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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EP.1 SA.BO.TA.GE. /찬호께이 EP.2 T&E /미스터 펫 EP.3 E PLURIBUS UNUM /찬호께이 EP.4 PROCESS SYNCHRONIZATION /미스터 펫 에필로그 연표 마치며 추천의 말 I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추천의말 II /김봉석 문화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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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가 접히고 포개지면서 체육관 벽 쪽으로 느릿느릿 이동하기 시작했다. 국왕폐하의 왼쪽 발목이 접히고 있는 스탠드의 철골 구조 위에 놓여 있다. 강철로 된 구조물 사이에 발목이 끼어 으스러지는 순간, 그는 무시무시한 비명을 질렀다. 내가 약을 너무 적게 넣었나 보다. 끔찍한 비명 소리에 게으른 청소부가 당황했다. 그러나 그 멍청이는 허둥지둥할 뿐 어떻게 기계를 멈춰야 할지 몰랐다. 존귀한 국왕폐하는 루이 16세가 그랬듯 자신이 단두대에 보내질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멍청한 청소부가 사람들을 불러와서 스탠드를 원래대로 펼쳐 계단 모양으로 만들었을 때, 이미 국왕폐하의 왼쪽 다리는 불구가 된 상태였다. 철골 구조와 체육관 바닥에 온통 피와 살점이 튀어 있었다. --- p.52
“으음…. 어? 여긴….” C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D는 말없이 C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꺄악! 너, 너, 뭐 하는 거야?” C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미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손목은 묶였고 하반신은 D에게 눌려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D는 아무런 대답 없이 흉포한 눈길로 자기 사타구니 아래 깔린 C를 응시했다. --- p.55 범죄를 구상하는 과정은 사실 굉장히 지루하며 커다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인내심을 지탱해주는 것이 바로 증오다. 아이린에 대한 증오를 이 여자에게 대신 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아주 냉정하게 아무런 동정도 없는 집을 10시간 가까이 주시할 수 있었다. 낡아빠진 소형 화물차에 앉아서 계속 집을 감시했다.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실조차 가지 않았다. 소변이 마려우면 옆에 놔둔 페트병에 일을 봤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어떤 요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 p.67 “솔직히 말해서 탐정으로서의 능력을 따지자면 전 유사 이래 가장 형편없는 탐정일 거예요.” 메이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탐문조사라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을 겁니다. 니지마 씨도 문제없이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료코는 당황했다. 상대방은 자기를 배웅하려는 눈치였다. 칭찬을 하며 띄워줬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그러나 그녀는 며칠간 사건을 조사하면서 상사의 압박을 겪은 뒤라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거기다 시게루가 귀찮게 굴기까지 했다). T&E는 그녀에게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사실상 메이구는 이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는 공권력의 개가 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도와야 할 사람은 정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서민들이지 진상을 덮으려는 후안무치한 공무원이 아니다. --- p.123 “도라에몽이 자주 쓰는 도구 중에 ‘만약에 박스’라는 게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게 뭔지 알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그건 거대한 공중전화박스처럼 생긴 건축물이다. 그 전화박스에 들어가서 수화기를 들고 ‘만약에 이 세계가 이러저러하게 변한다면’이라고 말한 뒤 전화박스에서 나오면 세계가 말한 대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보낸 이메일에서 샌드박스의 설명을 읽는 순간 바로 ‘만약에 박스’가 떠올랐어요. 비슷하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만약에 박스’가 만들어내는 세계가 진짜 세계가 아니라 실험용 샘플이라고 생각해봐요. 이야기가 다 끝난 뒤에 사용자가 다시 전화박스에 들어가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면 다 현실로 돌아오는 거죠.” “당신 말을 들으니까 확실히 비슷해요.” 나는 뭔가 깨달았다. --- p.169 “바텐더, 한 잔 더!” 내가 외쳤다. “더 마셔도 괜찮겠어요?” 메이구의 야마자키는 첫 잔도 아직 다 비우기 전인데 나는 대화하면서 쉼 없이 노란빛이 도는 액체를 목 안에 부었던 것이다. 사실 눈앞의 세계가 이미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스르르 넘어갔다. “조심!” 나는 비틀거리다가 바 테이블의 높은 의자에서 고꾸라질 뻔했다. 다행히 메이구가 얼른 일어나서 내 어깨를 감싸고 받쳐줬다. 그 바람에 나는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메이구….” 