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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垠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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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의 뜻과 음을 하나하나 익히고 독선생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이 무지한 노비 아이에 불과했던 반석평은 점차 학동의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근심 또한 그에 비례하여 늘어난다고 했던가. 단순히 글을 익히면 출세 길이 열리리라 믿었던 반석평은 그즈음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학문을 아무리 익혀도 과거를 통과하지 못하면 출세할 수 없는 것이 조선의 제도였기 때문이다.
‘난 미천한 상놈 집안의 소생이라 노비가 된 것이 아니야. 다만......’ 고려 시대부터 조선조를 거치면서 벼슬을 산 숱한 조상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러나 반석평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거 조상의 생활이 어떠했든 현재의 반셕평은 노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 「제1부 통감읽는 노비 - 반석평 편」 중에서 “억울하다. 정말 억울하다.” 유극량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무예를 닦던 곰솔 근처 들판에 이르러서야 온몸을 부르르 떨며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천출이 무엇이고., 양인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대관절 그것이 무엇이기에 인간의 소망을 이처럼 철저하게 짓밟는단 말인가. 허물어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은 유극량은 한바탕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제1부 옥잔 하나에 뒤바뀐 인생 - 유극량 편」 중에서 그런데 방 앞으로 다가간 숙종이 힐끗 안을 들여다보니 뜻밖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벽에 옷 한 벌이 걸려 있는 것은 무당들과 장님이 머물던 방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그런데 방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무수리 하나가 음식상을 차려놓고 앉아 벽에 걸린 옷을 바라보며 소리죽여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바로 무수리 최씨였다. --- 「제2부 임금의 어머니가 된 궁궐 무수리 - 숙빈 최씨 편」 중에서 “네 성이 무엇이냐.” 임금은 어린 궁녀에게 성까지 물어보았다. “노가이옵니다. 상감마마를 모시려고 궁에 들어왔습니다. 왕자 마마를 낳으려구요. 한둘쯤...... 하온데 사흘이 되도록 뵈올 길이 없사와 노심초사 괴로웠나이다.” 삼천리강산의 주인이요, 철권통치의 주인이었던 무서운 임금도 순간 어린 궁녀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꽃다운 이 소녀 궁녀의 당돌함을 임금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 「제2부 태종에게 바친 궁녀의 청춘 - 소빈 노씨 편」 중에서 “전 궁중 생활이 두렵사옵니다. 서로 시기하고 상처 입히고, 괴롭히는 이런 생활은......” 순임이 흐느꼈다. 세자는 와락 그녀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내가 너를 지키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리라. 이제부터는 안심해도 좋다. 그간 너를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한 것 미안하다. 이젠 됐느냐?” 순임이는 세자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았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할 인생이라면 세자의 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으리라. --- 「제2부 왕비가 된 시골 처녀 - 순임이 편」 중에서 어느 날인가, 신유한의 아버지 신태시가 낮잠을 자다가 심상치 않은 꿈을 꾸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자신의 입속으로 쑥 빨려드는 꿈이었다. 사람이 태양을 머금는다는 것은 예사 꿈이 아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 곰곰 꿈 해몽을 해보던 신태시는 한순간 잔뜩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하늘이 뛰어난 자손을 자신에게 점지해 주고자 그런 태몽을 꾸게 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 「제3부 서자의 한 - 신유한 편」 중에서 때마침 이달이 허봉의 집을 방문한 날, 형님 집에 다니러 온 허균은 이달의 허름한 겉모습만 보고 깔보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형에게 시에 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조선의 대시인 앞에서 동생이 결례를 범하는구나 싶었던지 허봉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허어, 이 사람. 조선의 대시인이 이 자리에 계시는데 그래 아우는 소문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손곡 선생, 우리 아우를 위해 시 한 수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이런 말과 함께 허봉은 운자를 불러 주었다. 그러자 이달은 기다렸다는 듯 시 한 수를 읊어 보았다. --- 「제3부 방랑 시인의 꿈 - 이달 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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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UN사무총장의 선조가 노비였다고?
도서출판 타오름에서 내놓은 「우리가 몰랐던 인물 한국사 300권 시리즈」 가운데 제1권 『문밖에서 부르는 조선의 노래』 첫 페이지를 넘겨보면,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대목이 반기문 UN사무총장의 선조 반석평이 한양 이 참판 댁 노비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반석평은 노비 신분에 머물지 않고 주변의 비아냥거림과 멸시를 이겨 내며 글공부에 매달린 끝에 과거에 급제한다. 조선처럼 신분의 벽이 드높은 사회에서 노비의 신분으로 글공부를 한다는 것, 과거에 급제한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판서라는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 과정 동안 얼마나 모진 고난과 아픔을 견뎌내야 했다는 것일까.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조선이라는 엄격한 신분 사회 속에서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꿈을 이루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건 인물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반석평을 위시하여 여종의 자식이었으나 무과 급제를 통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유극량, 어머니가 종의 신분이었으나 뛰어난 학식으로 벼슬에 올라 덕으로 백성을 다스렸던 신유한, 서자의 한을 시심으로 달랜 조선 최고의 시인 이달 등...... 비록 그 노력의 결말이 꿈꾸던 화려한 성공의 모습만은 아니더라도 인물들 각자가 개인의 역사에 충실했기에 조선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역사에도 진실되게 기록될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삶의 자세요, 진정한 교훈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