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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프롤로그 바라나시: 읽는 법을 배운 곳 1부 알라하바드: 네루, 간디, 그리고 민주주의 아요디아: 근대의 옷을 입은 힌두교 발리우드: 빛나는 인도 2부 카슈미르: 민족주의의 대가 파키스탄: 지하드의 세계화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 물라, 그리고 군벌 3부 네팔: 인민전쟁 티베트: 거꾸로 가는 나라 옮긴이의 글 |
Pankaj Mish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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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별개라고 해도, 식민지 국민이니만큼 나는 서구의 자식이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영국은 내가 성인이 되어 스스로 선택한 삶의 터전이었다. (…) 아무튼 런던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책상 앞이었고, 주변세계와는 야트막한 관계만을 유지했다. (…) 탈레반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담당하는 미국대사관의 고압적 전문가들은 끊임없이 ‘우리’와 ‘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그 인간들’, 즉 탈레반이 특별손님인 오사마 빈 라덴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수염을 기르고 아프간 모자를 쓴 내 모습이 ‘그들’(철옹성 같은 대사관의 벽 너머에서 비자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과 비슷했는데도, 미국인들은 내 소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의 일원이었다. 이 외딴 곳의 위태로운 초소에서도 볼링장과 칵테일바와 사무실 벽에 걸린 바비큐파티 사진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강력한 제국주의 문명의 일원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힌두교 이론가들조차, 종국에는 지하드주의자와는 달리 서구의 지식과 권력에 도전하거나 저항하길 원치 않았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 서구가 장악한 그 세상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 안에서 자신들이 운신할 틈새를 찾았다. 그들은 무엇보다 교활한 물질주의자들이었다. 서구와의 이런 실용적인 협력관계야말로 지난 150년 동안 새로운 힌두 르네상스를 창출한 힘이었다. 정치적 자유는 얻었는데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문화를 잃어버렸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가 폭력을 거부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티베트 사람들이 폭력을 사용할 경우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비폭력은 우리가 애써 지키고 있는 티베트 문화와 결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브라만 세력, 달리트의 목소리, 인도의 통합. 전부 일정한 현실을 담고 있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의미를 너무 부풀린 나머지 그 말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의 단순한 의도를 잊기 쉬웠다. 그리고 정치인들이란 자신이 하는 말을 늘 잘 알고 있는 건 아니며, 표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 개인의 영달이라는 같은 목적을 위해 떠들고 싸우는 종족들이었다. 정치인들이 오용한 말들은 거의 숫자에 버금가는 중립성을 획득했다. 그 말들은 어지러운 선거정치판 어디에나 끼워 넣을 수 있었고, 선거정치는 사회경제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이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는 점점 더 솔깃한 방법이 되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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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앎이 겉돌지 않는 세상을 향한 분투기!
9·11테러의 충격 이후 미국뿐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미국에 지지의사를 내비칠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국가들은 이슬람권을 이른바 전지구적 ‘악의 축’ 세력으로 규정하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이처럼 거대한 폭력은 이라크전쟁이라는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한편 2001년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잡고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한 아프간전쟁은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낳으면서 현재까지도 지지부진하게 이어져오고 있다. 2009년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군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이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끊임없는 분쟁 등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들 지역에서 일상처럼 지속되고 있는 폭력은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2006년,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주목할 만한 책 100권’에 선정되기도 한 이 책 『거꾸로 가는 나라들』은 바로 그 폭력, 그리고 이들 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는 빈곤과 불평등의 이유를 찾아나선 여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 출신의 저자인 판카즈 미시라는 이 책을 통해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및 그 주변 나라들이 탈식민지와 탈냉전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서구의 근대라는 개념을 어떻게 수용했으며 또 그로 인해 어떤 상처와 폭력을 껴안고 살아가게 됐는지를 여행기의 형식에 담아낸다. 