나는 그의 두 눈동자를 응시했다. “만약에 내가, 오늘 밤은 집에 가기 싫어요, 그렇게 말한다면…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할까요?” --- p.173 그런데 키팅은 처음부터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사보타주는 왜 로버트 애덤스를 석방시켰나? 시스템은 애덤스가 갱단 소년을 살해하는 시뮬레이션을 내놓은 다음 애덤스를 석방시켰다. 이 점을 줄곧 이해할 수 없었다. 시뮬레이션 시스템이 완벽하고 오류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갱단 소년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그 사건이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가 된다. 그렇다면 시스템이 애덤스가 심각한 폭력 성향을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는 뜻이다. 이런 인간이라면 정신안정도를 나타내는 C2 계수에서 합격 점수를 취득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프랭크는 피험자의 C2 계수가 높으면 시뮬레이션 결과 중 Z 수치가 900 이상인 중범죄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애덤스는 확실히 합격했다. --- p.299 감시 시스템은 최근 인터넷 토론 게시판을 떠들썩하게 달구는 소문이다. 글을 올린 사람은 현재 일본 정부가 미국과 마찬가지로 민간인의 자료를 대규모로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방식은 미국의 프리즘 계획에서 시작됐고, 현대인의 생활이 인터넷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여러 매개체를 통하면 정부가 특정 인물의 정보를 엄청나게 찾아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격적인 부분을 심리 데이터로 구축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당장 광범위한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사람은 이는 심각한 사생활 침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고, 또 어떤 사람은 수집한 정보의 사용 방식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여겼다. 정부는 얼마 전 절대로 그와 같은 시스템을 운영한 바 없다고 공식 입장을 내놨다. 그러나 선인장의 실행 결과로 미뤄보면, 정부의 입장 발표를 믿을 수가 없다. --- p.387 료코가 현관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으려다 몸을 돌리며 물었다. “메이구 씨, 혹시 제가 착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기계나 과학기술을 싫어하십니까?” “기계를 싫어하지는 않아요. 탐정 일이란 게 가끔은 기계 덕분에 먹고사는 경우도 있고…. 기계에 의존하려는 태도가 싫은 겁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인류가 갖고 있는 인간성도 차차 없어질 겁니다.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해 생겨났고, 인간성은 과학기술 때문에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걸 혐오하는 거예요. 난 항상 기계보다 사람을 믿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요.” --- p.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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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첨단의 자리에서 써내려간 사이버펑크 미스터리
조지 오웰의 『1984』와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미래를 매우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린다. 인공지능의 감시가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끔찍한 사회. 찬호께이와 미스터 펫은 콜라보레이션 소설 『S.T.E.P.』을 통해 이러한 작품들의 계보를 잇는다. 소설 속에서 일반 시민들의 개인 정보는 ‘프리즘 계획’ 아래 무차별적으로 수집되며, 재소자들은 범죄 예측 시스템 ‘사보타주’ 혹은 ‘선인장’에 의해 형량을 주기적으로 평가받는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프리크라임 시스템이 사건 발생 전에 범죄 예측을 하는 상황을 다룬다면, 『S.T.E.P.』은 이러한 설정을 살짝 비틀어 사건 발생 후에 또다른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을 예측하는 상황을 다룬다. 좀더 제한된 범위의 감시/통제를 다루는 셈이다. 과연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은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 1회 수상자인 미스터 펫, 그리고 역시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 2회 수상자이자 『13.67』로 2015년 타이페이국제도서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찬호께이가 공동 집필한 추리소설이다. 작가들은 촘촘하게 근미래(2022~2053년)의 상황을 설정하고, 각자의 스토리텔링과 상상력을 정교하게 맞물리며 완성도 높은 콜라보레이션을 이끌어냈다. 찬호께이는 1장과 3장에서 미국을 배경으로 ‘사보타주’ 시스템의 성립과 그로 인한 비극적 사건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미스터 펫은 2장과 4장에서 일본을 배경으로 ‘선인장’ 시스템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추리게임을 속도감 있게 전개한다. 