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YOON DEA NYUNG,尹大寧
윤대녕의 다른 상품
|
그녀와 나는 강물 앞에 앉아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난생 처음 여자의 냄새를 가까이에서 맡고 있었다. 그 희고 부드러운 살의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야릇한 향기. 시시각각 미세하게 변하고 있는 그것의 분분한 움직임. 그녀가 숨을 참고 있다는 느낌. 낮게 불어가는 새벽바람에 원피스 자락이 그녀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그때 내게는 에스키모 왕자가 찾아와 있었으므로 마음 한편이 몹시 든든했다. 별이 많은 밤이었다. 그런 밤에 여인과 앉아 있는 것이 내게는 생의 첫 번째 신화였다.
"저렇게 많은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까닭 없이 무서워집니다. 저 자신이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소리마저 맑디맑은 사람이었다. "아마 아름다운 나이여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걸 겁니다." 사루비아처럼 그녀가 웃었다. "남자가 못 하는 말이 없습니다. 때로 그것은 아주 무서운 말이 됩니다." "......" "저는 제 나이가 두렵습니다. 스무 살이 왠지 삶과 죽음의 경계로 생각됩니다." --- pp. 58∼59 |
|
"그를 여기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라면 사실 떠날 이유가 없는 게 아닐까."
그녀는 빈 커피잔만 둥그렇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모습이 내 눈에서 흐려졌다 뚜렷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언뜻 가깝기도 하고 실은 아직까지 먼 사람이기도 했다. 한참 만에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소년의 음성으로 변해 있었다. 핀이 떨어진 것처럼 문득 머리칼이 풀려 내려와 그녀의 뺨을 가리고 있었다. "사랑을 하면서 그 앞에서 너무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럼 상대도 점점 자신을 잃게 되죠. 무슨 말이 하고 싶냐면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었으면 한번 그렇게 해보는 게 좋겠다는 거예요. 그게 머뭇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 pp. 38∼39 |
|
시처럼 압축적이고, 산문처럼 구조적인 전혀 새로운 장르
시설 시리즈는 한마디로 시와 소설이 어우러진 새로운 장르를 말한다. 즉, 시처럼 압축된 간결함과 언어의 밀도, 거기에다 산문의 구조적 완결성이 결합된 새로운 글쓰기이다. 일상적 현실의 무게를 직관과 상상력을 통하여 아름답게 포용해내는 장르로서, 프랑스 문학에서는 ‘레시 포에티크'라 불린다. 소설의 산뜻한 매혹 속으로 다시 독자들을 불러모으다 기존의 장편 소설이 그 긴 호흡으로 인해 어떤 독자들과는 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인 만큼, 언어의 아취를 드러내면서 부담스럽지 않은 산뜻한 호흡의 글의 여정이 필요했다. 시설 시리즈는 시의 난해한 비의성이나 소설의 무게감으로 인해 기존의 장르에 등을 돌리고 있는 독자를 책의 매혹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계기를 만들어줄 것이다. 중단편 분량의 글(200자 원고지 250매 내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다시 기존의 시와 소설로 이르는 소통를 발견하기를, 보다 더 친근하게 문학에 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상상의 여백을 더욱 넓힌다. 소설과 그림의 잘 섞인 아름다움 시설 시리즈에는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상급 화가의 그림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다. 글의 보조적인 수단으로서의 일러스트가 아닌, 글과 그림이 최대한 상승효과를 줄 수 있는 그림이다. 작가와 화가가 서로 작품에 관해 대화해가면서 작업하기도 하였다. 그림 작업의 비중이 컸던 만큼, 이 책에는 화가와 그림에 대한 짤막한 에세이 ‘이 화가의 빛깔'도 실려 있다. 소설에 일러스트가 들어간 책들이 더러 눈에 띄긴 하지만, 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시설 시리즈 한 권 한 권은, 소설가의 책이면서, 동시에 화가의 책이기도 하다. 책은 또 다른 회화 공간, 최고의 화가들과 그들의 그림 읽기 《에스키모 왕자》의 화가 하정민은 이미 화가로서 누릴 수 있는 영예는 웬만큼 다 누린 작가이다. 그러나 그는 책이라는 새로운 회화 공간을 시도하고 싶어했다. 미술평론가 이경모는 그림이 글의 내용과 매우 부합되면서도 직설적이지 않은 은유를 느끼게 한다고 평했다. 《공룡》의 화가 정정엽은 광주 비엔날레, 여성미술제 등에 초대되었던 작가로, 페미니스트 미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정정희가 묘사한 여성의 일상은 그의 손끝에서 그대로 살아났다. 주인공에게 감각된 인상은 바로 주인공의 감각의 매커니즘에 의존해 그려져 있다. 《붉은 꽃 이야기》의 화가 우승우처럼 한강의 소설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화가는 드물 것이다. 그야말로 봄이 오면 새싹이 트고, 물 흘러 꽃 피는 자연의 법칙을 말하는 듯하다. 활발한 운필, 실경과 인물, 일상과 탈속을 헤집고 다니는 그의 그림을 보면, 한강이 읊은 탈속의 언어가 더욱 가슴 깊이 스며들어온다. |