저자가 여행하는 인도, 파키스탄, 분쟁지인 카슈미르지방, 아프가니스탄, 네팔, 그리고 심지어는 뭄바이의 발리우드에서조차 어디서든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것은 ‘그들’과 ‘우리’의 나눔이며, 배제의 언어였다. 덕분에 우리는 계속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성찰하는 한 저널리스트의 순례기! 이 책은 먼저 식민지시기 영국이 남겨놓은 흔적들, 제도로서 도입된 서구식 민주주의, 그리고 힌두 민족주의자와 이슬람교도가 정치·종교적 문제로 갈등에 갈등을 반복하고 있는 알라하바드와 아요디아, 인도의 할리우드라 불리지만 정작 화려함이나 성공과는 거리가 먼 발리우드(뭄바이)를 차근차근 돌아본다. 이어지는 2부와 3부에서는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인 카슈미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 티베트 등지에서 이제는 거의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 내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폭력을 저자의 생생한 경험으로 전달해준다.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각양각색의 신을 섬기는 나라들이지만 이들이 처해 있는 문제는 거의 비슷하거나 심지어는 동일해 보인다. 서구식 근대화의 급물살을 타면서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에만 전전긍긍하는 소수 중산계층, 그리고 그보다 훨씬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늘 빈곤에 허덕이는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 간의 문제가 그들 내부의 것이라면, 자신들이 가진 종교의 수난사를 배타적 종교 민족주의로 끌어올리면서 그것을 정치적 선동의 도구로 삼고 신과 종교라는 명목을 내세워 살인과 방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문제는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선다. 인도와 영국을 오가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는 이 나라들이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의 무게 속에서 어떻게 근대화를 이루어낼 것인가”라는 공통된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에 주목하고 그들이 “근대화와 멸망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그들만의 속사정으로 치부해버리기엔, 9?11테러에서도 보았듯, 서구세계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내비친다. 그러나 서문에서도 저자가 고백하듯이 이 책은 “정치인이나 훈수꾼 언론이 선호하는 광의의 일반화”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며 “민주주의와 종교, 또는 테러 같은 문제를 추상적으로 거론”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자기가 과감한 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따위를 걱정하는 뭄바이 영화계의 스타 배우들에서부터 지하드를 조롱하는 파키스탄의 마약중독자까지, 또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는 인도 마피아 두목에서 미국의 자선을 기다리는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까지, 그리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카슈미르의 이슬람교도에서 정치적인 역학 관계 속에서 종교를 보존하기 위해 싸우는 티베트 사람들까지, 각기 다른 나라들과 각기 다른 계층을 아우른다. 그래서 이 책은 여행기라는 외피를 쓰고는 있되, 자서전적 성격과 탐사보도의 저널리즘이 곳곳에 배어 있는 책이다. 번역된 세계를 여행하는 한 경계인의 표류기! 1857년 이후에 지은 건물들을 보면 장난스럽게 뒤섞인 건축 양식들에서 특권의 단맛을 즐기던 그 사람들에 대한 키플링의 시선이 느껴진다. 저자의 이번 여행은 인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몼소인 갠지스강이 흐르는 곳에서 시작된다. 인도의 고도古都 바라나시다. 「바라나시 : 읽는 법을 배운 곳」이라는 이 책 첫머리의 제목이 암시하듯, 저자에게 바라나시는 의식의 피안에서 스멀스멀 꿈틀거리는 열등감의 정체를 알게 된 곳이며, 서구의 문화와 서구의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운 곳이다. 바라나시의 한 대학도서관의 먼지 풀풀 날리는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과 구스타프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책, 그리고 라제시라는 인물과의 만남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프가 되어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저자는 어쩌면 한낱 서구의 문화를 동경하는, 지극히 평범한 책벌레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결정적인 사건은 라제시라는, 아직도 그 정체가 묘연한 인물과의 만남이었다고 술회한다. 