이 두 공간의 이야기들은 디테일한 대목에서 정교하게 상호 교차됨으로써 작품의 통합성과 유기성을 확보한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는 이를 두고 “작가들의 공동 작업은 단독 집필만큼 질을 담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만큼은 두 사람이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라며 평가했다. “무한대의 재능” 찬호께이의 최신작 찬호께이는 2015년 장르소설계 최대의 화제작 『13.67』로 한국의 수많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S.T.E.P.』은 그의 재능이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단순한 흥미 위주의 스토리텔링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자유라는 화두 아래 범죄 예측(혹은 감시) 시스템의 문제점을 묵직하게 파고든다. 형량평가제도는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개인에 대한 인권 침해 아닌가? 시민의 데이터를 무단으로 수집하는 것은 심각한 사생활 침해 아닌가? 범죄 예측이 만에 하나 잘못되어 무고한 개인을 억류할 위험성은 없는가? 찬호께이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저변에 깔고서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텔링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인다. 일본 추리문학계의 신神이라 불리는 시마다 소지가 찬호께이를 두고 “무한대의 재능”이라고 한 것이 허언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독특한 것은 찬호께이가 미래라는 틀 안에서 현실적인 범죄의 여러 양상을 두루 짚는다는 점이다. 외국인 포비아, 학교 폭력, 여성 혐오, 몰카 포르노, 도시 빈민, 흑인에 대한 편견 등 오늘날 사회의 문제들이 범죄 미스터리의 형식으로 생생하게 담겨 있다. 찬호께이는 잔학한 범죄와 소름 끼치는 범죄자의 내면을 숨 막히게 그려냄으로써 가공할 판옵티콘 세계에 대한 몰입감을 최대화한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미스터 펫 미스터 펫은 찬호께이와는 조금 다른 각도로 범죄 예측 시스템이라는 주제에 접근한다. 소설 속에서 일본은 미국 ‘사보타주’의 소스코드(원시코드)를 받아 ‘선인장’이라는 시스템을 현지화 개발한다. 선인장 역시 범죄 예측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사생활과 인권 침해 등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긴 마찬가지다. 다만 미스터 펫은 그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시스템의 교란’에 초점을 맞춘다. 일본 반정부 세력은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선인장 시스템을 흔들려고 한다. 작가는 경쾌하고 산뜻한 필치 아래, 정부와 비밀조직 간의 놀라운 이야기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려준다. 특히 미스터 펫이 선보이는 게임적인 세계관과 사이버펑크 분위기, 정교한 밀실 트릭 등은 가히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하다. 현실감 있는 도쿄의 거리, 그리고 료코와 페이메이구의 미묘한 연애감정 역시 소소한 재미를 준다. 추천의 말: 박상준 × 김봉석 “그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된 중화권SF는 손에 꼽을 정도이고, 아마 휴고상을 받아 화제가 된 중국 작가 류츠신의 『삼체』를 제외하면 크게 의미 있는 작품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S.T.E.P.』에서는 『삼체』에 버금가는 중량감이 느껴진다. 게다가 색깔도 다르다. 중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삼은 『삼체』가 20세기 정통 SF의 정서를 담고 있다면, 『S.T.E.P.』은 그야말로 21세기에 만개하고 있는 사이버펑크의 한 모범적인 변주이다.” _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S.T.E.P.』은 SF와 미스터리가 유려하게 결합된 소설인 동시에 두 작가의 지향과 장기가 무엇인지도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두 개의 작품을 읽는 것 같으면서도, 두 개의 다른 이야기가 하나의 설정 안에서 맹렬하게 자가발전을 하고 있다.” _김봉석 문화평론가 표지 일러스트레이터의 말: 백두리 × 윤미원 “그림 의뢰를 받았을 때 두 작가가 함께 쓴 책을 두 개의 표지로 만든다는 콘셉트가 매우 흥미로웠다. 그런데 그림 그리는 사람마다 아이디어를 전개하는 방식, 그것을 표현하는 법도 모두 다른데 두 개의 다른 그림이 하나의 세트처럼도 보이는 연결 지점을 표현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다시 한 번 찬호께이와 미스터 펫이 얼마나 치밀하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며 하나의 퍼즐을 완성했는지에 대해 감탄했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면 멀리 떨어져서 봐야 알 수 있고 가까이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듯이, 책을 읽고 나면 표지 그림을 어떤 의도로 그렸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_백두리 × 찬호께이 × SABOTAGE “글처럼 표지 이미지 역시 두 작가가 공동으로 작업하게 된 것이 재밌겠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두 작가의 글을 계속 생각하며 풀어나가려 애썼는데 외려 지금 만들려는 것이 글이 아닌 이미지이며 맞물리는 방식이 글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생각이 전환되면서 더 작업이 쉽게 풀리게 되었다. 글이 독자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이미지에서도 유지해보려고 했는데 글과 연결이 되기도 하면서 또다른 느낌으로도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한다.” _윤미원 × 미스터 펫 × SABOT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