오벽(五癖)을 지녔던 풍류가객 허주 이종악|버리고, 또 버리고, 다시 버리다|선대의 넋은 몇 줄의 글로 남고|구한말 아홉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혼의 탯줄|시대를 앞서는 정신이 머무르는 곳

국가 수호의 정신을 이어온 왕가의 집안 _전주이씨 광평대군파 고택, 필경재
조상의 얼과 후손의 몸이 함께 사는 집|인조반정의 공신집안|수도 방위와 호국의 가풍|외국의 사절들에게 한국의 멋을 알리는 명소

문화재 보존으로 독립운동을 한 명문 _간송 전형필과 간송 집안
무인에서 상인으로 변신하다|성북동 시대의 서막을 열다|문화재를 보는 감식안|금싸라기 땅을 팔아 사디 대접을 사다|김한태와 간송|간송학파가 형성되다|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보기 드문 집안|차라리 내가 어려울지언정|간송미술관의 딜레마

저자 소개 2

강호동양학자, 사주명리학 연구가, 칼럼니스트.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이야기꾼. 강호江湖를 좋아하여 스무 살 무렵부터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을 드나들며 수많은 기인, 달사, 학자들과 교류하고, 700여 개의 사찰과 고택을 답사했다.문文·사史·철哲·유儒·불佛·선仙·천문·지리·인사 등을 터득한 그의 학문 세계를 강호동양학이라 일컫는다. 미신으로만 여기던 사주명리학을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방편이자, 철학과 인문학으로 대접받는 첫 기단을 올린 장본인이다. 문필가로서의 그의 문장은 동양 산수화의 부벽준처럼 거칠 것 없이 시원하다는 평을 듣는다.
강호동양학자, 사주명리학 연구가, 칼럼니스트.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이야기꾼. 강호江湖를 좋아하여 스무 살 무렵부터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을 드나들며 수많은 기인, 달사, 학자들과 교류하고, 700여 개의 사찰과 고택을 답사했다.문文·사史·철哲·유儒·불佛·선仙·천문·지리·인사 등을 터득한 그의 학문 세계를 강호동양학이라 일컫는다. 미신으로만 여기던 사주명리학을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방편이자, 철학과 인문학으로 대접받는 첫 기단을 올린 장본인이다. 문필가로서의 그의 문장은 동양 산수화의 부벽준처럼 거칠 것 없이 시원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간의 저서를 통해 그는 한국인의 ‘마음의 행로行路’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주 먼 과거에서 시작하여 미래로 이어지는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이다. ‘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여행을 통해 경험하고 실천함으로써 이치를 궁구하고, 마침내 무한한 대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그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조용헌의 사찰기행》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방외지사》 《조용헌의 고수기행》 《동양학을 읽는 월요일》 《조용헌의 휴휴명당》 《동양학을 읽는 아침》 등이 있다. 현재 〈조선일보〉 칼럼 ‘조용헌 살롱’을 2004년부터 14년 넘게 연재중이며,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석좌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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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백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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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태어나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80-90년대 농촌을 기록한 〈비탈〉(1994),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기록한 〈고려팔만대장경〉(1998), 禪 풍경 〈흔들리는 경계〉(2000), 禪 풍경 〈흐름〉(2003) 등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이십여 번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 강원도청, 고토갤러리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우리 문화와 전통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며, 대학에서 사진 관련 강의를 하는 한편, (주)예진디자인의 연구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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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2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353쪽 | 731g | 148*210*30mm
ISBN13
9788925531717

출판사 리뷰

무엇이 명문가를 만드는가?
도덕적 카리스마와 불굴의 리더십으로
역사의 등대가 된 아홉 곳의 명문가 이야기


현재 한국은 찢어지고 분열되었지만, 이를 통합하는 방법이나 대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정(正)이 있으면 반(反)이 있고, 그 다음에는 합(合)이 나온다고 배웠는데 어찌 우리는 정 · 반만 있고 합이 없는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의 모색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집안들은 분열된 우리 사회를 통합시키는 데 모범이 되는 명문가들이다. ‘난리 났을 때 영웅이 나온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명문가는 혼란기에 생겨난다고 본다. 혼란기에 역사의 검증을 받는 법이다. 또한 분열된 혼란기에 중론을 모을 수 있는 집이 명문가의 역할이기도 하다. 이렇게 나라가 찢겨진 상황에서야말로 제대로 된 명문가가 필요하다.
_「머리말」에서