몰락한 브라만 출신으로 어려서는 저자조차 말로만 들었던 카페트 짜는 노동을 해야만 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여전히 대학주변을 기웃거리는 룸펜이자 저자가 바라나시에 머무는 동안 후견인 역할을 했던 라제시는, 저자가 읽고 있었던 에드먼드 윌슨의 책 『감정교육』을 두고 이렇게 말했었다. “이건 내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야.” 책을 그다지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흘려들었던 그 뜬금없는 라제시의 말은 두고두고 저자에게 울림을 주었다. 라제시 덕분에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나는 1996년에 에드먼드 윌슨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윌슨 탄생 100주년이었던 1995년에도 한 번 시도를 했었지만, 그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하는 데 그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내가 미국이나 유럽 작가들처럼 글을 쓰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윌슨의 핵심 저작들을 직접 논하는 것만 생각했지, 바라나시라는 고색창연한 도시의 낡은 먼지투성이 도서관에서 윌슨의 책을 발견한 나만의 경험 속에 색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이 속에는 서구의 지식을 정전正典처럼 대했던 태도에 대한 부끄러움이 담겨있다. 입심 좋은 지식인들이 어디 가서 잘난척하는 데 써먹을 뿐인 지식이라면, 나와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악영향만을 끼칠 뿐이다. 가령 저자가 말하듯, 독립 이후의 인도가 네루라는 걸출한 정치인의 독서와 여행을 통해 엄선한 계획들을 실행하는 ‘개인적인 실험실’로 전락하게 된 것은, 서구와 서구의 지식을 단지 따라잡아야 하는 욕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한계 덕분이 아니었을까? 네루는 책을 읽는 법은 알았으되, 세상을 읽는 데 있어서는 문맹이었던 셈이다. 이 책의 부제에 ‘번역된’ 세계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도를 비롯한 그 주변 나라들의 종교와 정치에 관한 역사는 19세기 서구 식민주의 세력의 침탈의 역사였으며, 바로 그 과정을 포괄적으로 ‘번역’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세상을 단 하나의 언어로 번역해버린, 저 ‘근대화=문명화’라는 가공할 프로젝트가 남겨놓은 잔상을 비추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담담해야 했을 것이다. 사무친 원한과 악순환되는 폭력의 현장 속의 격한 감정을, 그리고 인도식으로 버무려진 발리우드의 조증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냉정하게 가라앉히지 않고서도 사태를 ‘성찰’할 수 있는 언어를 내보이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도와 그 주변의 세계를 진지하게 대면하면서 이 복마전과 같은 현실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그 결과를 절제된 언어로 묘파해낸다. 가장 극단적인 힌두교 이론가들조차, 종국에는 지하드주의자와는 달리 서구의 지식과 권력에 도전하거나 저항하길 원치 않았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 서구가 장악한 그 세상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 안에서 자신들이 운신할 틈새를 찾았다. 그들은 무엇보다 교활한 물질주의자들이었다. 서구와의 이런 실용적인 협력관계야말로 지난 150년 동안 새로운 힌두 르네상스를 창출한 힘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서구적 민주주의가 제도로서 도입되었으되, 그것의 가치와 명분은 쏙 빠져 있는 채였다. 이를 인도식으로 ‘번역된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한갓 장식에 불과한 선거제와 같은 앙상한 제도로 어찌 수천 년 동안 퇴적된 문화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며, 부패한 현실을 가릴 수 있으랴. 저자가 말하듯, “인도를 장악하기 위해 영국이 만들어놓은 방대하고 복잡한 행정조직은 그대로 유지됐지만, 식민통치 기간에 방만하게 인도를 다스렸던 공무원들은 이제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뽑힌 정치인들의 야망에 적응해야 했다.” 결국 인도의 국내정치는 “국민회의당 같은 전국 정당에게 표를 넘겨주고 중앙의 권력과 부에서 한몫을 챙기려는 지역 및 카스트 지도자들과 체계하는 일련의 계약”으로 전락하게 된 셈이다. 이 점은 한국에궼도 쉽게 볼 수 있는 이른바 ‘계급배반의 투표’ 양상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거꾸로 가는 나라들’의 현실을 펼쳐 보이는 냉철한 비평! 『거꾸로 가는 나라들』에서 ‘신들의 나라’, ‘빛나는 인도’, ‘영혼의 성지’ 등으로 불리며 한껏 미화된 인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과 읽는 이로 하여금 어이없는 웃음을 짓게 만드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우스꽝스런 행태만이 인도의 현실을 설명해준다. 이는 비단 인도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브라만 세력, 달리트의 목소리, 인도의 통합. 전부 일정한 현실을 담고 있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의미를 너무 부풀린 나머지 그 말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의 단순한 의도를 잊기 쉬웠다. 