■■□ 다시 발현될 ‘시대의 정신’을 기다리며
우리의 역사 속에서 혼란과 분열의 시기에는
어김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발현되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현재에 이르는 한국 근세 100년의 역사는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자존을 지키기에는 너무나도 굴곡이 많고 가팔랐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집안은 거의 대부분이 풍비박산 났고, 그게 아니면 친일로 지탄을 받았다. 해방 이후에는 좌익이 아니면 우익에 걸렸고, 또 다시 독재 정권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상처를 입었다. 이 격랑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자존심 강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와 탄압의 뭇매를 맞고 스러져갔다. 빠른 속도로 자본시장이 재편되면서 부의 구도도 변했다. 그리고 ‘민간 구휼’과 ‘교육’, ‘국난 극복’에 몸을 사리지 않았던 우리의 수많은 명문가들도 명멸해갔다.
『조용헌의 명문가』는 저자의 문명(文名)을 있게 한 역작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2002년 1월 출간)에 이어 7년 만에 펴내는 후속작이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 500년과 근세를 관통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를 발휘했던 대한민국 명문가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전작이 명문가를 만드는 요소와 원칙에 비중을 두었다면, 후속작 『조용헌의 명문가』는 명문가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행동양식과 그들의 드라마틱한 역사를 그리는 데 천척하고 있다. 때문에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만큼 생동감이 있다.

■■□ 풍부한 인문학적 정보와 기록되지 못한 역사의 발굴
사건과 인물, 향토문화를 통해 들여다본 당대의 역사적 기상도

『조용헌의 명문가』가 조명하는 또 하나의 굵직한 틀은 책에서 거론하는 명문가들이 태동하고 성장하던 시기에 발생한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과, 당대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 속에서 각종 사화와 당쟁을 거치는 동안 힘의 균형이 어디에 쏠렸는가에 따라 권력의 구조 역시 재편된다. 집권 세력의 인물들은 중앙에 진출해 주류의 역사를 형성했고, 벼슬길이 끊겨 귀거래(歸去來)를 한 이들은 향토문화를 육성했다. 현재 영남 지역에 고택이 많이 남은 이유 역시 조선후기 150년 동안 영남의 남인들이 정계에서 배제되었던 역사적 사건을 들 수 있다. 정계에 진출했던 기호지방의 노론에 비해 영남의 남인들은 집안 보존과 관리에 더 철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명문가들의 덕행은 권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실천되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힘썼고, 비교적 권력이 약한 자는 향토공동체의 안위와 내실을 기하는 데 기여했다. 여기서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이 특권층의 한계를 넘어 보다 확산되어야 하는 근거 역시 여기에 있다.

풍수도참의 관점에서 바라본 명문가의 조건
또한 저자는 사주명리학의 대가답게 풍수도참의 관점에서 명문가의 탄생 조건을 설명하는 데에도 비중을 둔다. 우리나라 명문가들이 풍수적인 길지에 터를 잡은 데에는 우리나라 선비들의 학문과 사상의 흐름에 그 이유가 있다. 선비들은 젊은 시절에는 ‘유가(儒家)’를 선호하지만 세상의 험한 꼴을 겪다가 50대를 넘어서면 ‘도가(道家)’를 지향했고, 도가는 공통적으로 풍수도참과 지형지물법에 밝았다. 하지만 저자는 ‘지리’에 ‘인물’과 ‘덕행’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명문가가 탄생했다고 본다. 조선시대에는 길지라고 소문난 땅이 여러 곳 있었다. 웬만큼 재산을 모은 집안들은 너나없이 이 길지에 터를 잡았다. 그렇다고 그 집안들이 모두 명문가가 되고 모두 역사적 명맥을 유지한 것은 아니다. 동학과 6.25를 겪는 동안 많은 집안이 거꾸러졌다. 하지만 평소에 덕행을 쌓았던 명문가들은 혼란의 역사 속에서도 살욾남았다. 명당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었던 것이다.

■■□ 서구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
희생과 용기를 담보로 한 서구사회 귀족의 특권의식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왕위계승 문제가 발단이 되어 시작된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347년,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북부의 조그마한 항구도시 칼레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끈질기게 저항해온 칼레가 드디어 백기를 든 것이다. 에드워드 3세는 항복 의사를 전하는 칼레의 시민대표에게 자비를 베푸는 대신 여섯 명의 목숨을 대가로 내놓으라고 말한다. 이에 칼레에서 가장 부유한 시민이었던 외스타슈 생 피에르가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하나둘 나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원자가 일곱 명이 되었다. 이에 생 피에르는 다음 날 장터에 가장 늦게 나온 사람이 빠지는 것으로 하자고 의견을 낸다. 다음 날, 생 피에르를 제외한 여섯 명이 장터에 모였다. 시민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생 피에르를 향해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생 피에르의 아버지가 나타나 아들의 죽음을 전한다. 생 피에르는 나머지 여섯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을 돌려보낸다.

‘특권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이 거론될 때면 가장 많이 예시되는 역사적 사건이 위에 언급한 ‘칼레의 시민들’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2천 년 역사를 지탱한 힘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철학에 있었다고 말한다. 로마의 귀족은 평상시에는 호사를 누리며 군중 위에 군림하지만 전쟁이 나면 대열의 선두에 서서 군대를 이끌었다. 로마의 귀족은 용기와 희생이라는 덕목을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비로소 사회지도층이라는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 시작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유럽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윤리였다. 유럽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미국으로 옮겨오면서 새로운 양상을 띤다. 귀족 계급이 따로 없었던 미국 사회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특권층의 책무가 아니라 시민의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여졌으며, ‘기부’라는 형태로 부의 사회적 환원을 실행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현된 것이다.

■■□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재발견
기근에는 창고를 열고, 국난이 닥쳤을 땐 분연히 일어서다!

서구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위 ‘사회지도층’이 보이는 도덕적 해이가 위험 수위에 달해 있고, 계층 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는 까닭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 사회는 ‘분열’이라는 지독한 열병에 걸려 있다. 과연 우리 사회를 통합할 ‘시대의 정신’은 영원히 소멸되고 만 것인가?
이 책의 저자 조용헌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과거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는 역사의 위기 때마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도덕성으로 만인의 등대가 되었던 명문가들의 흔적을 추적하며 이 시대의 희망을 탐색한다.

도덕성과 리더십, 불굴의 용기를 지녔던 대한민국의 명문가

1. 논산 명재 윤증 집안
논산의 윤증 고택 사랑채에는 담장이 없다. 그만큼 투명하고 숨길 것이 없었다. 명재는 자기관리에 철저했으며 후손들이 허례허식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썼다. 또한 서민들의 생계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했으며, ‘종학당’이라는 사립 교육기관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썼다. 종학당은 문중의 후손뿐만 아니라 주변의 학생들에게도 개방되었다. 그리고 교육을 시키면서 노동력의 손실에 대한 대가로 오히려 장학금을 지불했다. 이런 적선이 있었기에 윤증 집안은 동학과 6.25를 겪으면서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2. 경주 양동마을 경주손씨 집안
조선시대의 비버리힐즈라고 할 수 있는 양동마을에는 경주 손씨 집안의 종택인 서백당이 있다. 경주 손씨 집안은 후손 교육이 각별하여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는 이 집안의 가풍은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보전하는 씨암탉 역할을 하고 있다.