그리고 정치인들이란 자신이 하는 말을 늘 잘 알고 있는 건 아니며, 표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 개인의 영달이라는 같은 목적을 위해 떠들고 싸우는 종족들이었다. 정치인들이 오용한 말들은 거의 숫자에 버금가는 중립성을 획득했다. 그 말들은 어지러운 선거정치판 어디에나 끼워 넣을 수 있었고, 선거정치는 사회경제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이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는 점점 더 솔깃한 방법이 되었다. 한편 힌두국가 건설을 천명한 RSS(민족봉사단)라는 단체의 산하 초등학교 교장이 “인류의 평등과 근대화, 하층카스트와 부족민을 고차원적인 문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믿음”을 피력하는 와중에 벌어진 일은 그들의 현실이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교장은 학생(가장 똑똑한 학생) 한 명을 불러 수세기 동안 오직 브라만만이 처벌의 두려움 없이 암송할 수 있었던 산스크리트 경전의 가야트리 진언을 외워보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 소년이 오른팔을 바닥과 수평이 되게 들었다가 가슴에 붙이는 RSS식 경례를 할 때만 해도 흡족한 표정이었던 교장은 소년이 진언을 외우다가 더듬거리며 얼버무리자 긴장한 표정이 역력해졌다. 결국 『거꾸로 가는 나라들』은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 현대세계의 한복판에서 갈등과 딜레마를 담은 이야기인 셈이다. ‘앞으로만 가야 하는’ 근대세계의 문법구조에 비추어본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거꾸로 가는 것뿐 아니라 단지 정체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거꾸로 가는’ 것이 될 수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카슈미르 지방에서 저자가 직시한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원한과 적개심으로 인해 진실은 은폐되고 사건의 전모는 모호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 스스로 찾아낸 희망의 원리! “진실 그대로 써야 합니다.” 그는 이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 해요. 서구 언론에서 하는 말에 좌우되면 안 됩니다.” 저자가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사람의 말은 우리가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준다. 스스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저력을 갖췄음에도 냉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왜곡된 근대와 전통의 반발로 곤욕을 치러야 했던 이들은 아직까지도 자신들만의 길을 스스로 찾아내길 원한다. “외국인들은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해요. (…)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찾아낼 겁니다.” 그러나 무수한 사람들이 그걸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종류의 고통에 시달렸으며, 그 길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이슬람의 새로운 모습이 과연 신도들에게 정의와 평화와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세계화에 맞설 여력이 있는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거꾸로 가는 나라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티베트에서 저자는 이들이 “거친 힘과 경제적 이해에 좌우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지켜가는지를 보여준다. 대량학살과 정치적 음모가 끊이지 않았던 티베트에서도 “즉각적이고도 극단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저자가 좀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가진 자신들만의 독특한 불교문화와 비폭력정신에 있다. 비폭력이 “결코 나약한 자의 선택이 아니며, 부단한 노력과 절제를 요하는 어려운 길이라는 것”이라는 한 젊은 승려의 말은 지금까지 힐난의 어조로서 사용되었던 ‘거꾸로 가는’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다. 적과 싸우면서 적과 닮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인류의 수많은 경험은 아마 이럴 때 다시 꺼내 곱씹어봐야 하는 것일 게다. “증오와 폭력으로 불의에 대응하는 건 쉽지만, 적에게 스스로의 잘못을 납득시키기란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티베트인은 말한다. 정치적 자유는 얻었는데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문화를 잃어버렸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가 폭력을 거부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티베트 사람들이 폭력을 ?용할 경우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비폭력은 우리가 애써 지키고 있는 티베트 문화와 결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가는 나라들』은 점점 더 위세를 떨치고 있는 자본주의와 세계와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나라들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면서 외부의 시선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에 빛을 비춘다. 덕분에 우리는 거대한 폭력과 전쟁의 행간에 감춰진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