3. 전남 담양 창평고씨 집안
교육과 민간 구휼, 국난 극복이라는 명문가의 조건을 전방위적으로 갖추고 있는 보기 드문 집안이다. 일제의 자본시장 침탈을 막기 위해 창평상회를 세워 민간대출과 생필품 공급에 힘썼으며, 근대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는 3부자(父子)가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또 다시 3부자가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4. 우당 이회영 형제 일가
정승을 10명 가까이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이었으며, 3만 석의 갑부였던 우당 이회영 일가는 을사늑약이 이루어지자 분을 이기지 못하? 가산을 전부 정리하여 일가족 전체가 만주로 향한다.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를 양성했으며,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그동안 가세는 기울고 식구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살아 돌아온 이는 6형제 중 다섯째인 이시영뿐이었다. 환국한 이시영은 공항에서 회한의 눈물을 쏟았다. 저자는 말한다. 한국은 우당 집안에 빚을 졌다고.

5. 인동장씨 집안
귀족 계급이 사라지고 난 이후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가장 큰 요소는 ‘학벌’이 되었다. ‘부’가 있어도 ‘문’을 갖추지 못하면 졸부에 그친다. 인동 장씨 집안은 ‘학벌’로 신명문가의 대열에 든 수재 집안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3선 국회의원인 장재식 씨의 두 아들인 케임브리지대학의 장하준 교수와 런던대학의 장하석 교수를 들 수 있다. 이 집안에는 수재와 천재가 수두룩하다. 이 집안의 신명문가 DNA는 가문의 오랜 가풍과 내력이 만든 것이다.

6. 정읍 평사리 강진김씨 집안
명당 중의 명당에 자리 잡은 강진 김씨 집안의 규당 고택. 저자는 풍수도참설에 근거하여 이 집안의 기운을 살핀다. 하지만 명당은 하늘이 만들지만,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 이 집안 사람들 사이에 대대로 내려온 지상과제였던 ‘공동체의 평안’이 명당과 명문가를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7. 안동 고성이씨 집안
영남을 대표하는 양반 집안이었다. 낙동강 상류에 자리 잡은 99칸의 대저택 대문 앞에는 낙동강을 오르내릴 수 있는 유람선의 접안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런 집안이 일제 강점기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만주로 향했다. 집안의 자손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그 후손들은 고아원에서 자라야만 했다. 초대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이 바로 임청각의 종손이다.

8.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집안
서울에서 500년 내력을 지닌 유일한 고택인 필경재는 이 집안의 종택이다. 인조반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 인조반정 이래로 300년 동안 조선의 주류집안 위치를 지켜왔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산성 축조를 주도했던 집안이기도 하다. 지하철 창동역과 녹천역은 이 집안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집 뒤에 남아 있는 13만 평의 묘지에 700여 기의 조선시대 묘지가 예법에 맞게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묘지박물관이라고 할 만하다. 이 집에 얽힌 재미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18대 종손 이병무 씨의 입을 통해 듣는다.

9. 간송 전형필 집안
간송은 ‘문화재 보존’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구한말 10만 석 재산을 가진 갑부 중의 갑부였던 간송 집안은 일제 강점기에 뿔뿔이 흩어진 문화재를 구입하는 데 재산을 고스란히 썼다. 문화재 소장이라는 한 길만 팠기에 전란을 거치면서도 책을 잡히지 않았고, 문화재 역시 오늘날까지 보전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우리나라 문화?예술사의 구심점이 되었던 간송학파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 분열과 혼란의 시기를 통합할 시대의 정신을 기대하며
분열된 우리 사회를 통합할 이 시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좌파니 우파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적 노선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계층 간의 분열도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 IMF를 능가하는 경제 한파까지 닥쳤다. 한국 사회는 지금 여러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위기가 처음 닥친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한 일도 겪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갈기갈기 찢어진 사회를 통합하는 위대한 정신이 발현되었다. 명문가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무엇이 명문가를 만드는가?’
7년 전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를 펴내며 던졌던 저자의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리고 이 질문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맥을 같이한다. 분열과 혼란의 시기에 이 사회를 통합할 ‘시대의 정신’을 기대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이 우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을 되살리는 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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